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유치원에서 ‘내 동생 개구쟁이 귀염둥이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하는 동요를 배울 때 그 동요 속 동생은 왕자님인데 현실의 내 동생, 종우는 왕자님이 아니다. 태어나기도 3.4 kg 우량아로 태어났고 먹는 것도 엄마 젖, 분유 안 가리고 잘 먹었다. 동생이 군대를 마쳤다. 제갈 상길과 최성현이 이혼하고 다음 해에 동생 종우가 군대 가 있는 21 개월은 최성현과 제갈 보민 둘이 지냈다. 표현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있었다.
여자나이 계란 한 판 채우고 두 살이 넘도록 맞선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이혼한 엄마는 걱정이다. 최성현은 스물여섯에 제갈 보민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니 서른둘 나이면 딸이 일곱 살 포천 신읍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원생이었다. 현재 보민 나이 서른둘에 남자 하나 제대로 인사 한번 못하고 한탄하고 있다.
보민 가족이 양주군 가납 비행장에 살던 때가 있었다. 제갈 상길이 무인항공기 중대장으로 근무하게 되어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군 가납에 있는 가납초등학교 5 학년에 전학을 했다. 네 살 차이 종우는 1 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여름방학에 전학을 했기 때문에 보민 종우 남매는 9 월 2 학기 개학 때 새 친구들에게 첫인사를 했다.
보민은 5 학년이지만 거쳐 간 학교는 6개나 되었다. 그래서 이곳 가납초등학교로 전학을 할 때 서무실에서 학교행정공무원이 어머나 이 학생은 학년은 5 학년인데 학교는 6개나 되네요? 하였을 때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예, 애들 아빠가 직업이 군인이라서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학년은 5학년 학교는 6개인 것을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학 한번 할 때마다 기존의 학생들의 텃세에 시달려야 했고, 어떤 애와는 싸우고, 도저히 내가 싸울 상대가 안 되는 애에게는 서울서 구입한 미키마우스나 곰돌이 캐릭터가 들어간 공책이나 지우개 연필 등으로 환심을 샀다. 엄마는 은근히 내가 전학을 많이 한 것이 아빠가 정보장교라서 그런 것처럼 말을 둘러댔다.
“애 아버지가 군인이면서도 하필이면 정보장교라서 예고 없는 전출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딸 학년 숫자보다 학교 수가 많아졌네요.”
“어머나 정보장교는 진급도 힘들다고 하던데, 소령이시면 정말 하영 아버님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예, 그래서 여기 가납 무인항공 중대장도 정보학교 교육도 다 마치기 전에 수료증은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고 부랴부랴 온 거예요.”
“아, 그러시군요. 나중에 학생들 비행장 견학이나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 제가 애들 아빠에게 한번 말해보겠어요.”
군인가족 세계에서 남편이 대위면 여자는 소령이고 남편이 소령이면 여자는 중령 남편이 대령이면 여자는 장군이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그 말뜻을 몰랐다. 내 나이 계란 한 판에서 하나 빠지는 나이가 되다 보니 사회생활도 별반 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회사의 일만 죽어라고 하는 사람보다 나보다 한 직급 높은 사람과 술도 마시고 영화도 같이 보고 골프도 함께하는 사람이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보다 승진을 잘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마 학생시절 전학을 가본 사람만이 전학생의 심정을 알 것이다. 과부가 되어야 과부 심정을 알고 홀 아비 되어야 홀 아비 심정 알 듯 처음 단체생활을 경험한 것은 경기도 포천 신읍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때이다. 그때 아빠가 포천의 00 군단 정보처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포천의 진군아파트에 살면서 신읍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추첨을 하느라 엄마와 성옥 이모가 전날 밤부터 신읍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라면박스를 깔고 밤을 새워서 병설유치원생이 되었다. 병설 유치원을 졸업하고 신읍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읍초등학교 1 학년은 유치원 출신들이 반장과 부반장 무슨 부장 등을 다 맡았다.
여름방학이 지나 가을 추수 무렵 상길은 XX군단 정보처에서 대전에 있는 육군대학의 학생장교가 되었다. 보민도 대전 신봉 초등학교 1 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아빠도 6 군단 마크를 떼고 육군대학 마크를 달고, 보민도 신읍 초등학교 이름을 지우고 신봉 초등학교 1 학년 2 반이라고 공책마다 수정을 했다. 보민이 조금 일찍 끝나서 그렇지 둘은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보민은 신봉 초등학교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였고, 상길은 육군대학의 교관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밤늦게 지도에 비닐을 붙이고 이상한 기호를 지도 위에 그리고 또 노트에 기록도 했다.
최성현은 종우 우는 소리가 그와 보민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동생을 업고 아파트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이듬해 봄 아빠가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경기도 장호원의 XX군단 정보처로 근무지가 결정되었다. 나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년은 2학년인데 학교는 3 개가 되었다. 전학을 갔을 때 나래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9명이었다. 전교생의 숫자가 20명 이하면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청에서 노랑 통학버스를 운영한다고 했다. 전학을 가서 학교가 폐교되는 것을 막아 보민은 타의에 의해 나래초등학교 폐교 위기를 구해낸 구원투수가 되었다.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네가 전학생 강 하영이냐?’ 하고 언니들이 물으면 네 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1년 후 상길은 XX군단에서 서울 정보사령부 본부로 발령이 났다. 정보사령부는 군인아파트 대기번호가 2 년이 지나야 대기번호 14번이 군인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다고 했다. 2년 후 면 또 다른 부대로 전출 갈 것이기 때문에 외가가 있는 영등포구 신길 5 동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대방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대방초등학교를 1년 다니고 다음 해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보병 XX사단 전방연대 정보과장이 되었다. 보민은 대광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여기서 또 보직을 마친 상길은 1 년 후 양주군 가납 비행장의 무인항공 중대장이 되었다.
전학을 가면 둘 중 하나의 노선을 바르게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반의 ‘일 짱’이라는 애를 누르거나 아니면 그 애의 마음에 들 선물을 준비해서 다른 애들이 나를 건들지 못하게 해야 편하게 학교생활을 한다.
엄마는 그럴 때 쓰라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은 공책, 연필, 지우개는 항상 차고도 넘쳤고, 일반 문구점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남대문 우주선 문구 본점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것이라 품질도 좋고 그림도 예뻐 문구로 가는 곳마다 ‘일 짱’의 환심을 샀다.
문제는 동생 종우였다. 전학 후 며칠이 지난 후 담임 선생님이 가정 통신문에 ‘제갈 종우 어머니 학교 방문 바랍니다. 담임 송미정’ 메모가 있었다.
엄마는 종우를 불렀다.
“종우야?”
“왜?”
“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니요?”
“그런데, 왜 엄말 오라지?”
“선생님이 엄마 보고 싶은 모양이지?”
최성현은 옷장에서 검은색 투피스를 꺼냈다. 명동의 모 백화점에서 아빠의 눈총을 받으면서 구입한 샤넬 검은색 핸드백을 걸쳤다. 그 핸드백을 사던 날 아빠는 아빠 몇 달치 봉급이 핸드백 하나 값이냐? 고 놀랐고 명품 핸드백을 걸친 여자를 아빠는 ‘된장녀’로 불렀는데 그런 ‘된장녀’가 당신 마누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고, 엄마는 군이 봉급 쥐꼬리만 한 걸로 이 만큼 살림 살고 서울에 아파트 하나 마련한 여자 있으면 군인 마누라 중에 나와 보라 그래? 하고 맞서 싸웠다.
종우와 난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빨리 휴전이나 종전되기를 기다렸다.
최 여사는 금색 쇠줄이 치렁치렁한 핸드백을 매고 가납 초등학교를 엄마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시골학교라 아담했다. 교무실로 찾아갔다. 1학년 2 반 송 미정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송 선생님 앞자리 선생님이 말을 건넸다.
“1 학년 어느 학생 학부모신가요?”
“예, 제갈 종우 엄마입니다.”
“아! 제갈 종우 참 영특한 아이입니다. 혹시 조상이 제갈공명인가요?”
“아니, 뭐.. 제갈 성씨가 본이 하나라서.”
“2 반 송미정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종우가 2반 교실의 금붕어를 학교 뒷동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네?”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건 좀 있으면 송 선생님이 종례 마치고 오시면 들어보세요.”
“네.”
학교 종이 울리자 운동장으로 애들이 뛰어나왔다. 1 학년 2 반 송 미정 선생님이 교무실로 들어섰다.
“송 선생, 여기 종우 어머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알림장 보고 왔습니다.”
“네, 사실은 제가 직접 종우 집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거기는 군부대 관사라서 들어가려면 신분증도 정문에 맡겨야 하고, 일지에 제가 들어간 기록 남으면 다른 학부모가 오해할 수도 있어 이렇게 어머님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종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어머님, 종우가요 어린이가 아니고 완전 애늙은이예요.”
‘네에?
“좋아하는 것은 집중해서 빨리 하는데, 싫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선생님이 좀 잘 지도해 주세요?”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경지를 넘었어요.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은 학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만 잘해도 대학을 가는데, 한국은 골고루 잘해야 내신 등급 잘 받고 좋은 대학 들어가는데 종우는 도저히 한국 교육제도에 맞지 않는 아이 같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경제적 여유되시면 노르웨이나 스위스, 캐나다 아니면 중국의 국제학교라도 유학을 보내시는 것이 좋겠어요.”
“유학 보낼 돈이 있었으면 이런 시골 군인관사에 살겠어요? 애 아빠가 군인이라 여기저기 전학을 많이 다녀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담임인 저도 처음에는 종우가 좀 떨어지는 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통의 아이 이상의 두뇌 소유자입니다. 수학은 1 학년이 3,4 학년 언니들의 과정을 이해하고 있고 일부러 관심 갖게 남들 안 하는 행동도 하고 있어요.”
“무슨 일 있었나요?”
“어머님, 놀라지 마세요. 며칠 전에는 교실에 금붕어 4마리를 종우가 교실 뒷동산에 묻고 나무젓가락을 고무줄로 묶어 십자가를 만들어 무덤에 세웠더군요.”
“세상에?”
“어린애가 잔인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무덤에 십자가를 해준 걸 보면 생명을 경시하는 애는 아니고 정말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애입니다.”
“어머나, 어머나!”
“더구나 애가 왼손잡이라서 오른손에 연필을 쥐어주면 힘이 없어요. 그런데 왼손으로 쓰라고 하면 모양은 형편없는데 빨리 쓰거든요.”
“저도 집에서 왼손잡이 고치려고 했는데, 서울에 살 때 S 대학교 심리학과 정신의학과에 가서 상담받으니 그냥 왼손잡이는 왼손을 쓰게 하라고 해서 그냥 두었거든요. 애 아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왼손에 붕대를 감아 오른손잡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은 집중해서 잘하는데 음악, 미술, 체육은 완전히 배를 째라 식입니다.”
“선생님, 제가 금붕어는 4 마리 교실에 사서 다시 원상 복구하겠습니다. 종우를 선생님이 좀 잘 지도해 주세요. 정말 유학 보낼 형편 안 됩니다.”
“예, 저도 노력은 하겠지만 어머님도 그 점 아시고 집에서 종우를 창의력은 유지하되 일반적 학생과 보통의 공감을 같이하는 연습을 시켜주세요.”
엄마가 학교에 다녀온 다음 날 저녁 식사를 엄마는 비행장 안에 있는 1 호 관사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엄마가 부대와 연결된 직통 전화로 아빠를 야간 비행이 있더라도 식사는 집에서 같이 하고 다시 나가 비행하라고 했다.
아빠가 지휘관으로 있는 무인정찰기 부대는 1 주일에 2 회는 야간비행을 하도록 상급부대서 훈련지침이 내려와 있었다.
전쟁은 밤에도 할 수 있기에 야간 비행은 필수라고 했다. 아빠는 야간 비행 준비 지시를 하고 식사를 하러 관사로 왔다. 항공부대 안에 있는 육군항공의 다른 조종사들과 정비사 그리고 육군항공 중대장도 함께 식사에 초대되었다. 관사는 넓은 잔디밭과 통신선을 감는 방통을 이용한 원형 식탁이 있기 때문에 외부 식당으로 외식을 안 가고 집에서 준비해 먹어도 외식 분위기가 났다. 엄마가 씻어주는 야채와 소금, 후추, 김치, 풋고추, 마늘, 기름장 등을 종우와 나는 주방에서 원형 식탁으로 운반했다. 아버지와 운전병 광재 아저씨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광재 아저씨!”
“아니 광재 형!”
“그래, 보민이, 종우 잘 있었니?”
“예”
부대 운전병인 이광재 일병은 아빠의 군용 차량 7080 부대 501 차량의 운전병이었다. 군대 입대하기 전직이 모 음료회사의 2.5 톤 박스차량 운전을 했다고 한다. 정말 운전의 귀재라고 할 정도로 부대 차량과 부대의 대형 트럭에 트레일러를 달고 운전하는 것도 잘했다.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것이 인형 뽑기였다. 광재 아저씨가 뽑아준 펭귄, 곰, 인형을 가방에 달고 다니면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어쩌다 내 인형을 도둑을 맞으면 나는 엄마에게 일렀고,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하여 광재 아저씨를 보내 엄마에게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들고 문구점에 가면 새로 보충된 인형 중에 몇 개를 뽑았다. 문구점 아저씨는 광재 아저씨의 실력을 알기에 빨리 나가기를 바라지만 우리와 광재 아저씨는 엄마가 준 천 원 지폐를 다 소모할 때까지 뽑기를 했고 우리는 인형을 가슴에 안고 즐겁게 문구점을 나섰다. 어쩌다 아빠도 인형 뽑기에 도전했지만 돈만 날리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아저씨에게 주어 뽑게 했다.
“야간 비행인데 꼭 관사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한 이유가 뭐야?”
“오늘 종우 학교에 다녀왔어요?”
“왜?”
“종우 알림장을 봤더니, 학교 방문해 달라고 적혀있어서 다녀왔어요?”
“이유가 뭐야?”
“종우를 유학을 보내라고 하더군요.”
“왜, 우리나라 학교가 어때서?”
“종우는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맞지 않는 아이 같아요.”
“뭐야?”
“종우가 어때서?”
“자식이라고 편견을 가지지 말고 담임 이야기 그대로 전달할 게 당신 화내지 말아요?”
