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바위와 촛대바위는 말없이 가라한다
2022년 10월 09일, 세종대왕께서 뭇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셔 한글을 반포했던 날. 플랫폼의 백두대간 대장정, 그 기나긴 여정의 리허설 또한 시작되었다. 마루금 완주를 선포하러 떠나는 날. 난 북녁땅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진부령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 날씨도 주변도 모든게 좋아보였다. 차 손잡이에 미세한 떨림들이 전해져 왔고 그 손잡이를 강하게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아스팔트 바닥 진동이 오히려 진하게 나에게로 전달되어 왔다.
난, 왜 대간러가 되고 싶은 것인가, 혹시 세속의 삶에 지쳐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것인가. 누군가, 가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든 그냥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살다보면 누구든 그런 날이 있다. 내 마음이 지금 딱 그렇다. 비라도 잔뜩오는 날엔 애써 고루한 표정 잔뜩 지어가며 구석진 카페자리 하나 차지해 온종일 고독을 만끽해 보고 싶기도하고, 또 어떤 날에는 서해바닷가 후미진 곳 어느 갯바위 위에 홀로 앉아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속에 흠뻑 빠져보고 싶을 때도 있다.
오늘처럼 머릿속이 엉켜버린 실뭉치처럼 뒤죽박죽하여 그냥 모든걸 내려놓고 싶은 날엔 미지의 곳으로 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마냥 걷고 싶을 뿐이다. 운좋게 하늘이 잠시 열려주기라도 한다면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숙고끝에 정한 곳은 신선봉. 금강산 화암사 주차장에 애마를 파킹하고 부푼 마음 진정시키며 오른다.
가을의 시작을 알려주는 듯 일부 성질급한 나무들은 이파리를 벌써부터 오방색으로 물들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쌓였던 긴장감을 덜어내려 해보지만 오히려 마음만 더 급해진다. 한시간여를 숨가쁘게 달려 도착한 마루금 접속로. 설레였던 마음이 어느새 내려앉고 내 안에서 꿈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능선길따라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미소짓고 또 먼 동해 쪽빛바다를 바라보며 룰루랄라를 연신 외치면서 걷는다.
하늘엔 구름들 살랑거린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 남쪽구간 일부를 지나다 이윽고 내 마음이 닿은 신선봉.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이었다. 백패커들은 벌써부터 별밤을 준비하는 중. 그곳 봉우리에 서서 먼 발치에서 파도치듯 꿈틀거리는 금강산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비로봉은 어디쯤일까.
순간, 희망이 용솟음치고 일곱빛갈 무지개가 가물거렸다. 마치 집나가버린 꿈이 되돌아 온듯. 멀리서 플랫폼님! 어서오세요 라며 손짓해주는것 같았다. 동해의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잿빛 바다멍에도 푹 빠져본다. 먼 북녁땅을 향해 힘껏 기도도 해 보았다. 남북 분단의 비극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척추가 부러져 허리가 잘려나간 분단의 아픔들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하나되어 대간 마루금 하늘길이 조속히 연결되어 주기를 염원해 보았다.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가슴속 깊은곳에 담아본다. 아버지의 산, 백두산에서 새로이 시작해서 북쪽 반쪽도 조속히 이어 걸을 수 있기를. 그 소망하나 산들 바람에 고히 실어보냈다. 하늘을 향해서, 머나먼 바다를 향해서 점점더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는 한길이 있으니, 그 이름하여 백두대간 마루금이라 칭한다.
그 길은 또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서는 길이기도 하다.
난, 그 길을 가고자 한다. 도상거리 690여 킬로미터, 실제거리 1,000킬로미터. 이 땅에 뭇 생명을 존재케 하고 열개의 큰 강을 흐르게 한 근원으로서, 6개도와 12개시, 18개 군에 걸쳐있는 남녘의 등줄기를 직접 걸어볼 것이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땅의 하늘길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걸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릴것이다.
