brunch

프롤로그, 대간산행을 준비하며

D-DAY가 결정되다

by 플랫폼

내 마음은 어느날부터 늘 산에 있었다. 산이 날 원하는지는 전혀 무관심한 채. 혼자만의 완벽한 짝사랑의 심정으로 난 점점 산의 마법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산에 들어서면 웬지 마음 편해지고 행복해 질 것 같았다. 내가 어릴적 나무 땔감하러 다니던 그런 동네 뒷산처럼 그져 애틋하고 마음 포근해지는. 난, 가능하면 인적이 드문 조용하고 그져 얕은 산이면 좋았다.


온종일 걸어도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그런 후미진 산길만을 한동안 동경하고 고집했다. 이유는, 나의 영원한 반쪽인 노랫가락의 힘에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아니면 산행초보라 다른 산객들에게 내 비루한 몰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또한, 숲속 모든 주인공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나도 당당히 산과 숲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은 어머니품속처럼
포근히
날 감싸주었다



사실, 십수년 전, 나에겐 낚시 삼매경에 푹 빠져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웬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왔다. 붕어에 대한 나의 애착은 극에 달했다. 이번 주말은 어느 저수지로 향해야 할까, 가 온통 내 머릴 지배하고 있던 애틋했던 시절. 그러나, 어느날 불행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그 낚시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니.


이유는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졸음운전 탓이었다. 아니, 전날 과음이 더 큰 원인이었다. 낚시 삼매경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댓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낚시를 마치고 아지트로 귀가하다 졸음운전으로 그만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

설악산 상봉

꿈에서 깨어났을 땐 어느 병원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애꿎은 천장만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잔뜩 째려보는 형광등 조명의 눈빛들을 피해 실눈을 뜨고 조용히 내 몰골을 살펴보니, 머리엔 바늘로 수십번 꿰맨 흔적이 역력했다. 뭔가가 있었구나 짐작만할 뿐 한동안 긴 정적이 흘렀다. 거기다가 아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 다시금 눈을 감아 버리기를 여러번. 그게 마지막이었다. 낚시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었다. 난 아모르파티를 조용히 준비중이었다.


지금껏 투자한 수많은 노력과 재화들이 아깝기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그만 둘 수 밖에 다른 선택지는 나에게 전무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시간은 하릴없이 남아 나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댔지만 난 마땅한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전혀 할일이 없었고 갈때마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성쳐대는 수많은 시간들의 외침들을 마냥 외면하려 발버둥쳐댔지만 결국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내 인생의 총지휘자인 전두엽도 마땅한 답을 줄 순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유감스럽게도 난 그 즈음 무직 상태였다. 철없던 시절, 10여년전 IMF때 구조조정의 희생양으로 어찌 어찌하여 난 사업이란걸 선택했다. 순전히 꿩대신 닭의 심정으로. 한때는 그럭저럭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파랑새를 찾아 떠나가는 어느 소년처럼 철저한 준비도, 시장조사같은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하지 못했던 그런 무지랭이 사업이 오래갈리 만무했다. 그 사업 역시 일찍 종말을 고했다.


10여년 이어왔던 사업이 무너지고 나에게 일이란게 곁을 떠나더니만 그 빈자리를 갑자기 공포란게 차지했다. 난 정말 갈데도, 할일마져도 없어져 버린 것. 존재했지만 현실에 존재치않는 유령으로 몇 날 며칠을 방에서 뒹굴며 그렇게 지냈다. 완벽한 유체이탈이자 은툰형 외톨이였다. 그것마져 지루해지는 날엔 친구들과 마주앉아 알코올에 의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의 시선도 곱지 못했다. 가장이기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나에게 점점 기대가 무너져 가고있는 그녀의 모습이 역력했다. 솔로몬의 지혜라도 빌려와야 했지만 마땅한 해법이 나올리 만무. 며칠을 고심끝에 나에게 선택된 건 이었다. 비록 비생산적이긴 했지만 최소한 아내의 가시돋힌 눈길만큼은 피할 수 있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악쯤은 되었지 싶었다. 산삼이라도 캐러 다녀야 했지만 산에 대해서 아는게 전무했던 일개 무지랭이가 선택할 수 있는건 겨우 시간을 때우는 것 정도.