“말해봐?”
“종우가 교실의 금붕어를 4 마리 학교 뒷동산에 묻고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워주었다고 해요. 어떻게 생각하셔?”
“뭐야?”
“종우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아들아, 왜 금붕어를 죽였어?”
“애들이 담임 보는 앞에서는 금붕어 예쁘다고 하고, 선생님만 나가면 금붕어를 나무젓가락으로 머리나 꼬리를 건드리고 심지어 낚시로 붕어 낚시를 하고 다시 풀어주고 또 낚시를 하고 반복해서 금붕어 아가리가 다 찢어졌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빠 엄마가 금붕어라면 얼마나 스트레스받겠어요. 금붕어가 사람처럼 자살할 수 있다면 자살했을 거예요.”
“그래서 네가 금붕어를 뒷동산에 묻었어?”
“예, 그런 고통 속에서 사느니 안락사시켜 주자고 제가 그렇게 했어요?”
“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붕어 4 마리를 살아있는 생물을 생매장하니?”
“엄마, 아빠는 횟집에서 회를 왜 드시는데요?”
“회야, 식용이야 식용으로 먹는 것이지?”
“생선회 먹는 것보다 묻어주고 십자가 세워준 것이 더 인간적이지 않아요?”
동생 말에 엄마와 아빠는 할 말을 잊었다. 동생이 어려서부터 개구쟁이고 잘 때는 꼭 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잠을 잤다. 아주 어려 젖을 먹을 때는 엄마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잠이 들었는데 돌이 지나고 말을 배워 나를 누나로 부르고부터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잠들었다. 작은 손가락으로 나의 긴 머리카락 끝을 마치 화가가 색칠하기 전 붓끝을 만져보듯 머리카락을 좌우로 비비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꼬맹이가 이제는 식탁에서 엄마, 아빠와 당당하게 자기의 금붕어 4 마리 장사 지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동생의 저런 자신감 당당함이 부러웠다. 보민은 한 번도 자기 의견을 부모님에게 표현한 적이 없다. 옷이든 공책이든 연필이든 모두 엄마가 골라준 것을 사용했다.
“종우야, 내일 엄마가 금붕어 파는 곳에 가서 금붕어 4 마리와 어항 수초까지 새로 준비해 교실에 가져다줄 텐데 다시는 금붕어 다른 애들이 못살게 굴어도 너는 모른 체하고 지내 알았지?”
“그런데, 엄마 담임에게 왜 4 마리 금붕어를 안락사시켰는지를 말해주세요?”
“그래, 말씀드리마.”
“안 돼요, 엄마?”
“뭐야, 넌 또?”
“엄마, 내가 전학을 다닐 적마다 얼마나 왕 따 스트레스받았는지를 아세요?”
“어머, 보민이 너도 왕 따를?”
“그럼요, 제가 집에 와서 다 엄마 아빠에게 말을 안 해 그렇지 가는 곳마다 텃세 심해서 적응하느라 애 먹었어요. 종우도 금붕어 장사 지낸 이야기 하면 담임은 전체 학생들을 벌을 줄 것이 뻔하고 종우 엄마가 담임에게 일러 단체 벌을 받는 거 알게 되면 종우는 정말 왕 따 중에서 최상으로 왕 따 당해요. 그러니 엄마가 종우가 죽인 4 마리 원상복구만 하고 종우 사연을 말씀하지 마세요.”
“그래, 그 말은 네 말이 일리 있으니, 당신 금붕어만 사서 교실에 두고 담임에게는 금붕어 사놓았다고만 하고 종우 말은 하지 말아요?”
“뭔 소리예요? 우리 아들 억울함 풀어주어야지?”
“그러다 아들 정말 왕 따 당하면?”
“걱정 말아요. 매일 자가용으로 학교 태워 보내고 태워 오면 왕 따 당할 틈이 없어요.”
우리 남매는 엄마, 아빠 두 분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 엄마 성격을 뻔히 알기에 종우가 엄마가 교실에 금붕어 다시 사다 주고 담임 만나고 나면 동생은 왕 따 당할 것을 직감했다.
종우는 처음이지만 나는 다섯 번의 전학 경험으로 텃세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전학을 가서 텃세들과 싸워보기도 했고 공책이나 노트 지우개 등을 주어 환심을 사기도 했다. 아무리 선물로 텃새들의 환심을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나는 가납 초등학교에서는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서 검도를 배우게 해달라고 했다.
“아니, 남자도 아닌 여자가 웬 검도야?”
“배우나 탤런트들 여자가 칼 휘두르는 것 멋있지?”
“그래서 배우려고?”
“검도 배운다고 소문나면 텃새들이 우리 남매를 함부로 못하거든.”
“알았다. 그럼 종우랑 같이 배워.”
엄마는 우리 남매를 <파랑새 검도도장>에 등록을 했다. 아빠는 부대의 폐타이어 2 개를 가져다 관사 뒤뜰에 세워서 죽도로 검도 연습을 하는 허수아비 대항군을 만들어 주셨다. 남매는 폐타이어를 시간만 나면 죽도로 힘껏 내리쳤다. 당연히 실력이 향상되었고 집에 이런 개인 훈련 시설이 없는 학생들보다 우리 남매의 실력은 날로 발전했다. 학교 전체에 남매의 검도 배운다는 소문과 검도 사범이 공개적으로 실력이 향상된다고 말을 해서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퍼졌다.
그 소문을 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5 학년 남자 한 명이 청소 시간에 청소를 안 하고 까불어 내가 마포걸레 자루를 한 번 휘두른 것이 그 남학생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담임선생이 남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깁스를 하고 그날 밤에 엄마와 난 과일 바구니를 사서 그 학생 부모에게 사과를 했다.
학생 집에서는 나를 몰아붙이더니 돌아오는 길에서는 나에게 잘했다고 맞는 것보다는 까부는 놈은 혼내주라고 했다.
금붕어만 사다 주고 종우 목격담은 말하지 마라 했지만 엄마 최 성현 여사는 송 미정 선생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버렸다.
“선생님, 교실에 금붕어 4 마리 사다 놓았습니다.”
“어머, 고맙습니다, 어머님!”
“종우가 금붕어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만 아들 말을 들어보니 담임선생님만 안 계시면 금붕어를 나무젓가락으로 못살게 굴고 낚시를 가져와 낚시를 하는 애도 있다고 합니다.”
“네에?”
“선생님은 그걸 모르셨군요?”
“금시초문입니다.”
“종우가 금붕어가 스트레스로 정신병 금붕어 될까 봐, 그랬다고 하더군요.”
“어머머, 어쩜?”
“종우는 거짓말을 할애가 아니거든요.”
“종우 어머니 고맙습니다.”
엄마가 학교를 다녀간 후 송미정 선생님은 1 학년 2 반 전체를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오늘 종우 어머니가 우리 반에 종우가 죽인 금붕어보다 더 크고 예쁜 금붕어 4 마리를 기증해 주셨다. 이 붕어는 잘 키울 수 있지?”
“예에~~”
“종우가 금붕어를 죽이기 전에 나무젓가락으로 못살게 했던 사람 앞으로 나와?”
“없어?”
“좋아 그럼 금붕어 낚시했던 사람 나와?”
“없어?”
“모두 그 자리에 무릎 꿇고 눈 감고 두 손 엇!”
“지금부터 선생님이 스물을 센다. 그동안 금붕어 건드렸거나 낚시한 사람은 조용히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 책상 앞에 서 있어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열아홉!”
“스물!”
송미정 선생이 스물을 셀 동안 교무실로 간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종우, 네가 말해 봐?”
“선생님, 친구를 밀고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선생님이 하셨는데요?”
“이건 밀고가 아니다. 당당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밀고가 아니고 선생님이 알고 있는 사항을 너에게 확인하는 거야?”
“그래도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너 왜 선생님 말을 무시하는 거야?”
“무시가 아닙니다.”
“너 그럼 왜 말 안 하는데?”
“선생님은 제가 우리 반에서 왕 따를 당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왜 왕 따를 당하는데?”
“금붕어 괴롭히고 낚시 이야기를 선생님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선생님이 몰래 순찰을 돌아서 발견한 것도 아니고 우리 엄마가 선생님께 말해서 알고 있는 거라면 우리 엄마는 또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제가 집에 가서 학교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 것으로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정말 미주알고주알 되는 겁니다.”
“좋다. 입을 안 열고 자수하는 사람도 없으니 모두 운동장에 2 열 종대 집합!”
반 아이들 26 명이 2 열 종대로 섰다. 송미정 선생은 호각을 불었다.
“지금부터 운동장을 구보한다. 삑! 한번 불면 앞으로 달리고 삑! 삑~~ 한번 짧게 한번 길게 불면 돌던 방향에서 반대로 돌아 선생님 있는 곳으로 선착순 달려온다. 삑!”
아이들이 운동장을 반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선생님이 삑! 삐~~~ 익! 하고 불었다. 아이들은 달리던 대형을 무시하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서 선생님을 향해 왔다. 아이들은 다시 2 열 종대로 정열을 했다. 선생님이 삑! 하고 호각을 불자 반 시계 방향으로 구보를 했다.
한참을 돌다가 선생님은 다시 삐~~ 익! 하고 한 번은 길게 한 번은 짤게 불었다. 역시 달리던 방향을 무시하고 운동장 원둘레를 따라 선생님 있는 곳으로 각자도생의 길로 달렸다. 이번에는 순서에 무관하게 종우를 불렀다.
“제갈 종우 이리 나와!”
“너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더 이상 돌 필요 없다.”
학교 뒷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할 때까지 선생님은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구보와 선착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승종이 선생님 제가 다 말할 것이니 더 이상 구보 중지시켜 주세요. 했다.
“누구야?”
“나무젓가락으로 금붕어 못살게 한 애는 정호, 순용이고, 낚시한 사람은 병구입니다.”
“알았다, 이정호, 신순용, 전병구 네 명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가거라.”
송미정 선생은 네 명을 축구골대 좌측에서 오리걸음을 시켜 반대 골대까지 선착순을 시켰다.
보민과 종우는 4 살 차이가 난다. 보통은 2 살 차 형제자매들이 많은데 동생과 내가 4 살 차이가 된 것은 중간에 한 명이 엄마가 임신 중에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출생의 비밀을 밝힌다.
보민의 출생 이야기를 하자면 제갈 상길과 최성현의 결혼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어머니 최성현에 의하면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전에 4명의 여자와 연애를 하다가 결혼에 성공 못하고 헤어져 엄마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그의 첫사랑은 부산에서 대학생이면서 망원을 할 때, 부산 해운대로 사진을 찍으러 온 연영애 고3 여학생을 정물만 찍지 말고 본인 사진도 찍으라고 접근해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 한 장을 아빠에게 보내준 것이 첫 인연이다.
서울 대방역에서 처음 만났고, 샛강을 걸으면서 연애를 했고 첫 키스를 한 곳도 샛강 벚나무 아래였다.
1979 년 7월 16일 서울 대방 전철역 건너편은 청기와 주유소였다. 지금은 주유소가 V. I. P. S라는 음식점으로 바뀌었지만 청기와 주유소는 팔각정자 형태로 지어서 이 지역의 명물이었다. 팔각정 주유소 덕분에 주변의 다방은 ‘팔각정 다방’ 혹은 ‘청기와 다방’이 장사가 잘 되었다.
그는 미리 전철역 개찰구에서 기다렸다. 교복을 벗어던지고 핑크색 바지와 하얀 상의 블라우스에 학생교복 외투였던 검은색의 반코트를 걸치고 영애가 나타났다.
그는 영애의 손목이라도 잡고 싶은데, 오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난감한 순간에 영애가 여의도를 보며 걷자고 했다.
남녀는 손을 손가락을 깍지 끼듯 잡았다. 7월의 샛강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나무들이 녹음을 늘어지게 자랑하고 있었다. 샛강의 버드나무 아래서 그는 영애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더욱 깊게 혀와 혀를 엉키게 했다. 지나가는 새들이 끽- 끽- 울었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봤다. 여섯 시였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첫 만남에 택시를 타고 영등포 여관까지 갔다. 그렇게 만났고 밤을 둘이 한 몸으로 보내고 다음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0월 16일 부산 마산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10월 26일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어 12.12 군사반란, 이듬해 광주에서 5.18로 이어지는 격동에 영애 눈부신 사진을 수첩 속에 간직만 했지 만나지 못했다.
재갈 상길의 두 번째 사랑은 김미숙이다. 부산대학교의 경제학과 2 학년 때 같은 과에 미숙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둘이 서로 첫눈에 불꽃이 튀어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경제학개론 시간에 무역학과 학생이 그 과목을 많이 신청했다. 교재가 국한문 혼용으로 편집되었다. 첫 시간에 정용찬 교수가 출석을 불렀다.
‘김미숙!’ 하고 부르니 4 명이 동시에 ‘예~’하고 대답을 했다.
경제학과에도 김미숙이 2 명 무역학과도 김미숙이 2 명인 것이다. 교수는 법학 개론 시간에 김미숙은 경제학과 키 작은 미숙이 1번 김 미숙 키 큰 학생이 2번 김미숙, 무역학과 키 작은 미숙이 3번 키 큰 미숙이 4번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첫 시간에 4번 김미숙이 옆에 앉았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법학 개론 교재를 이름을 무작위로 부르면 강독을 시켰다.
한자실력이 부족한 학생은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첫 시간이 끝나자 옆의 4번 미숙이가 그에게 법학 개론 책을 주면서 한자음을 달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시간 만날 때까지 연필로 한자에 한글 음을 모두 달아주었다.
한주가 흘러 법학 개론 시간이 되었다. 그는 4번 미숙에게 한자에 음을 달은 법학개론 전해주었다.
“어머나, 이 많은 것을 끝까지 다 달아주셨네요. 고마워요.”
“신입생끼리 다 상부상조하며 공부하는 거지요.”
“저기요, 제가 부탁드리고 미안해서 제가 영수 씨 몸매 대략 짐작으로 짠 조끼거든요, 집에 가서 입어보시고 크면 그냥 입고 작으면 말하세요. 늘이는 것은 쉬우니까.”
“예, 잘 입겠습니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누가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영수가 조끼를 입교 교실에 나타나자 여학생들의 질투 섞인 야유가 쏟아졌다.