대간마루금의 시간은 바짝 다가오고
나에겐, 고행의 시간만 남다
D-DAY가 며칠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2023년 5월 5일. 그 날은 나에게 반드시 의미있는 날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게 중요했다. 난, 동안 내 자신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겨왔다. 하지만, 지금부턴 달라져야 한다. 가슴이 떨리고 심하게 울렁거린다.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흥분보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앞선다. 난, 과연 아무런 문제없이 백두대간 하늘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두갈래 길이 내 앞에 서있다. 난, 그 중 한길을 택했다. 고행의 길이다. 혹자는 쉬운길을 놔두고 굳이 힘든길을 택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에겐 힘이 드느냐, 아니냐. 옳고 그름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러는 사이 또 한해가 지나고 23년 4월 30일. 난, 추암 촛대바위에 섰다. 모든걸 내려놓고 싶었다. 비워내고 싶었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던져버리고 주변도 좀 보고 가끔씩 뒤도 돌아보며 다사다난했던 지난 삶을 회고해 보고 싶었다.
멈추면 과연 행복일까
멈춰서면 과연 보일까. 가다보면 길은 있는 걸까. 막혔던 심장이 뻥뻥 뚫리긴 하는걸까. 저 동쪽 수평선 끝에서 용광로의 쇳물처럼 작열하며 떠오르는 태양신께 두손 고히 모아 기도드렸다. 동해 천길 심오한 바닷고 용왕님께도. 저 하늘끝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시는 염라대왕께도 두손 고이 모아 소원해 보았다. 대간마루금 무탈하게 완주하게 해달라고. 조그마한 미풍에도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하루빨리 남과 북이 하나되어 단절된 대간 마루금이 이어질 수 있기를 빌어 보았다. 나의 간절하고도 절절한 마음 들어주실까.
리허설은 모두 끝나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제 달릴일만 남았다. 문제는 나의 마음. 자그마한 미풍에도 자꾸 흔들려대는 내 마음이 어떨지. 저기 멀리 물밑에서 잔잔히 떠오르는 태양이 나에게 미소지어 주는 듯하다. 옆에서 지켜줄테니 앞만 보고 가시라한다. 이른 아침, 바람이 꽤 차갑다. 다시 방향을 바꿔 영월 땅으로 향했다. 라이딩을 계획했지만 무리로 보였다.
선바위골 소원바위가 눈에 아른거렸다. 도착한 어평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날 비웃기라도 하듯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펑크난 고무주부에서 바람 빠져 나가듯 자주 변하는 내 몰골을 보며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다음에 꼭 이곳을 지나고 말거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추스리며 구렁이 담넘듯 그 고개를 뺘져나왔다.
마지막 리허설. 소원바위를 향해 한발 두발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청명해진 하늘과 들머리에 개벚지나무가 유난히 살살거리며 날 반겨준다. 사랑과 희망의 빛들이 꽃망울에 가득하다. 금낭화, 삿갓나물의 속삭임따라 20여분 올라 주었더니 소원바위가 눈에 어른거렸다. 우람한 자태,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고 순간 난 긴장했다. 자장대사의 원혼과 부처님 진신사리의 뒤태가 되살아나 듯 스멀스멀 피어났다. 영험하고 당당해 보였다. 순간 내 두 발이 얼어버린듯 굳어버렸다.
소원바위는 말없이 가라한다.
신라의 고승인 자장대사가 고행끝에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명당터를 뒤로 하고 선바위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왠지 발길이 가볍다. 홀아비꽃대도, 초록의 노루귀도 미풍에 흔들거린다. 정상은 부드러웠고 여인의 뒤태처럼 미려한 산의 품격이 느껴진다. 저멀리 어제 지나와던 어평재와 여인네 젖가슴처럼 유려한 마루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즐거운 하산길이다. 조짐이 웬지 좋다. 동의나물이 지천에 깔려 날 호위해주고 당개지치도 완연해진 봄의 기운에 점점 취해간다. 이렇게 나의 리허설은 모두 끝났다. 며칠 남지 않은 출정식. 이제 실전만 남았다. 봄엔 아름드리 꽃을 피우고 여름엔 짙은 녹음과, 가을엔 화려하게 오방색 단풍으로 치장하며 한해의 모든걸 내려놓고 드디어, 긴긴 침묵의 또다른 봄을 만드는 중인 겨울.
난, 이 길을 걸으려 한다. 때로는 울창한 나무가 되어보는 허황된 꿈에도 취해보련다. 또, 어떤때는 마루금길속을 홀로 운무와 함께 흐르며 신선이 되는 꿈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천왕봉은 과연 날 받아줄까
계속해서, 03 기상특보가 해제되다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