다행스럽게 산은 기울여진 운동장처럼 만만해 보였고 인생 패잔병인 날 아무런 조건도없이 받아 주었다. 천오백원짜리 김밥 한줄과 몇 백원짜리 물병하나면 그 하루가 해결되었다. 주변에 이름모를 야생화도 널려있었고 호기심많아지던 나에게 호랑나비, 제비나비들은 낙원 그자체였다. 하루란 시간을 먹어 치우기엔 이만한게 없어 보였고 한동안 낙원이 펼쳐졌다. 난, 정신줄까지 놓아가며 산과의 짝사랑 놀이에 점점 심취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야생화 세계에도 빠져들었고 숲의 모든 생명들이 날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야생화 카페나 곤충 카페에도 차례로 가입했다. 이젠 내가 왜 산에 있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일만 남은 셈. 산은 정말 정직하고 순박했다. 더하기 빼기에다가 독도법에 의한 지도보기 정도만 할줄 알면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 오른 만큼 반드시 내려오는 수고로움은 스스로 견뎌내야 할 나의 몫. 방향이 잡히니 점차 몸과 마음이 산에 적응되어 갔고 어려웠던 금연에도 성공했던 건 덤. 담배가 없던 자리는 대신 산과 야생화와 애벌레가 차지했다. 처음엔 동네산을 오르는데도 고통과 고행이 뒤따른다는걸 그땐 미쳐 몰랐다.



마루금곁으로 가야만하는 이유



그날 이후 난, 늘 산에 있었다. 육체가 사바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도 내 마음은 늘 산만을 고집했다. 속세에서의 방향감은 잃어버린 채 산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속세에서의 길은 늘 불안했고 만족하지 못했고 늘 산에 기대고 싶었다. 속세에서의 길과 산에서의 길이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산은 내가 힘들어 할때 조건없이 어깨를 내어주고 보듬어 주기도 했다.


어느날, 내가 힘들어 멈추고자 할때 가끔 이 되주기도 했고 또 긴긴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다시금 걷기를 원할땐 이 되주기도 했다.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는데 한치의 주저함조차도 없는 산의 품에 난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지옥같던 회생기간도 끝나가고 나에게 딱맞는 아담한 직장도 하나 찾았다. 가장으로서 최소한 의무는 다해야 했기에. 수심 가득했던 아내에게서 조그마한 미소가 나타났던건 큰 행운이었다.

설악산 신선봉에서

그렇게 산과 함께했던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고 2023년 대망의 새해가 밝아왔다. 갑자기 나에게 없던 욕구가 용솟음쳤다. 나와 겨레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었던 것. 욕구 해소엔 백두대간만한게 없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마루금의 내면 속살이라도 조금 밟아봐야 할 것 같았다. 민초들의 삶의 애환과 숱한 역사적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영남 선비의 고장 함양과 오지중의 오지 전북 장수를 연결하는 육십령에서 할미봉을 향해 오름짓해봤다. 최강 한파를 뚫고 괴산 희양산 암봉속의 클라이밍도 경험했다.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 천제단에서 용광로의 쇳물처럼 타오르는 오색찬란한 일출의 장면까지도 마음속에 담았다. 이젠 시인의 마을이 되어버린 선자령은 날 무심히 맞아주었고 대야산장성봉을 있는 고개, 버리미기재의 철통같은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숲속 나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돈다. 길섶 이름모를 야생화들의 외침이 한없이 애절하게만 들려온다. 마루금의 울부짖음과 속삭임이 동시에 내 심장속으로 점점 파고드는 시간.




백두대간에 관한 책들도 구입해 읽어보기 시작했다. 동안 무관심했던 정보들이 수두룩했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등뼈인 백두대간.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는 우리 민족의 고유인식체계에 대해서도 인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분지로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된 5천년 지리인식체계에 대해 후손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생각해 보았다. 이 시간 이후 차령산맥이나 노령산맥이니, 이런 키워드는 내 뇌리속에서 완전 지워버리기로 했다. 오늘도, 내일도 난 마루금곁으로 가야만하는 이유가 명백자명해졌다.



D-DAY는 결정되고 나와 마루금의 시간만 남다



난, 아직도 첫 걸음마조차도 떼지 못했다. 잘 할수 있을까. 엄동설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대간 마루금을 온전히 완주할 수 있을까. 왜 마루금을 고집하는 걸까. 지인들에게 불쏘시개용으로 떠들고 세치혀로 마음껏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두동강나 상처투성이인 백두대간 마루금의 이야기라도 직접 들어봐야 겠지만, 아무런 메아리조차도 없는 부질없는 질문같았다.

태백산 천제단 일출

시작하려면, 아직 준비할게 너무나도 많다. 겨우 정보 수집과 기초체력 다지는 일 정도. 선답자들의 경험담과 산행기들을 접하며 한껏 포부를 키우는 중이랄까. 조만간 들어갈 것이다. 시간이 되는대로, 마음이 닿는대로. 23년 5월초로 D-DAY가 잡혔다. 기다려진다. 지리산 주능선이 열리는 그 날.


이제 한달하고도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마루금이 버선발들고 반겨주기를 고대해 본다. 대간이 날 원치않아 밀어내지 않는 한, 난 달려갈 것이다. 하늘길을 향해 떠나갈 생각에 가슴이 온통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어서 리허설은 끝이나고,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