“야, 제갈 영구! 4번 미숙이가 짜준 조끼 입으니 하늘로 날아갈 듯 기쁘지?”
“왜 그래? 내가 4번 미숙이랑 어떤 사이도 아니고 그냥 음을 달아달라고 해서 음 달아주고 그것에 고맙다고 준 선물인데 거절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잘났다, 제갈 상길!”
“미숙아, 왜 너까지?”
“됐어, 난 손재주 없어 뜨개질도 못하니 조끼도 못 뜨고, 무역과 4번처럼 키도 안 크고 얼굴도 4번만큼 안 예뻐서 내가 물러나니 4번 미숙과 잘해봐라!”
“야, 그럼 이 조끼 안 입으면 다시 사귀냐?”
“아니, 끝났어!”
두 번째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는 대학 3 학년부터 R. O. T. C 훈련을 받았다. 1 주일에 8 시간의 군사 훈련을 받고 대학 졸업 후 장교로 군대 복무를 하게 되었다.
부산대학교 학군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때 우희진, 사범대학교 과학교육과 여학생과 소개팅을 했다. 정말로 예쁘고 영리한 여자였다. 그런데, 상길에게 R. O. T. C를 ‘바-보-티-씨-’라고 놀렸다. 그는 더 이상 그녀와 사귀는 것을 중단했다. 셋째 여자도 어정쩡하게 떠났다. 헤어진 것은 헤어진 것이지만 그녀가 과학교육과라는 것에 착안하여 우 희진을 주인공으로 <대홍수>라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폐간된 국제일보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네 번째 여자는 계양산 아래 김포농협의 창구 직원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나의 할아버지인 ‘제갈 선호’ 옹은 농협에 돈을 맡기거나 찾을 때면 창구 직원 장영희 양에게 우리 며느리 우리 며느리 했다. 더구나 증조할아버지인 제갈 재석 옹과 장영희의 아버지 장근식 옹은 어린 시절 서당의 동문이었고, 장기 노인정의 장기의 쌍벽이었다. 증조부와 장근식 옹은 장기로 내기를 걸어 노인정 그날 나온 노인이 20 명이면 20 명분의 짜장면 내기를 걸었다. 항상 승패는 반복되었고, 노인정 노인들은 누가 이기더라도 짜장면 공짜로 먹는 즐거움으로 두 사람의 대국을 즐겼다.
제갈 상길 중위가 전방 철원 모 부대에서 근무하던 198X 년 9월 부대에 관보가 도착했다.
‘조부 위독 급래요망(祖父危毒 急來要望)’
제갈 중위는 휴가증을 받아 들고 급한 마음으로 김포 장기리로 달려갔다. 김포 장기리 정류장에 도착하니 위독하다고 하시던 할아버지 제갈 재석 노인이 정류장에 나와 계셨다.
“아니, 할아버지 위독하다고 관보가 와서 이렇게 휴가 나왔는데, 할아버지 정류장에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위독하지만 손자가 온다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거다! 이놈아 왜?”
“어디가 아프신데요?”
“온몸이 다 아프다. 특히 내 맘이 맘이 아니다!”
“왜요?”
“왜 긴, 내가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거 아는데 우리 손자가 손 며느리 인사도 안 시키니 내가 맘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냐, 그래서 내일 나랑 김포 시내에 좀 다녀오자?”
“김포는 왜요?”
“가면 안다.”
재갈재석 옹과 제갈 중위는 김포 터미널 근처의 <초우>라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약속시간이 되자 장근식 옹과 손녀 장영희 양이 들어왔다. 제갈 재석 노인과 장군식 노인은 서로 자신의 손자 손녀에게 상대방을 인사시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갈 상길 중위입니다.”
“반갑습니다. 장영희입니다. 강 중위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제가 중학교 정암 중학교 강 경희와 동창이라서 경희에게 오빠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다방 마담에게 주문을 했다. 장 근식 노인은 쌍화차를 강 재석 노인은 칡차를 장 영희와 상길은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한 차를 마시고 노인들은 젊은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 노인들은 김포 경로회관 가서 바둑 두면서 시간 보낼 테니 둘이 재미있게 시간 보내고 부곡 들어가는 막차 시간에 터미널서 만나자?”
“예, 알겠습니다.”
노인들이 자리를 비우자 영희는 본격적인 대화를 진행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농협에서 우리 며느리라고 세뇌교육을 시켜서 그런지 영희는 상길과 이변이 없으면 결혼할 작정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상길 씨는 언제쯤 결혼하실 생각인가요?”
“예, 중위는 봉급이 적어서 대위 진급이나 하고 결혼할 생각입니다.”
“지금 중위신데, 대위는 언제 진급되나요?”
“진급 탈락 안 되면 2년 후 3월 1일에 대위 진급합니다.”
“평소 어떤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이상형으로 생각한 여인상은 있으세요?”
“뭐,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 요즘 그런 여자 구하기 힘들겠지만.......”
“어머나! 요즘 신사임당 같은 여자가 어디 있어요?”
“신사임당 없으면 헌사임당이라도?”
“어머나, 상길 씨 유머 감가도 좋으시네요. 유머 있는 남자를 좋아요. 헤헤.”
둘이는 장기 다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김포극장에서 영화를 한편 보았다. 영화를 보고 터미널 근처의 ‘숲 속의 언덕’이라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막차 시간에 맞게 터미널로 나왔다.
영화를 볼 때까지는 몰랐는데,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영희의 치아 상태를 보게 되었다. 앞 이빨 두 개가 반쯤 깨어진 것을 교묘하게 치과에서 인공 치아로 이어 붙인 것을 발견했다. 초면에 여자에게 치아에 대한 질문하는 것이 실례로 생각되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모두 다 맡 며느리 감으로 좋다고 하는 이 여자에 대한 거절의 명분 하나를 발견한 것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영희의 이빨 깨진 것을 발견하고는 더욱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영희 씨 물고기 I. Q 가 얼마인지 아세요?”
“에이 물고기가 아이큐가 어디 있어요?”
“왜요? 돌고래는 70 정도의 I. Q라고 하는데, 물고기는 얼마나 될까?”
“한 10 정도?”
“물고기 I. Q 가 10 이면 전 세계 어부들과 참치회사 알거지 됩니다.”
“왜요?”
“음, 물고기 아이큐가 1 이거든요. 1 이 뭐야 하면 직진입니다. 10이 후진인데 소도 뒷걸음질 치거든요. 그런데, 물고기도 닭도 후진을 못해요. 그래서 머리가 나쁜 사람보고 닭대가리라고 하는데. 닭 보다 더 머리 나쁜 것이 물고기입니다. 물고기 아이큐가 10 만 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후진으로 다 도망가요. 도망 못 가고 유선형 몸을 계속 앞으로 전진만 하다 보니 그물망에 몸이 꽉 끼어 꼼짝 못 하게 되는 겁니다.”
“하-하-하”
장기리로 가는 막차를 타고 두 노인과 손자 손녀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김포시내에서 장기리로 돌아왔다.
제갈 상길 중위는 허가된 5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는 영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부대서 좀 생각해 보고 편지로 알리겠다고 했다.
영희는 ‘제갈 선호’나 ‘제갈 재석’ 옹이 농협 들를 때마다 우리 며느리, 우리 손자며느리 하다 보니 그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 있었는데, 김포에서의 하루 데이트 동안 물고기 아이큐가 1이라는 농담이 머리에 새겨져 늘 싱글벙글 지내고 있었다.
농협의 다른 직원이 ‘장 양! 뭐 좋은 일 있어 항상 웃음이야?’ 하면, ‘그럼요, 인상 쓰는 것보다 즐겁게 지내는 것이 좋지요.’라고 응수했다.
장 영희의 어머니는 영희가 제갈 상길에게 하루 데이트 한 이후 싱글벙글 지내는 것을 보고 상길 어머니만 만나면 결혼시키자고 졸라 댔다. 그때마다 상길 어머니 전선옥 여사는 아들 마음이 영희와 결혼한다고 선포를 안 하는데 어떻게 결혼 진행을 하냐고 좀 기다려 보자고 했다. 열흘쯤 지나서 제갈 상길 중위는 고향의 부모님께 편지 한 통을 썼다.
부모님 전 상서
지난번 관보 덕분에 휴가 참으로 잘 다녀왔습니다. 다시는 그런 관보로 저를 놀라게 하시면 정말로 조부 위독할 때 관보가 와도 부대서 휴가 안 내보낼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 본 장 양은 참으로 가정교육이 잘 된 처자였습니다. 곱게 자랐고, 기품 있었는데, 옆에서 보니 앞이 두 개가 제 이가 아니더군요.
초면에 여자에게 치아가 왜 깨져 본인가 아니냐고 물어볼 수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만 제가 영희 양과 결혼하기에는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영희 어머니에게 그냥 우리 아들이 아직 중위라서 봉급이 작아 결혼할 마음이 없고 대위나 되어서 결혼할 것이라고, 영희 양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배필 만나 결혼하기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여기 건봉산 아래 군부대서 성실히 근무하고 2 년 후 대위 진급하면 맞선을 보던 연애를 하던 결혼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198X. 11. 17.
아들 올림.
제갈 중위는 198X 년 9 월 1일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을 했다. 10월 2 일 대위 필수 보직인 고등군사 학교에 입교했다. 광주 전투병과 학교 내의 보병학부 고등군사반 제310 기로 입교했다. 수료식은 199X 년 1 월 13 일 토요일이다. 수료식 1 주일 전인 1 월 8 일 22 사단 강원도 고성군에 하숙집 짐을 옮기기 위해 담임 교관 이 대원 소령에게 결석계를 제출하고 방을 구하러 떠났다.
광주서 서울역까지 기차로 서울역에서 상봉동 터미널까지 새벽에 택시로 갔다. 상봉터미널 새벽을 전방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택시에서 내리니 뒤에 따라온 택시에서 중년의 부부가 내리는데 짐이 5개나 되었다. 2개는 아저씨가 2개는 아주머니가 들고 하나가 남았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순간에 강 영수 대위가 짐 보따리 하나를 번쩍 들었다.
"제가 들어다 드리지요."
"아니, 대위 양반이 어떻게 이런 짐 보따리를 다 드시나?"
"예, 장교는 양손에 물건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하급자가 인사하면 인사 잘 받고 상급자에게 경례 잘하라고 양손에 물건을 들지 않습니다만 여기 새벽에 저 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저 보다 낮은 사람도 없으니 짐 들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짐을 들어주고 서로 가야 할 곳의 차표를 사고 나니 시간이 5시 10 분이었다. 제갈 대위는 강원도 간성 행 5시 40분, 아저씨 아주머니는 화천행 5 시 45 분 차였다.
차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제갈 대위 차나 한잔 하자고 했다. 터미널 다방에서 커필, G 앞에 두고 대화를 했다.
"제갈 대위 초면에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전영수의 아비 전찬용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내 내자 신 난숙이오.”
“전 제갈 상길 대위입니다. 광주서 교육 마치고 다음 주면 XX사단으로 배속되는데, 제가 짐이 많아서 사전에 방을 구하러 간성에 가는 길입니다.”
“그러시군요. 아들 영수가 화천 27 사단 신병교육대 수료라서 가는 길입니다.”
“제갈 대위 결혼했소?”
“아니요. 아직.”
“아니, 대위면 나이도 꽤 있을 텐데, 사귀는 여자는 있소?”
“없습니다. 대학 때 사귀던 여자는 모두 연애 상대로는 98점인데 결혼상대로는 58점이라고 떠나고, 맞선은 군인이라 정말 시간 내기 힘들어 맞선 약속만 하면 돌발 상황이 발행해 못 했습니다.”
“그럼, 내가 나중에 기회 되면 중매 서게 자리가 잡히면 연락 바라오. 내 전화는 010-8356-73**입니다.”
“예, 어르신 감사합니다. 중요한 훈련 끝나고 한가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메모를 주고받은 후에 시간이 되자 각자 간성, 화천 버스를 탔다.
199X 년 1월 13일 광주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제 3XX 기를 수료하고 XX사단 56 연대 9 중대장이 되었다. 1월 17일 중대장 취임식을 했다.
다음 날 18일에 강원도 고성 간성 일대에 눈이 150 cm가 내렸다. 간성읍 대대리에 위치한 7396 부대의 연병장에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부대는 완전 ‘설국(雪國)’이 되었다. 부대일지에는 기본적인 일보상황을 적고 교육훈련 적는 란에는 <제설작업> 네 글자만 큼직하게 썼다. 제설작업을 일주일 내내 하고서야 대대가 탄약고와 고가초소 병사식당 가는 곳의 길이 열렸다. 부식 차량운행이 중단된 동안은 긴급 식량으로 비축한 전투식량과 염장 미역과 멸치 김장 김치로 연명했다. 제설작업이 끝나자마자 연대 전투단 훈련, 사단기동훈련, 대대 전술훈련, 중대 전술훈련을 하고 나니 4월 1일이 되었다. 4월 1일 만우절이라 거짓말로 세상 사람들이 즐겁게 보내는 날 문득 상봉터미널에서 보따리를 들어주고 연락처 주고받은 일이 떠올랐다. 수첩을 뒤져 연락처를 찾았다. 02-832-73** 전화를 걸었다.
“예, 개봉동입니다.”
“안녕하세요? 상봉동서 인사드린 제갈 대윕니다!”
“아, 제갈 상길 대위 반갑소! 왜 이제야 전화하는 거요?”
“1월 17일 취임 다음 날 폭설이 내려 제설작업하고 부대 큰 훈련, 작은 훈련, 검열을 받다 보니 이제야 연락드립니다. 어르신 중매 약속 지키셔야지요?”
“그럼요, 내일 우리가 신길동에서 친목계 하는 날인데, 그날 계원 중에 딸 가진 부모에게 물어서 군인을 사위로 할 의향이 있는 집 처자를 소개할 걸세.”
“예, 감사합니다!”
신길 5동 새마을금고 뒷골목의 최재석 씨 집에서 친목계가 열렸다. 최재석 씨의 부인 박춘자 여사가 공개적으로 사윗감 구한다고 말을 했다.
“누구 젊은 남자 직장 반듯하고 성격 좋은 남자 있으면 우리 성현이 저년 시집 좀 보내게 중매 바랍니다.”
전영수의 엄마 신난숙 여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군인 대위 한 명 알고 있는데, 군인도 되나요?”
“그럼요. 군인이면 어떻고 경찰이면 어때요? 남자 성실하고 착하면 되지요. 내가 우리 저 양반에게 하도 눌려 지내서 우리 성현이 짝은 착한 남자 맺어주고 싶어요.”
“그럼 내가 제갈 상길 대위 한번 연락해 볼게.”
“영수 엄마는 그 대위를 어떻게 알았어?”
“참 기막힌 인연이지. 우리 아들이 겨울에 군대 갔지 뭐야. 신병교육대 수료하는 날 먹을 거 잔뜩 준비해서 택시를 타고 상봉동 터미널에 내렸는데, 짐이 5 개인 거야. 내가 두 개 들고 두 개 영수 아버지가 들고 그래도 하나 남아 난감했는데, 웬 대위가 오더니 짐을 번쩍 들어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인데?”
“그럼, 그래서 저 양반이 아니 대위가 어떻게 이런 물건을 들어주시냐고 했더니, 장교가 양손에 물건을 들지 않는 것은 하급자가 인사하면 인사 잘 받아 주고 높은 사람 나타나면 인사 잘하라고 양손에 물건을 안 드는 것인데, 이 새벽에는 인사할 사람도 인사받을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들어준 거 있지. 요즘 그런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대위 정말 진국이네?”
“생판 모르는데 손이 모자라는 것 보고 바로 짐을 들어주는 것 보면 정말 반듯하게 큰 사람 같더군.”
“영수 엄마, 영수 아버지 그 대위 꼭 한번 만나게 해 줘요?”
“알았어. 친목계 마치면 전화해 보고 연락드리지요.”
“고마워, 영수 엄마!”
전영수 이병의 아버지 전용찬 씨와 그 부인 신난숙의 중매로 제갈 상길 대위는 최성현과 결혼했다. 199X 년 4월 5일 식목일이 들어있는 주 일요일에 처음으로 간성 우체국 앞 우체통 옆에서 만났다. 나의 외할아버지 최재석이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 외할머니 박춘자 여사가 타고 뒷자리에 최 성현 그리고 간성 우체국 앞에서 픽업한 제갈 대위가 뒷자리에 탔다. 차는 간성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속초로 내려갔다. 속초에서 명파 식당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최재석과 박춘자는 꼼꼼하게 물었다.
“고향은 어디입니까?”
“김포입니다.”
“부모형제는요?”
“예, 할머니는 제가 소위 되기 직전인 85년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금년 90 세시고, 아버지 72 세, 어머니 68 세입니다.”
“형제는?”
“3남 2 녀의 제가 장남인데, 여동생 둘 결혼해서 한 명은 부산에 한 명은 울산에 살고 있고, 가운데 동생 영대는 결혼해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근처에 살고, 막내 영주만 미혼으로 김포서 부모님과 농사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자들 만났는데 왜 아직 결혼 못했나요?”
“예, 대학시절 연애하던 여자들은 제가 연애 상대는 98 점인데, 결혼 상대로는 58점이라고 떠났고 군인으로 중매하려니 이거 5공 청문회로 군인들 인기가 떨어져 중매가 안 들어와 아직 결혼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위 월급이 얼마나 되나요?”
“예, 그건 2 급 군사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고, 국가공무원 9급은 군대의 하사와 비슷하고 상사는 6 급, 대위는 6 급과 5 급 사이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 딸 성현이 제갈 대위와 결혼하면 먹고사는 것에 걱정은 없겠지요?”
“예, 걱정 마세요. 결혼해서 아내 생기면 배우자 수당 나오고요, 아기 태어나면 아이도 출생 신고와 동시에 가족이 늘어 가족수당이 나옵니다. 그러니 먹고사는 걱정은 마세요. 전국 어디를 가도 군인 아파트나 군인 관사가 이미 다 건축되어 집 걱정도 할 필요 없어요. 재산으로 내 집은 아니지만 거주 공간으로 집은 전국 어디 근무해도 다 있습니다.”
“그렇군요.”
고바우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최재석 내외는 강 영수 대위와 최성현에게 속초 중앙시장의 정신당 금은방에 가서 금 3 돈의 실반지 2 개를 만들었다. 성현과 영수 둘이 각자의 손에 반지를 꼈다. 차를 몰아 속초에서 간성우체국 앞에 강 영수 대위를 내려주고 세 사람은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갔다.
간성 금수리 3반 이선훈 씨 댁에 제갈 대위 문간방에 오니 난리가 났다. 이선훈 씨와 부인 김선애가 제갈 대위에게 물었다.
“아가씨 만나 본 소감이 어때요?”
“착한 거 같았어요.”
“이 반지는 뭐예요?”
“속초 고바우 식당서 식사를 마치고 어른들이 중앙시장 정신당 금은방에 데려가더니 금반지 3 돈으로 저하고 아가씨에게 해주셨어요.”
“아니, 아가씨 잘 살펴보지도 않고 반지를 덥석 받으면 어떻게 해요? 정말 강 대위 아저씨 몰라도 너무 모르네?”
“왜 잘못했나요?”
“아니 뭐 꼭 잘못은 아니겠지만 웬 지.”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제갈 대위 위해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여자가 오죽 급하면 부모가 딸을 차에 태워 산골에 와서 사윗감을 찾겠어요? 혹시 아가씨가 무슨 흠결이 있거나 아니면 이미 결혼했다 실패한 경우인지 주민등록 초본으로 확인해 봐야지요?”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반지를 받았어도, 양가 부모님 인사 전이니 우리가 한 번 점검하게 다음 주 아가씨와 부모님이 간성에 오면 여관서 자지 말고 우리 집 방에 재워드린다고 저녁도 우리가 집에서 대접한다고 모시고 와요. 하룻밤만 묵으면서 대화하면 다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금수리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금수리 아주머니 말을 들으니 제갈 상길 대위는 반지를 너무 성급하게 받은 거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금수리 이선훈 씨 댁으로 서울서 내려온 최재석, 박춘자, 최성현을 데리고 강 대위는 주인집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시켰다.
“제가 신세를 지고 있는 주인아저씨 아주머니입니다. 아저씨는 고성군청 산림과 공무원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최재석입니다. 여기는 내자이고 이쪽은 딸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 성 훈입니다. 군인 강 대위가 아가씨를 만난다고 해서 집주인으로 한번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엌에서는 주인아주머니, 박춘자 여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거실에서는 최재석 이선훈 두 분이 바둑을 두 면서 맥주를 마시고, 최성현은 양쪽을 오가며 상차림을 하였다.
제갈 대위는 면세 소주, 면세 맥주를 한 박스 씩 들고 왔다.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 커다란 원형 둘레 상에 앉았다.
“아가씨 이름이 최성현이오?”
“예”
“꼭 이름이 남자 이름처럼 지었어요?”
“첫애고 병원에서 의사가 아들이라고 해서 이름을 미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지어주셨어요. 때어난 것을 보니 여자라서 이름을 여자아이답게 다시 지으려고 하니 애 할아버지가 그냥 출생 신고 하라고 해서 성현으로 했어요.”
“주인댁은 자식들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아들만 둘인데, 큰 아들은 강원대학교 과학교육과 2학년 마치고 군대를 가서 신남 화학부대에 있어요. 작은 아들은 고3으로 속초고등학교 다니고.”
“고3 이면 한참 고생이네요?
“지 공부 지가 알아서 하고 우리는 하숙비만 잘 보내주면 됩니다. 하하.”
“성현 양 밑으론 아들입니까?”
“웬 걸요, 딸만 내리 셋을 낳았어요. 성현이 아래 성옥, 성순까지 딸을 낳으니 강릉 최 씨 대가 끊어진다고 여자를 소실을 얻겠다는 것을 제가 말리고 애를 낳았는데 아들이라 얼마나 내가 아들 낳고 울었는지 몰라요.”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막내도 아들이라 2 남 3 녀가 위로 셋이 딸 아래로 아들 둘입니다.”
“제갈 대위는 3 남 2 녀라고 하던데요?”
“예, 부대서 휴가 얻으면 김포 제갈 대위 부모님께 인사도 갈 예정입니다.”
“아니 정말 인연도 이런 인연 없을 겁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 물건이 손이 부족하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쓰는 세상에 물건을 들어준 인연으로 우리가 친목계 회원이라 소개받았는데, 정말 삼신할머니가 맺어준 인연 아니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강 대위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해 봐라 여자가 서울에도 남자가 많은데 뭣 하러 이 강원도 촌구석에서 사윗감 찾겠냐고? 여자가 흠결 있는 여자 아니냐고 의심해 보라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만나 보니 천생연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금수리 주인댁 부부와 최재석 부부는 밤늦게 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포도와 옥수수를 먹었다. 잠은 주인댁에서 어른들은 주무시고 자연스럽게 제갈 영구 대위와 최성현은 그의 방으로 왔다. 말로는 결혼식 전에는 성관계 안 한다고 했지만 둘만이 금수리 작은 방에 들어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구와 성현은 포옹을 했다. 방에 이불을 폈다. 불을 껐다. 불을 끈 상태에서 둘은 옷을 벗었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눕혔다. 심장 뛰는 소리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몸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불을 껐어도 얼굴의 이목구비가 구분이 되었다. 두 손으로 뒷목을 감싸고 입술과 입술을 맞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암묵의 신호였다.
그는 여자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었다. 이미 아래가 축축해 있었다. 손가락을 넣자 허벅지가 파르르 덜렸다. 손가락을 조금 깊이 넣었다. 신음 소리를 참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것을 여자의 애액이 매끄러운 곳에 넣었다. 매끄럽고 시원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이 일었다. 그녀 다리가 남자의 하반신을 휘어 감았다. 그는 더 깊숙하게 자신의 것을 넣었다. 한참 동안 구름 위의 떠다니는 듯 착각 속에 시간이 흘렀다. 밤이 왜 그리 짧은지 아침 해가 떴다. 어른들이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남녀를 깨웠다.
“성현이 일어났니?”
“예. 잠시 후 건너갈게요.”
둘은 옷을 서둘러 입고 주인댁으로 갔다.
“잘 주무셨어요?”
“주인댁에서 아주 좋은 잠자리 마련해 주셔서 잘 잤지. 성현이도 잘 잤어?”
“녜, 방이 조용하고 좋았어요.”
“새벽에 피아노 소리에 깼어요.”
“우리 뒷집 간성고등학교 영어 담당 장미영 선생님인데, 아마 성현 양이 여기 강 대위하고 결혼할 거라는 소문 돌고 돌면 피아노 소리도 끊어질 것입니다.”
“왜요?”
“왜긴 피아노 소리 듣고 제갈 대위 자기 좀 프러포즈해 달라는 뜻인데 이미 성현 양이 찜했으니. 하하”
제갈 상길 대위 부모님과 최성현 부모님 사이에 199X 년 10월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약속을 했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199X 년 10월 동해안 XX사단 제갈 대위가 근무하는 56 연대 3대대 9중대는 대대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1 대대가 철책선 경계 근무를 마치고 10월 초에 철수하기로 되어있었다. 탑동 2대대가 철책 경계 근무를 투입해야 하는데 2 대대장 장근호 중령이 임기가 10월 중순이 끝이 났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사단장 곽승종 소장은 철책선 경계근무 순서를 2 대대가 아닌 3 대대가 먼저 근무하고 다음 해 4 월 철수하면 2대대를 투입한다고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대위는 이 사실을 김포 제갈 선호에게 알렸다. 서울의 최성현에게도 알렸다. 전화로 알리고 성현에게는 편지도 썼다.
사랑하는 성현에게
지난 주말에 만났는데, 편지를 쓰려고 볼펜을 잡으니 더 보고 싶다.
양가 어른들에게 인가를 하고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는데 오늘 속상할 소식을 전한다.
철책선 경계 근무는 1.2.3 대대 순으로 돌아가는데, 2 대대장이 임기가 거의 끝나 10 월 중순에 이·취임식을 해야 한다고 이번 철책근무를 2 대대가 아닌 우리 3 대대가 들어가고 내년 4월 철수하면 2대대가 들어가라고 사단장의 명령이 하달되었어. 그래서 우리 결혼식은 10월에 할 수 없고 내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해야겠다고 김포 부모님과 신길동 어른들에게 전화를 하였어.
너무 마음 많이 상하지 않기를~~ 안녕!
199X. 9. 23.
간성에서 상길 씀
보고 싶은 상길 씨
오늘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엄마 아빠 친목계원 중에서 딸을 군인에게 시집보내려는 사람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고 말한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왜 그런지 이해가 가네요.
어느 하나 개인의 의지로 하는 것 없이 부대일이 우선이니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러나 이미 상길 씨의 아내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철책선 경계 근무 잘하고 내년 철수해서 결혼해요.
이 편지가 당도할 때면 이미 영수 씨는 철책에 올라가 있겠지요?
저는 내년 4월 만나는 날을 기다리며 신부수업이나 잘하겠어요.
사랑하는 상길 씨!
다치지 말고, 아프지도 말고 철책 근무 마치고
몸 건강하게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히~~
199X. 9. 29.
사랑하는 성현 씀
제갈 대위가 근무하는 3대대는 199X 년 10월 2 일 오후에 부대 이동을 하여 10월 3일 밤 12시에 부대 교대를 마쳤다. 중대는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를 기준으로 내륙으로 1km 해안선 따라 남으로 11.4 km를 경계 담당을 했다.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야간 경계를 철수하고 실탄을 반납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전 취침에 들어선 시간에 상황 보고가 들어왔다. 상황 근무병이 중대장을 불렀다.
“중대장님?”
“왜?”
“명파 초소장인데 중대장님 바꾸라고 합니다.”
“중대장이다. 말해라!”
“명파 소초장 최 중위입니다. 민간 어선 한 척이 명파 어통소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북상 중입니다.”
“신호탄 쏘았어?”
“예, 신호탄 올리고, 호각 불고 제가 할 수 있는 행동 다 했는데, 계속 북상합니다.”
“어디쯤 왔니?”
“어로 한계선 넘고 2소대 구역 다가갑니다.”
“알았다. 소대장 전부 연결해라!”
“중대장님, 소대장 전부 연결했습니다.”
“전체 소대장 들어라. 이거 실제 상황이다. 명파 최 중위 보고인데 어선 한 척이 북상 중이다. 월북하면 우리 모두 끝이다. 병사들 주간 취침자 모두 깨워 주간 초소 사이 점령하고 소각, 실탄, 신호탄 모두 사용해 어선 월북 막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1 소대장입니다.”
“뭐야?”
“어차피 거리가 멀어 소총 사거리 벗어나니 106 미리 승인해 주십시오?”
“알았다. 106 미리 사격 준비 시켜. 나도 그리 간다.”
“예,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어선은 계속 북상했다. 바다에 하얀 부표를 설치해서 어로한계선을 표시했으나 배는 무시하고 북상을 했다. 9 중대장 강 대위는 겁이 났다. 정말 월북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대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충성! 9 중대장입니다. 어선 한 척이 명파 초소부터 관측했는데 경고도 무시하고 계속 북상합니다.”
“월북기도 아니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 배 위치?”
“명파 초소 통과 3소대구역 통과 2소대 넘기 전입니다.”
“그걸 왜 이제 보고해?”
“일단 106 미리 준비부터 시키고 보고 드리는 겁니다.”
“알았다. 나도 통일전망대 106 미리로 갈 테니 부대대장님도 그리 오시게 해?”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제갈 대위는 부대대장 조규정 소령에게 전화를 했다. 당번병이 받았다.
“통신보안 부대대장실 일병 이흔정입니다.”
“9 중대장인데 부대대장님 바꿔라.”
“취침 중이십니다.”
“취미 중 알거든 깨워 9 중대장 긴급사항이라고 받으시게 해?”
“알겠습니다!”
“9 중대장 뭐야? 부대대장 취침을 깨울 긴급이야?”
“충성! 배 한 척이 명파부터 계속 북상해서 북방한계선 넘기 직전입니다.”
“야, 그걸 왜 인제 보고해 미리 해야지?”
“106 미리 준비시키고 대대장님께 보고하고 그러다 보니.”
“하여튼 106 미리 준비하고 내가 그리로 갈 테니 거기서 보자?”
“알겠습니다. 충성!”
106 미리 분대장 정율화 하사는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제갈 대위의 사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중대장님, 106 미리 준비 완료했습니다!”
“배를 명중하지 말고 배 후미를 겨냥해서 배를 기수를 돌리도록 할 수 있나?”
“명중 보다 그게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 하사에게 시키는 거다. 최우수 106미리 부대가 그 정도는 해야지?”
“예, 해보겠습니다. 사격제원 수정. 현재 방위각 거리에서 줄이기 10 한다.”
“줄이기 열!”
“줄이기 열!”
“발사!”
“발사!”
쾅! 쾅! 두 발의 106 미리가 발사되자 배 앞에 하얀 물기둥 두 개가 솟았다. 배는 천천히 기수를 돌려서 남으로 향했다. 배가 천천히 남하를 했다.
106 미리 사격으로 고가초소의 비닐막이 터져나갔다. 통일전망대 유리창도 몇 장 파손되었다. 배는 명파 어민통제소에 도착했다. 어민 통제소에는 이미 사단 기무부대장, 사단 정보참모, 기무부대 전방담당관, 해양경찰 정보과장, 거진 경찰서 정보과장, 국가안전기획부 속초 파견관 등이 집결했다. 명파 어촌계장 방 상훈 씨도 나왔다. 명파소초장 최기철 중위가 경계 책임 소대장으로 어선과 어민을 체포하여 사단 헌병에게 이첩했다. 사단 헌병의 호송차량에 태워진 어민은 거진 경찰서 명파 지서에서 최초 합동 신문을 받았다.
<최초 합동신문조서>
- 성 명 : 전 창호(54 세, 남)
- 주민번호 : 351214-1056***
- 주 소 : 강원도 고성군 현도면 명파리 27
- 직 업 : 농업/어업
< 월경 경위>
상기 명 전창호는 199X.10.8. 자신의 고기잡이배가 문제가 발생하여 거진 항 근처의 거진 공업사에 수리 의뢰 하였으나 특수용접이 불가하여 속초로 가서 특수용접을 하고 복귀하던 중에 배 안에서 소주 2 병을 음주한 결과 명파 어통소로 귀항할 것을 졸음으로 인해 북반한계선까지 올라가서 경계 중인 군인의 106 미리 사격을 받고 귀환하였음.
<대공 용의점>
본인의 진술과 명파리의 가족 및 이웃 사람들의 증언을 청취한 결과 가정불화도 없고 과도한 부채도 없어 월북을 기도할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음. 대공 용의점 없음으로 판단함.
<조사자>
- XX사단 정보참모 중령 조성복
- 기무부대 파견반장 중사 한 월현
- 해양경찰청 속초파견대 경위 조필원
- 거진 경찰서 정보과장 경위 김명춘
- 국가안전기획부 속초파견관 4급 양성철
이 사건으로 초초 발견자 최기철 중위와 통신병 이흔정 일병이 사단장 표창을 받았다. 합동신문조가 떠나자 사단 감찰부가 주가 되어 5부 합동조사가 내려왔다. 최초 발견 지점부터 마지막 106 미리 발사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전부 조사했다. 소모한 실탄과 회수된 탄피를 사실대로 보고했다. 사단 군수처에서는 소모한 실탄과 예광탄 공포탄 신호탄을 전량 보충해 주었다.
모든 조사를 마치고 강 대위는 서울의 약혼녀에게 전화를 했다. 통일 전망대 주차장의 공중전화박스에서 동전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동전의 잔액이 0이 되었다. 107을 눌렀다. 안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렸다.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거시겠습니까?”
“예.”
“수신 번호를 불러주세요.”
“서울 832-52**입니다.”
“전하하시는 분 성함은?”
“제갈 상길입니다.”
“통화 원하시는 분 성함은?”
“최성현입니다.”
“예, 잠시 기다리세요. 곧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동전을 넣고 하는 통화는 전화요금 동전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통화하기에 전화요금 아까워 짧게 한다. 하지만 107 전화는 전화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는 다음 달에 요금 청구서를 봐야 알 수 있다. 제갈 상길과 최성현은 107 전화로 마음껏 통화했다.
“상길 씨, 보고 싶어요!”
“나도 무지 보고 싶다.”
“외박 나온 다며 언제 나와요?”
“음, 12월이나 1 월 중에.......”
“정말 군인은 남편 직업으로 좋은 것이 아니네, 내 남편인데 맘대로 볼 수도 없고 절반은 국가 몸이네요?”
“보고 싶어도 참아?”
“참기야 참지만 정말 힘이 드네요.”
“전화요금 많이 나오겠다. 이만 안녕!”
“아이 참, 뭐가 그리 급해요. 사랑해 영구 씨!”
“사랑해 성현!”
철책선 경계 근무 중에 결혼한 중대장은 월 1 회 3 박 4 일의 휴가가 독신인 중대장은 6 개월에 절반 정도 지나는 3 개월 차에 3박 4일 1회의 휴가가 주어졌다. 중대장들의 휴가 때는 대대 지원 장교가 중대장 대리 근무를 했다.
199X 년 12월 2일 통일전망대에 대형 크리스마스 추리에 점등식이 거행되었다. 00 사단장과 군종참모 목사와 신부, 법사가 참석했다. 사단 주요 간부들과 통일전망대를 지키는 병사들과 군인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점등식이 거행되었다. 대형 십자가의 불빛은 북한 군 초소에서도 보이는 지 북한 병사도 남쪽의 점등 불빛을 관측하고 있었다.
199X 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도 라디오와 TV 중계를 통해 전방에서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9X 년 새해가 밝았다. 기다리던 외박이 시행되었다. 지원 장교 최진석 대위가 9 중대장 대리 근무를 하러 대대 본부에서 9 중대로 왔다. 최 대위에게 중대 일반 현황을 설명해 주고 제갈 대위는 전방에서 나와 서울로 가기 위해 대대리 버스 정류정서 내렸다. 그때 헌병 소대장이 다가왔다.
“충성! 잠시 검문을 하겠습니다.”
“9 중대장 제갈 대위다. 외박 나가는 중이다. 여기 휴가증 있다!”
“죄송합니다. 9 중대장님! 걸프 전쟁이 발발하여 전군에 경계 강화 지시가 내려졌다고 9 중대장님 부대로 원대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뭐야?”
“실제 상황입니다.”
“아니 걸프전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라고?”
“하여튼 건너 반대 방향 버스 바로 타고 복귀하십시오.”
“알았다. 외박 못 나간다고 연락이나 하게 일반전화 한 통 화만 하자?”
“예, 전화번호 말씀하세요?”
“서울 832-52**이다.”
“교환 서울 일반전화 전화요금은 9 중대장 제갈 상길 대위 앞으로 달고 02에 832-52** 연결해라.”
“예, 서울 일반전화 연결하겠습니다.”
“서울 나왔습니다. 통화하십시오.”
“성현아! 외박 나가다가 걸프전 발발로 다시 돌아간다. 미안해!”
“뭐야? 걸프전과 한국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외박 나오는 장교를 원대복귀야?”
“미안해, 걸프전 종료되면 그때 다시 나갈게. 안녕!”
“난 몰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현은 소리 죽여 울었다.
“엄마, 나 군인하고 결혼 안 할래. 남편이 내 남편이야? 국가 남편이지?”
“야, 그런 소리 말거라. 외박 나오다 되돌아가는 강 서방 심정은 오죽하겠니?”
“하여튼 내가 미쳐!”
“그래서 친목계원 중에 군인을 사위 삼는다면 도시락 싸들고 가서 말린다는 소리를 성임 엄마가 했나 봐 이제 이해가 되네?”
“성림 아빠가 군인이셨어?”
“그래, 육사 말고 무슨 사관학교냐?”
“3 사?”
“그래 3 사 나와서 진급도 힘들게 하고 결국은 중령으로 전역해서 대림 사거리서 중국집하고 있다.”
“그래서 성림 엄마가 나보고 군인 아내 힘들어하셨네?”
“그렇지?”
기분이 좋다가 순식간에 망가진 성현은 여동생 성옥에게 화를 냈다.
“성옥이, 이거 제자리에 안 둘래?”
“언니는 괜히 형부 외박 나오다 되돌아가니까 우리에게 화풀이야?”
“야, 내가 뭔 화풀이야, 네가 물건 쓰고 똑바로 안 하니까 매번 내가 치우지?”
“언니가 뭐야? 언니가 좀 동생 거 치워주면 안 되나?”
“이게 언니에게 꼬박꼬박 말대구야?”
“알았다. 그만해!”
매일 뉴스에서 걸프전 소식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걸프전은 전쟁이 아니라 전자오락실에서 게임하듯이 전쟁을 현지에서 생중계를 했다. 전 세계가 걸프전의 전쟁을 한 편의 만화영화 보듯 했다. 실제로 야간에도 적외선 투시기로 야간의 움직이는 전차에 정확히 미군의 항공기에서 쏘는 포탄이 이라크 전차에 명중을 했다. 전쟁은 55일 만에 종결되었다. 미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날이 2월 15일이다. 현지 시간 2 월 15 일은 우리의 2월 16일이었다.
이날은 북한의 김정일의 생일이었다. 걸프전의 종식과 더불어 전군에 내려진 경계강화도 해제되었다. 중단되었던 강 대위의 외박도 실시하게 되었다. 대대 지원 장교 최진식 대위가 9 중대장 직무대리를 위해 제갈 상길 대위에게 중대 일반 현황을 인수받았다. 제갈 대위는 통일전망대 주차장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100 원 자리 동전 10 개를 넣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성현이야? 나 상길!”
“어머나, 이 시간 잠자는 시간 아니야?”
“뉴스 안 봐?”
“무슨 뉴스?”
“걸프전!”
“다국적군이 승리했다고?”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걸프전 종식으로 내가 외박 나간다. 오늘!”
“정말?”
“응!”
“그럼 상길 씨 서울로 오려면 차 여러 번 바꿔 타야 하니까 속초 고속버스 터미널서 기다려. 내가 아빠 차를 운전해 갈게.”
“알았어.”
성현이 상길의 전화를 받은 것은 어머니와 신혼 준비 이불을 꿰매는 중이었다. 이불을 같이 꿰매다가 엄마, 나 영수 씨 외박이라서 아빠 회사 가서 차 빌려 다녀올게. 미안! 하고는 집을 나섰다. 회사 최 재석 씨에게 차키를 받아 들자마자 영동고속도로를 진입했다. 감시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속초로 향했다.
속초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제갈 상길 대위가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 한 40분 정도?”
“나 아빠에게 차키 받고 얼마나 과속으로 달렸는지 몰라.”
“사고 나면 어쩌려고, 안전 운행, 방어 운전!”
“그래서 지금 상길 씨 만나고 있지?”
“어디로 갈까?”
“간성 금수리는 너무 좁아. 일단 강릉 쪽으로.”
성현은 상길을 조수석에 태우고 한 손으로 상길 손을 잡고 한 손으로 운전을 했다. 7번 국도를 타고 속초에서 강릉으로 내려가는 길은 왼쪽에 푸른 바다가 잠시 보였다가 산으로 막혔다 다시 바다가 보이길 반복했다.
“이번 달 전화요금 16만 원이나 나왔어. 평소는 3-4만 원 나오든 전화요금이 107로 그렇게 나온 거라고 영수 씨 월급 타면 엄마가 나보고 갚으래.”
“야, 많이 나왔네. 앞으로는 동전 미리 많이 준비해서 동전으로만 통화하자?”
“아니야. 그냥 편하게 107로 해.”
“대위 봉급 얼마나 된다고 12 만원 전화비 내고 나면 쓸 돈 별로 없어.”
“엄마가 농담으로 한 소리지 정말 전화요금 우리에게 받겠어?”
“그래도 10만 원 넘어가는 건 너무한 거지?”
차는 달려 경포대 ‘청수장 모텔’에 도착했다.
“사장님, 우리 여기 모텔서 이틀 자고 갈 겁니다.”
“예, 그렇게 하세요. 바다가 보이는 ’ 죽실(竹室)‘로 하세요?”
“고맙습니다.”
모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짐을 꺼내 파도가 보이는 죽실(竹室)에 정리를 했다. 군복을 벗고 성현이 준비해 온 사복으로 편하게 갈아입고 둘은 손잡고 바닷가 모래밭을 걸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모래밭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상길의 무릎에 성현이 누웠다. 그의 입술이 성현의 입술을 덮었다. 성현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성현아, 오늘이 무슨 날이야?”
“무슨 날? 영수 씨 외박 날, 북한의 김정일 생일?”
“그래 김정일 생일이고 우리 2세 만드는 날!”
“뭐야? 결혼식 전에는 내 순결 지켜준다며?”
“지켜주려 했는데, 이미 금수리에서 성현이가 속도위반했지?”
“뭐야, 상길 씨가 나를 건드렸지?”
“이미 내가 거기 손을 넣을 때 성현이 액체가 흘러 축축하던데, 이미 성현이 마음속에 나를 들어오라고 기다렸다는 증거야.”
“몰라! 몰라!”
모래밭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배가 고팠다. 모텔 바로 옆 강구횟집으로 갔다.
“어서 오세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광어랑 소주 주세요.”
“예에! 여기 3번 광어랑 소주 한 병!”
싱싱한 회와 동해 맑은 바다와 시원한 공기 속에서 마시는 소주는 마셔도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둘이 5병이나 마셨다. 청수장 모텔로 들어갔다. 그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성현이 아무래도 오래 걸리니 그가 먼저 샤워를 했다. 샤워 중에 성현이 상길을 불렀다.
“상길 씨!”
“왜?”
“이리 와 봐?”
“어디?”
“이리 들어와!”
욕조에 거품을 일게 하고 그 속에 성현이 누워서 그를 불렀다. 그는 성현이 부르는 곳으로 알몸으로 들어갔다. 작은 욕조에 거품 속에 둘은 그림처럼 나란히 누웠다. 이날이 199X 년 2월 16일이다. 내 나이 이제 한 살만 더 먹으면 결혼 한판이 되는 스물아홉 나이다. 11 월 17일 스물아홉 생일에는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갈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에 3 회 누락되어 만 45 세에 계급정년으로 전역을 했다.
전역증서에는 이름과 혈액형이 B형인 것과 군번과 전역일일 200X. 5. 31. 찍혔다.
군에 있을 때는 술만 한 잔 하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하는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겠다고 연대 군수과장 시절에 최성현은 연대장 공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오히려 연대장 사모님 보다 연대장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연대장 가사도우미 수준으로 연대장 공관에서 공관 병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김치를 담그는 것은 기본이고 계절마다 지역 특산품을 몸에 좋다고 구해서 연대장 입맛을 돋게 했다.
조 대령을 매개로 상길을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고 조 대령도 장군으로 진급하는 일을 도모했다. 대전 육군본부의 고위 장군에게 채 대령이 보내는 선물을 조 대령 부인이 아닌 최성현 여사가 대전까지 운전해 다녀오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내가 아냐고? 보민은 초등학생으로 엄마의 보디가드였거든.
항상 엄마는 운전할 때 나를 뒷좌석에 베이비 시트를 설치하고 보민을 태워 장거리 운행을 했다. 만약에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딸은 살려야 한다는 엄마의 투철한 모성애가 차에 장착된 에어백으론 부족하다고 초등학생인 나에게 어린이용 시트를 착용시켰다. 꽉 끼는 시트가 나는 답답했지만 엄마의 성질을 알기에 항변도 못하고 꾹 참고 차에 타고 있었다. 엄마의 행동반경을 신출귀몰했다. 전국의 특산품 제철음식은 모두 사서 수송 배달했다.
아마 엄마는 아직도 내가 엄마와 조 대령과의 관계를 모를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이미 초등학교 5,6 학년과 중 1 시기에 엄마와 조 대령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할 뿐이었고 아버지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민은 절대 어른이 되면 내 남편은 아빠처럼 무능한 남자, 엄마처럼 출세를 위해서는 도덕이고 양심이고 다 버리는 여자처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한 번은 이런 꿈도 꾸었다. 미팅을 갔는데, 세상에 보민의 파트너가 제갈 상길과 너무 비슷한 남자를 만났다. 대머리에 큰 눈 174 정도의 중간키, 뚱보도 날씬한 것도 아닌 몸매, 어눌한 말투까지 꿈에 미팅 파트너를 정하자 내가 먹은 커피 값만 주선한 친구에게 던져주고 미팅 장소를 나왔다.
만약 보민이 남자였고 아빠 입장이었으면 진급하겠다고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써가면서 조 대령과 붙어 다니는 것을 용납 못했을 것이다.
내가 중3에서 고 1이 될 무렵 아버지는 전방에서 군수 과장을 마치고 정보과장을 하고 있었다. 사실 병과가 정보라서 군수 과장은 해봐야 손해를 보는 보직이었다. 그런데, 정보과장 빈자리가 없다고 그 부대서 정보과장이 떠날 때까지 군수 과장을 하다가 정보과장이 떠나면 이어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의 XX사단 전방연대는 상길은 눈 감고도 지프차 선탑하면서 여기는 신병교육대 다리 여기는 대광리 보신탕집 앞 여기는 독서당리 저기는 대마리를 다 알 정도였다.
전방 연대 정보과장 시절 북한의 G. P와 우리 G. P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처럼 북한이 먼저 도발을 했으나 북한 G. P를 정말 초토화시켜 그날의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상길의 후배 구건무 중위는 그 순간 영웅이 되었다. 군에서는 훈장도 수여하고 장기 복무를 유도하느라 학군 선배인 아빠를 구 중위 장기 복무 유도 작전에 투입했다.
구 중위의 대답이 10년 후의 모습이 정보과장, 제갈 상길 소령님 모습이 되는 것이 두려워 장기 안 합니다.라고 했다. 구 중위는 2년 3개월의 의무 복무만 마치고 전역했다. 그날 아빠는 야 요즘 젊은 후배 놈들은 선배 말을 하느님 말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동네 개 짖는 소리로 들어하면서 혼자 소주를 3병이나 마셨다.
최성현은 보민과 종우를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자식 뒷바라지 한다고 상길의 퇴직금을 담보로 5천만 원을 대출해서 서울로 전세로 이사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전역해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와 엄마는 한집에 살지만 각자 방을 쓰고 남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조 대령은 보민이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가 있어야 할 안방을 엄마랑 사용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엄마에게 말해줘도 엄마는 응 알았어. 하고는 조 대령과 은밀한 행위를 하는 소리와 샤워소리가 공부방에 다 들릴 정도로 둘은 조심하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보하고 싶었다.
보민, 그녀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하는 말인데, 시험 공부하는 학생 바로 옆방에서 엄마와 조 대령의 이상야릇한 소리가 들리고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리는데 내가 아무리 천부적으로 아빠에게 물려받은 좋은 DNA 소유자라 해도 공부에 집중이 되었겠냐고? 그 기말고사서 난 수학만 제대로 90점 이상 받고 나머지 과목은 다 70-80 점을 받았다. 문과반인데 문과 중요 과목보다 수학 점수가 더 좋다고 수학 선생님 최경조 선생님은 ’야, 제갈 보민 넌 지금이라도 이과반(理科班)으로 가거라! 가서 이과반 애들에게 수학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좀 보여줘라?’ 말씀하셨다.
사실 보민이 수학을 하는 것은 잘하는 축에도 못 든다. 동생 종우는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1학년 입학을 했는데, 수학 문제로 고민하면 동생이 옆에서 훈수를 들었다. 누나 한쪽은 완전 0이 되게 몰아봐. 정말 함수의 개념도 설명도 누가 해준 것도 아닌데, 종우는 5학년 수학책의 문제를 풀었다.
엄마가 남매에게 육군본부의 조 대령과 친한 장군들에게 엄마가 로비를 잘해서 아빠도 중령으로 진급하고 조 대령도 장군으로 진급하게 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예비역 소령으로 전역했고, 조 대령도 장군이 못 되고 대령으로 한직인 증평, 후방부대의 부사단장으로 전출을 가서 부도수표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전역한 상길의 첫 직업은 보험설계사였다. 아버지의 R. O. T. C. 선배 한 명이 모 보험사의 지점장으로 있고 그 밑에 세일즈 매니저로 선배들이 몇 명 있어서 완전히 지점 전체가 R. O. T. C. 동문으로 만든다고 들어갔다.
하지만 보험설계사의 직업이 계속 신규 계약을 늘려가야 하는데 아버지의 알고 있는 지인의 풀이 떨어지자 계약 건수도 줄고 정비례하여 수입도 점점 줄어 서서히 고사목이 되었다. 수입이 줄어들면 엄마는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엄마는 아빠에게 돈 많이 벌어오라고 닦달만 했지 가정의 지출을 줄이는 노력은 안 했다. 드디어 아빠는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곳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다단계라면 치를 떨던 아버지가 다단계에 빠졌다. 아니 빠진 것이 아니라 다단계의 전도사가 되었다. 다단계에 가담한 것은 승득남이라는 탈북자 때문이었다. 아빠가 정보장교라 한 때 대성공사라고 하는 탈북자를 신문하는 기관에서 근무했는데 그러다 보니 탈북자에 대해 잘 알아본다. 탈북자의 외모는 남한 사람과 별 차이 없다 표가 나는 것은 억양이야. 투박한 함경도 억양이거나 따발총을 연상하는 평안도 억양이나 어투로 표시 나고 행태로는 지하철 노선도를 성경책 이상으로 아낀다. 노선도 없이는 어디 행차를 못하기에 항상 지하철 노선도를 지갑에 잘 접어 찾기 쉽게 하고 다닌다. 아버지가 득남을 만난 것은 지하철역 목도에서다. 목동 근처에 탈북자들이나 중국 교포의 출입을 관리하는 출입국관리 분소가 있다. 지하철 노선도를 살피더니 시흥역이 없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흥역 가시려고요?”
“예, 제가 중국서 설명 듣기로 시흥역에서 마을버스 1번을 타면 벽산아파트 간다는데 여기 시흥역이 안 보입니다.”
“예, 원래 시흥역을 금천구가 청사를 새로 지으면서 역 이름을 금천구청역으로 변경했어요.”
“남조선은 역 이름을 그렇게 막 바꿉니까?”
“남조선?”
“그럼 아저씨는 북조선서 왔어요?”
“예, 본디 혜산 사람인데, 딸 하고 2년 전에 탈북했고, 이번에 마누라가 탈북을 해 지금 하나원서 교육 중이요.”
“아, 그런데 벽산 아파트에 누가 살아요?”
“예, 연변서 신세 진 분의 아들이 살고 있다기에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럼, 저랑 같이 가시지요. 저도 집이 벽산아파트 가기 전이라 그쪽으로 갑니다. 저는 두산 아파트에 살아 가산디지털 단지 역에서 내리는데 아저씨는 금천구청역이라고 방송 나오면 거기서 내리세요. 그럼 마을버스 1번 탈 수 있어요. 오늘은 초행이니 그냥 금천구청역에서 내리고 다음에 갈 때는 독산역에 내리세요. 그럼 거기가 1번 버스 출발지라 앉아서 갈 수 있어요.”
제갈 상길은 최성현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지 마라 했지만, 아빠는 늘 처음 본 사람에게 길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방문에 마을버스 앉아서 가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니 엄마와 아빠는 처음부터 ‘결혼해서는 안 될 상대’였다. 사실 엄마 아빠 결혼한 것도 아빠가 생전 처음 본 분들의 짐을 들어준 인연으로 결혼했으니 아빠의 친절은 타고난 거였다.
당신은 아직도 내 말을 안 들어요? 탈북자에게 길만 알려주지 뭐 그런 친절을 베풀고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아요? 탈북자는 일단 한국 국적 획득해도 보험은 없을 거 아니야? 내가 하나원을 어떻게 방문해 이런 식으로 탈북자 알아서 보험계약 탈북자 일 년에 3,000명 정도 오면 그중 200명만 내가 계약해도 난 지점에서 최고 신규계약 잘하는 설계사 될 거 아냐?
당신 TV도 안 봐요? 요즘 탈북자 보험 설계사가 탈북자들과 짜고 보험 고액으로 가입해서 별거 아닌 것으로 병원에 드러누워 보험금 타서 나눠가지다 적발되었다고. 당신이 하나원 가서 탈북자 하나 계약하기 전에 이미 탈북자 출신 보험설계사가 하나원 퇴소하면 누구 만나라고 예약한다고 합디다. 탈북자 한 사람을 계약하고 나면 줄줄이 탈북자의 소개로 계약이 연속될 거라는 아빠의 소박한 꿈은 엄마의 속사포 한 발에 아빠의 기가 죽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승득남이 아빠에게 접근했다.
“제갈 상길 형님 사람들이 핸드폰 가입자만 늘려나가도 돈벌이가 된다고 하는데 형님이 좀 오시겠어요?”
“ 야, 그거 다 다단계야!”
“다단계가 뭡니까?”
“그거 전화로 설명 못해. 만나서 직접 그림 그려가면서 해야 된다.”
“그럼, 제가 형님 사시는 가산동 두산 아파트로 가겠습니다.”
“그래, 오후 7시 저녁 먹고, 롯데아파트 앞에 좋은 공간이라는 카페로 와라.”
“예, 그럼. 형님 그때 봐요.”
좋은 공간은 원래 사장님이 서점이던 곳을 서점이 수입이 줄어들자 카페로 바꾼 것이다. 팔던 책 중에서 아끼던 것을 카페에 비치해서 커피도 마시고 노트북 가져온 사람은 문서작업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둘이 만났다.
“형님, 반갑습니다.”
“그래, 벽산 아파트 만나려던 사람은 잘 만났고?”
“예, 형님 덕분에 잘 찾아갔습니다.”
“독산역에서 1번 타봤어?”
“예, 형님 말대로 독산역에 내리니 1번 앉아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 마을버스 1번이 완전 황금노선이다. 늘 사람이 많이 타고 다니는데, 금천구청 역에서 타려면 거의 앉아 갈 확률이 희박하다.”
“예, 저는 형님 덕분에 남조선에 빨리 적응하는 중입니다.”
“그래, 만나자고 한건부터 말해봐?”
“가산 디지털단지 역에 4번 출구로 나오면 우림 오피스텔이 있는데, 203호에 한솔이노베이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거기서 뭐라고 하더니?”
“제가 가입하고 탈북자로 몇 명을 가입시켰는데, 탈북자 아닌 사람으로 한쪽 라인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래, 그래서 한 100명 만들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산다고 하지?”
“네.”
“그거 다 사기다. 사기!”
“사기가 다 뭡니까?”
“너 왜 탈북했어?”
“북조선에서 밥 먹고 살 수 없어 탈북한 거 아닙니까?”
“그래 밥 먹고 살 수 없어 탈북했지? 다단계 해도 밥 못 먹고 나중에 겨우 벌어 모은 돈도 다 날리고 교도소 간다.”
“그럼, 왜 남조선은 그런 다단계를 법으로 금지 안 하는 겁니까?”
“그게 민주주의고 자본주의야.”
“왜 그럽니까?”
“결적정인 피해 근거가 나와야 법으로 단속하고 처벌하거든 그러니 문제가 표면에 나타나 피해자 생기기 전에는 경찰도 검찰도 그냥 두는 거야.”
“그래도 형님이 우리 회사 교육 한번 들어보고 확실히 다단계면 저도 그만둘 거니까 형님 가서 강의 한 번만 들어주겠어요?”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있는 동생 소원 들어주지.”
“고맙습니다, 형님!”
“그래, 교육이 언제야?”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목요일 오후 2시입니다.”
“다음 주 화요일 10시 가마.”
“고맙습니다, 형님!”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가듯이 다단계 잡으러 강의를 들으러 갔던 아빠는 완전히 동화되어 다단계사업자가 되어 득남은 탈북자를 신규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아빠는 내국인을 가입시켜 나갔다.
과도한 부채와 아버지 핸드폰 다단계 사업이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 엄마는 변호사를 고용해서 이혼 소송을 했다. TV 드라마에서 보던 아파트 내부에 스티커 부착하고 압류표시를 하는 것을 나와 동생은 작은 방에서 숨죽이며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엄마는 종우와 나에게 가정법원 판사가 엄마 아빠 이혼하게 되면 누구와 살고 싶냐 물으면 엄마라고 대답하라고 일러주었다. 도저히 너희 아빠랑 계속 살면 우리 집안 모두 거덜이 난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 네 식구는 목동 남부 가정법원에 출두했다. 가정법원 판사는 여자였다. 가법법원 판사가 피고인 제갈 상길 씨는 아내를 폭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강 영수 씨는 마약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갈 상길 씨는 배우자 이외의 여자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졌습니까? 아닙니다. 등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자 가정법원 판사는 동생과 나에게 만약에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하게 되면 누구와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교육받은 대로 엄마랑 살고 싶어요. 했다.
가정법원 판사는 피고인 제갈 상길 씨가 즉각 이혼 대상의 질문에 부정을 하였기에 2 개월 간 숙려기간을 준다고 했다. 2 개월 후에 다시 법정에 나오기 바랍니다. 한쪽이 안 나오면 없는 대로 궐석재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2 개월 후 아빠 없이 엄마 혼자서 이혼확정 판결을 받고 판결문은 아빠에게 등기로 보내졌다. 2009 년 5월 31일 아빠가 군대에서 전역한 2년 후인 바로 그날 이혼 확정판결을 받았다. 며칠 후 우리 식구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우리가 살던 독산동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가고 은행부채와 경매와의 차익금 1,500 만원을 들고 엄마, 나, 동생 셋은 부천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고 아빠는 그냥 집을 나갔다. 그날 이후 아빠는 시흥사거리 은행나무에 있는 24 시 불가마 사우나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이면 대우인력으로 나가서 그날그날 건설 일용직 근로자가 되었다. 주민등록 주소지를 독산 아파트에 둘 수 없어 경기도 청평의 아빠 초등학교 친구의 집으로 동거인으로 옮겼다.
제갈 상길이 금융 신용불량자와 통신 불량자에 모두 걸려 이혼하는 그를 위해 보민 이름으로 입출금 통장과 휴대폰을 개통해서 아빠에게 주었다. 상길과 보민은 암호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핸드폰 문자로 ‘신 15’ 하면 신한은행에 15 만원 보냈다는 뜻이다.
전화번호 저장도 아버지, 아빠가 아닌 ‘은사님’으로 저장했다. 왜냐하면 내 핸드폰을 이모나 외삼촌 엄마가 보면 아버지와 만나는 것을 알게 되기에 나는 엄마나 외가 어느 누구에도 아빠와의 연락을 안 하고 행방을 모르는 것으로 했다.
실제로 다단계 수배자로 아빠를 찾는 경찰도 있었고 법원 송달들도 다녀갔다. 엄마는 이혼 후로는 왕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아빠 행방 모른다고 대답했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만 주고받았다.
“은사님, 오늘 비 오는데 뭐 하세요?”
“비 와도 우리는 지하에서 일한다.”
“돌아오는 일요일 충무로 대한극장 12:00”
“오케이”
그것으로 아빠와 나의 의사소통은 되었고 둘 다 정확히 12시 5 분 전에 충무로역 지하 대한극장 들어가는 유리문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은사님 눈이 내려요. 지금 어디신가요?”
“여기는 제주도”
“그 멀리?”
“건설일용직 근로자는 지구 끝이라도 일감 있으면 가서 하는 거야.”
제주에서 건설 일용직을 하면서도 아빠는 한 달에 아빠의 고시원 방세와 동료와의 소주 값 정도만 남기고 나에게 보내주었다. 많은 때는 130 보통은 70, 80 만 원 정도를 보내고 문자로 신 70이라고 보내왔다. 제주도로 일하러 간 아빠 동료 간에 불화가 생겨 1 년 약속으로 간 것이 고작 4 개월하고 다시 서울로 왔다. 그때가 201X 년 5월이다.
5월부터 아빠는 건설일용직 잡부가 아닌 고단가의 일을 한다고 해체를 하러 다녔다. 시흥사거리를 벗어나 남구로 한성인력으로 나갔다. 새벽 4시 50분 인력 사무소 안이나 밖이나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강 영수라고 이름이 선명한 주민등록증을 인력사무소 부장에게 제출했다.
“제갈 상길 씨 내국인이죠?”
“네.”
“그동안 경험한 직종은?”
“정리도 하고 해체 조공도 했습니다.”
“예, 마침 잘 되었군요. 한국인만으로 편성된 해체 팀에 조공이 한 명 부족한데 그리로 보내드리죠.”
“감사합니다.”
인력시장의 90 %는 외국인이다. 중국이 가장 많고 몽골, 베트남,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 다양한 곳에서 단지 돈 벌기 위해 이렇게 말도 안 통하지만 나온 것이다. 그러니 일하는 현장에서는 한국인은 눈에 보기 드물고 최소한 외국인이라도 한국말 알아듣는 사람이 금값이 되었다.
“제갈 상길 씨?”
“예, 제가 제갈 상길입니다.”
“반갑습니다. 해체팀장 공승현입니다.”
“반갑습니다. 강각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봉희입니다.”
“반갑습니다. 강철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한국인 찾기 힘든데 형님 오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공승현 해체 팀의 일원이 되었다. 김포 한강 신도시 건설공사장, 송도 신도시, 위례 신도시 여기저기 해체가 필요한 공사장이면 어디든지 다녔다. 201X 년 8월 19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무지개 지역방송 신축공사장에서 해체를 하다 거푸집에 깔려 대퇴부 골절이 되었다. 119에 실려 시화병원으로 이동했다. 시화병원 응급실 당직의사가 물었다.
"환자분! 이름이 뭐예요?"
"제갈 상길!"
"이거 몇 개로 보여요?"
"3개!"
"어떻게 다쳤어요?"
"해체하다 거푸집에 깔렸어요."
"예,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할 겁니다. 그리 아세요."
"녜.”
“지금부터 마취를 하니까 하나, 둘 , 셋, 스물아홉까지 세세요.”
“하나.”
“둘.”
“셋.”
“넷.”
일곱을 세자 완전마취가 되어 여덟을 세기 전에 잠이 들었다. 시화병원 제1 정형외과 과장 김 청야 과장은 신속히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을 경유하여 마취가 다 풀릴 즈음 706 병동으로 이동했다. 간호사가 입원서류 서명을 받아갔다.
“제갈 상길 환자님, 혼자 식사는 하지만 화장실 갈 수 없으니 가족 중에 병원에 나와 간병할 분 있어요?”
“없어요.”
“아드님 없어요?”
“군대에 갔어요.”
“따님은?”
“저작권 관련 회사 다녀요.”
“그러시면 어차피 간병인 써야 하니 간병인 있는 병실로 하겠습니다.”
“예.”
201X 년 8월 21일부터 간병인이 공동 간병하는 707 병동으로 이동했다. 보민은 혼자 시화병원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따라나섰다. 아니 이혼한 엄마가 병원 가면 다쳐서 신경 날카로운 아빠에게 도움이 될 일 없다고 했으나 엄마는 따라나섰다. 난 엄마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간병인 석경희 여사는 중국 교포 조선족 여자였다. 젊어서 중국에서 간호사를 했으나 나이 들어 간호사 할 수 없어 한국으로 와서 간병인 10년 차라고 했다. 전직이 간호사라 아빠에 대한 간병을 잘했다. 그런데 따라온 엄마 때문에 사단이 생겼다. 예고 없이 나타난 아빠의 이혼녀이고 나의 엄마 최성현은 아빠 침대 시트에 어린애 오줌지도 모양의 무늬를 보고 간병인을 야단쳤다.
“간병인이 간병을 제대로 해야지, 침대 시트가 이게 뭐예요? 오줌인지 물인지 모르지만 지도가 그려지고?”
“얼음주머니 방수가 안 되어 그런 겁니다.”
“환자 수염도 산적처럼 좀 깎아주어야지?”
“아주머니! 면도기는 보호자가 사주어야지 남의 면도기 빌려 사용 후 감염되면 누가 책임지라고 그런 소릴 하세요?”
그 말에 엄마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더구나 잠에서 깬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최성현이! 여길 왜 왔어? 보민은 내 딸이니 이혼해도 가족관계증명서에 이름 등장하니 와도 되는데 넌 이혼녀라 이름 없어.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병실에 들어와?”
“이혼한 마누라는 병문안도 못 와요?”
“문안 같은 소리 하네? 이혼했으면 그만이지 남 다리 얼마나 비참한지 확인하러 왔어?”
“그래, 얼마나 비참하나 확인하러 왔다. 왜?”
“당장 나가!”
“간호사! 여기요, 저 여자는 환자 가족 아니니 병실 밖으로 내보내주세요?”
상길의 불호령에 엄마는 황급히 시화병원 707 병동을 빠져나왔다. 엄마가 나가자 간병인 석미경은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 사장님, 저런 여자와 결혼해 몇 년 사셨어요?”
“20년.”
“세상에 내가 남자라면 저런 여자와 3 일도 못 살 거야.”
“20년 산 사람도 있는데?”
“20년 동안 사장님이 지고만 살았죠?”
“어떻게 알았어요?”
“안 봐도 훤해요. 간병인 10년이면 관상쟁이 다 됩니다. 아무리 돈 많은 척을 해도 간병비 제대로 못 내는 환자 보호자들 자식 자랑해도 병원 한번 못 오는 잘난 자식 10명이면 뭐해요?”
“그렇지요. 돈 많이 못 벌어도 환자 병원 와주는 사람이 고맙지.”
“병원 환자와 환자 가족 퇴원 때면 그네들 집안 수준 다 드러나죠. 서로 모시려는 집안 서로 네가 모시라고 공 떠넘기는 집안 환자가 부자면 자식들이 서로 모시려 하고 환자 돈 없고 자식들도 그저 그럭저럭 사는 형편이면 서로 안 모셔요.”
“그럼요. 이 세상에 문제없는 잡이 어디 있어요? 다 그런 문제는 가족 간에 적당한 선에서 묻고 사는 가정과 서로 책임 전가하고 캐고 따지는 차이지요.”
시화병원은 종합병원이라 대퇴부 수술을 하고 4주가 지나자 주치의 김청야 정형외과과장이 보호자인 보민을 불렀다.
“과장님 부르셨어요?”
“예, 아버님 제갈 상길 님의 수술은 아주 잘 되었고, 환자분이 식사도 잘하시고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물로 하루 2 리터 이상 꼭 드셨기 때문에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우리 병원은 수술하는 병원원이라 규정상 수술 환자는 4 주 정도만 여기서 입원하고 구 후는 환자의 집 가까이 있는 정형 와 과로 가도록 합니다. 시흥 사거리 정형외과로 이송하시지요?”
“저도 직장이 서울이라 아빠 병문안 한번 오려면 3 시간 걸리니 힘들었어요.”
“어디 평소 이용하던 정형외가 있나요?”
“아니, 없어요.”
“그러시면 시흥사거리 내 고등학교 동창이 K의과대학 졸업하고 저보다 실력이 좋은 친구인데 안양천정형외과 병원으로 이송하세요. 내가 미리 전화해 두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양천정형외과로 이송된 다음 날 동생 종우가 포상 휴가를 나왔다. 군대 갈 때는 일반 병 100 군번으로 갔는데, 사단 신병교육대 수료하고 주특기를 300 통신으로 받았다. 천하제일 사단 포병연대 낙석대대 통신병으로 배치된 종우는 이등병 때 사단 음어 경연대회에서 1 등을 했다. 초등학교부터 한국교육제도에 맞지 않는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나와 나이 차이가 4 살이 나지만 학년은 3 학년 차이인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가 수학책을 들고 문제풀이가 안되어 머리를 쥐어짤 때면 동생이 누나 X를 한쪽으로 몰아봐라고 힌트를 줄 정도로 수학의 귀재였다. 하지만 한창 공부할 중학 시기에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서 그 이상의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푼 두 푼 모아 고입 검정고시 대입검정고시 학원을 다니고 학점은행 공부를 하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 입대해서 신병교육대 신체검사에서 군의관이 과체중이라고 귀향조치를 내렸는데 신병교육 기간에 현역 몸무게를 맞추겠다고 우겨서 스스로 현역이 된 것이다.
남들은 돈으로 권력으로 군대를 면제하거나 기피하려고 하는데 이 녀석은 스스로 현역이 되었다. 이등병이 사단 음어 대회 1 등을 하는 낙석 부대의 역사를 새로 쓰고 나온 것이다.
“아버지 많이 다치셨는데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내년 8월이면 전역하니까 그때는 아버지 돈벌이 하러 새벽에 인력시장 나가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좌절?”
“예, 제가 아버지 성격 닮아서 하는 소리예요.”
“그래, 나 시화병원서 간병인이 소·대변받아낼 때는 이렇게 사느니 병원 7 층서 그냥 뛰어내릴까 생각했었다.”
“에이, 아빠 그건 오버다.”
“오버 아니야. 내가 이런 다리로 세상에 뭔 일을 하겠니? 일을 못하면 돈이 없고 천박한 자본주의에서는 돈 없으면 죽어야 한다.”
“아버지, 일단은 누나가 있고 내년 8월이면 저도 전역해 돈 벌면 잘 살지는 못해도 먹고사는 데는 이상이 없어요. 그러니 아버지는 재활에만 신경을 쓰세요?”
“그래, 알았다. 아들!”
“아빠?”
“왜?”
“남녀차별 안 한다더니?”
“내가 무슨 차별이야 딸은 딸이라 예쁘고, 아들은 아들이라 믿음직한데?”
“그거 알아?”
“뭘?”
“김포 할아버지가 난 한번 안아주지 않고 도식이 우식이 종우만 안아준 거?”
“야, 그 이야기는 왜 새삼?”
“아니야, 난 정말 영원히 할아버지에게 여자라고 손자들만 안아주고 난 한 번도 안아주지 않고 돌아가신 거 잊을 수가 없어?”
“너는 시집가서 애 태어나면 남녀 차별 없이 잘 키워?”
“응, 그럴 거야.”
“아버지 제가 군대 가서 느낀 것인데 아버지가 예비역 소령이라서 소령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군대 가서 신병교육받으니 소령 높은 줄 알았어요.”
“그럼, 이병부터 치면 이병, 일병, 상병, 병장, 하사, 중사, 상사, 원사, 준위, 소위 중위, 대위 그다음이 소령이니 높지? 하지만 장교 중에서는 중령, 대령들의 밥이다 밥!”
“아버지 죄송해요.”
“뭐가?”
“엄마 아버지 서울 가정법원에 이혼할 때 아빠랑 살겠다고 안 한고 엄마랑 살겠다고 말한 거 정말 죄송해요. 그때, 엄마 말만 듣고 정말 아버지가 잘못해서 이혼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누나에게 들으니 엄마 잘못도 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다 지난 일인데, 이제 뭐가 죄송해? 잘 자라 이렇게 군대서 포상휴가도 나왔는데. 역사에 가정법이 없듯이 인생에도 가정법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을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후회할 필요 없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새로 오는 인생에 대해 준비를 잘해 도 다른 후회거리를 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빠?”
“왜?”
“난 여자지만 엄마도 이해가 안 되고 아빠도 이해 못 하겠어?”
“왜?”
“조 대령하고 엄마가 그렇게 붙어 다니는 것을 왜 말리지 않고 묵인했어?”
“엄마가 조 대령을 만나는 것은 나의 진급을 위한 것이니까 묵인한 거지?”
“그래서 아빠가 진급을 했어?”
“못했지?”
“그런데, 왜 진급 못하고 전역 얼마 안 남은 상태서도 엄마가 조 대령 만나러 나가는 것을 묵인했어?”
“만나지 마라 하면 엄마가 안 만날 여자니?”
“그래도 만나지 마라 아빠는 말을 했어야지?”
“이미 만난 지 여러 해 되는 남녀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해지고, 일단 엄마와 부부의 연은 여기 까지는구나 했어도 너희들 대학 마칠 때까지는 이혼 안 하고 지내려 했지.”
“그런데 왜 이혼했어요?”
“엄마가 이혼 소송을 가정법원에 제출했고, 출두하라고 해서 출두한 거야. 엄마는 변호사 도움을 받아 서류 작성하고 나는 혼자 작성했어?”
“난 여자지만 아빠 입장이라면 엄마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야.”
“나라고 엄마 나돌아 다니는 거 마음이 편했겠니?”
“엄마 아빠 이혼하고 성옥 이모가 나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든?”
“보림이 너 엄마, 조 대령 아저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언제 알았느냐 물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한 거라고 했지?”
“이모 반응은?”
“미치겠다. 너는 완전 애늙은이구나! 초등학생이 알면서 모른 척하고 몇 년을 지냈다니. 형부도 바보 멍청이고, 언니는 인간도 아니야 했어.”
그렇다. 성옥 이모는 엄마가 대학 다닐 때 그냥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김포공항의 물류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여고 졸업자라고 대졸 사원들 사이에서 임금 차별받으면서 일하다가 외할머니의 등살에 맞선을 봤다. 남자는 서울의 명문대를 나오고 남자의 언니와 여동생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이모는 학력 열등의식으로 그 남자와 더 이상의 만남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모부도 당시 고졸 출신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 남자 자면 평생 같이 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결혼을 했다. 외가에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반대하고 엄마 아빠도 반대 외삼촌 두 명도 반대를 했다.
결국 이모는 집을 나가 이모부와 동거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이 결혼식을 올려주었지만 지금도 이모는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한다. 결혼식 올려주든 안 올려주는 사는데 아무 문제는 없다.
“나 조 대령 만났다.”
“어디서?”
“삼성동 회사 옆에 봉은사 있고 코엑스 건물 식당서 점심 먹고 회사로 걸어오는데 누가 제갈 보민! 하는 거야. 이름을 보민에서 하영으로 개명을 했는데 개명 전 이름을 누가 부르나 쳐다봤더니 조 대령이었어.”
“뭐라고 하든?”
“엄마 전화번호 가르쳐달라고 전화하니 없는 번호라고 안내 음성 나온다고.”
“그래서?”
“싫어요. 더 이상 우리에게 관여하지 마세요. 다시 만나도 부르지 말고 모른 척하세요?”
“그랬더니?”
“알았다. 자기는 방배동 궁전아파트 팔아서 용인 동백지구로 이사를 갔다고. 그런데, 대령 때보다 완전 할아버지야. 얼굴도 쪼글쪼글하고 키도 더 작아진 느낌?”
“딸 보기보다 냉정하네?”
“나 아빠 딸이야!”
“난 냉정 아닌데?”
“아니야, 엄마가 이혼 후에 하는 말인데 아빠 찬 사람이래. 뱀처럼!”
“하긴 고향 어머니도 아버지보고 맨 날 찬 인간이라고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라고 했어.”
“종우도 차니?”
“아니 종우는 정이 많아, 동물도 좋아하고.”
“그래, 세상에 둘 남은 남매니 잘 지내.”
“엄마는 커 갈수록 내 얼굴에서 아빠 모습 보여 놀란다고 해.”
“그럼, 보민이 얼굴 달걀처럼 갸름한 북방 미인이지. 김연아를 아사다 마오가 죽었다 깨도 못 따라오는 이유가 김연아는 북방혈통이거든 얼굴 갸름하고 키도 늘씬하고 점프 높이도 워낙 연아가 높아 체공시간이 길어 회전 시간 충분하거든 아사다 마오는 얼굴 동그란 남방혈통이라 안 되는 것이야.”
“종우는 엄마 닮아서 동그란 형이지?”
“그래 종우는 외할아버지, 엄마, 작은 외삼촌 비슷한 형이고 보민, 할아버지, 나, 영주, 경화 고모 비슷한 형이고.”
201X 년 3 월 XX 일 근로복지공단에서 상길의 산재 치료를 종료시켰다. 근로복지공단 서울 남부지사에서 등급 판정을 받았다. 14등급이었다. 722 만원의 일시금이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다. 산재환자의 재활 운동 지원도 없고, 취업을 위한 무료교육도 12 등급 이내 받아야 혜택이 있지, 14 등급은 아빠가 스스로 취업활동을 해야 했다. 지팡이를 짚고 금천노인복지회관 취업훈련을 받았다. 서울시 어르신 취업센터에도 등록을 해서 취업훈련을 받았다.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작성해서 올렸다. 이력서에 자신을 알리는 한 줄 칸에 아빠는 ‘학교생활 16년 군대생활 21년 3개월 동안 지각 한번 안 한 시간을 칼처럼 지키는 사람’
아빠는 어렸을 때 아빠의 할아버지 나에게 증조부의 회갑 잔치로 결석 한번 해서 개근상을 못 받고 정근상 받았다고 했다.
우리 남매에게도 학교 지각하면 안 된다고 항상 일찍 등교를 시켰다. 한 가지 웃기는 일은 아빠가 대학시절 연애를 했는데 여자가 10분 늦었는데 그 10분을 못 참고 아빠는 메모지에 ‘미숙 씨, 기다리다 갑니다. 제갈 상길’라고 써서 알림판에 붙였다.
그것을 본 미숙이라는 여학생이 뭔 남자가 그렇게 인내력이 없냐고 10분도 못 기다리느냐? 고 따지더란다. 여기에 상길은 여자에게 치명적인 말을 했다. 10분이면 수원 전투비행단 전투기가 평양 폭격하고도 남을 시간이고 강릉비행단 전투기가 원산을 폭격하고 담배 한 대 물고 있을 시간이라고 했다.
상길의 한 줄 자신의 소개가 인사 담당자의 눈에 들었는지 그는 세한통산이라는 곳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세한통산에서 경비직으로 가산동에 있는 맥 슨 전자라는 곳에 경비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24 시간 근무 24 시간 휴무라는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고용형태지만 아빠는 대퇴부 골절 환자를 고용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24 시간 경비 24 시간 휴무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고 있다.
보민은 아빠 걱정을 많이 했다. 군대서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지 못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굽힐 때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데 아빠는 그놈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의(義)’하나 때문에 진급을 못했다.
요즘 한국항공우주산업이라는 회사가 방산비리가 발각되어 검찰의 수사를 받는 중인데, 아빠는 소령 시절 그 항공우주산업이 만드는 무인항공기의 운용 부대장이었다. 상관은 정품의 부속을 사용하면 하나에 10만 원 하는 것을 B급으로 2-3 만원에 구입해 사용하고 영수증 정리는 정품으로 한 것처럼 해서 차이 나는 돈을 위로 상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걸 거부하고 무조건 정품으로 사용해서 1 년 배정된 정비예산이 불용액도 없고 차익금도 없게 한 것이 상관에게 유용할 자금을 0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상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지휘관의 인사 평점에 최하 점수를 받고 예비역 소령이 되었다.
술 한 잔만 들어가면 아빠는 양 희은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이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을 흘러간 내 청춘~~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왜 육사를 못 갔느냐
R. O. T. C. 가 무얼 바라느냐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상길의 자조적인 개사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수없이 들었다. 아빠가 그토록 진급 못하는 한이 있어도 지키려고 애썼던 ‘의(義)’는 그가 졸업한 대방동의 S 중학교의 교훈이 ‘의(義)에 살고 의에 죽자’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추첨번호 14번을 받고 들어간 흑석동 ‘검은 돌 고등학교’의 건학이념이 ‘참에 살고 의(義)에 죽자’였다. 그는 XX사단 전방연대 정보과장이라 자리를 한시라도 비울 수가 없었다. 거의 휴가 외박은 명목상 인사행정 검열용으로 명령을 내고 실제로는 계속 근무했다. 한마디로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이었다. 딱 한번 아빠가 외박을 나온 경우가 있다.
보민이 대방초등학교 6학년에서 대방 여자중학교로 올라가는 첫 번째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다. 그 후로는 전방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는 나타나질 않았다. 아빠 대신 엄마가 오빠로 호칭하는 조 대령이 수시로 집 근처에 나타났다. 외할아버지가 조 대령과 언 어떤 사이냐고 물으면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보민이 아빠를 진급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제갈 보민은 대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방여자중학교에 진학했다. 영등포역에 있는 교복 판매장으로 갔다. 교복을 입혀놓고 교복 얼짱 콘테스트를 한다고 사진을 찍었다. 그녀 사진과 다른 여러 명의 학생 사진을 매장 입구에 세워놓고 스티커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붙이게 했다. 실제로는 그녀에게 스티커가 가장 많이 붙었으나 여의도 고등학교 최상미 언니가 금상을 보민이 은상을 받았다. 동상은 여의도 고등학교 조윤선이 받았다.
보민이 교복 얼짱 콘테스트에 뽑혀 교복 값 26 만원을 내고 50 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금상은 100 동상은 30 만원이었다. 최성현은 기분이 좋다고 백악관 뷔페에 예약을 하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2명, 이모 2명, 그리고 조 대령을 초대했다.
모두 교복 얼짱을 축하해 주었다. 엄마는 기분 내느라 술도 여러 병 시켰다. 그날은 좋게 헤어졌다. 교복 매장에 붙어있는 문화강좌 포스터를 보고 L 백화점 문화강좌에서 최성현 여사는 사진반에 가입했다. 원래 엄마는 대방여중과 서울여고 시절 사진반 활동을 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진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나서 엄마가 찍은 사진이 문화강좌 사진반 야외촬영 후 자체 강평에서 최고 좋은 작품에 선정되었다. 그 사건으로 엄마는 ‘육군 소령 제갈 상길의 아내’에서 ‘사진작가 최성현’로 변했다.
집안일보다는 여기저기 사진 전시회에서 초청이 오고 엄마도 그런 초청을 즐겼다. 더 열심히 찍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자랑을 했다. 외가의 친목계 모임에서 외할아버지는 자랑을 했다. 우리 성현이가 이번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사진으로 입상을 했다고. 더구나 연세대학교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 양성반도 수강을 했다.
전방 XX사단 전방연대 정보과장인 제갈 소령의 봉급으로 애 둘의 학비도 빠듯한데 엄마는 그에게 생활비 부족하다고 돈을 더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뭔 소리야 봉급 통장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데 돈을 더 보내라면 나보고 봉급 외에 도둑질을 하라는 소리냐? 고 항변했다. 그 후로 전방 근무 중에 휴가가 있어도 아예 서울에 나오지 않았다.
보민은 엄마가 조 대령을 만나러 갈 때마다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나갔다. 짐작했다. 나이가 어리지만 보민이 있음으로 조 대령이 엄마에게 어떤 행위를 약간은 방어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대동했지만 나가서 하는 짓은 그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옆트임 치마를 입었고 조 대령은 그 트인 사이로 손을 넣어 엄마의 은밀한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커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반 35명 중에 대부분 가산, 한울, 독상, 문성 출신인데 보민만 대방여중이었다. 친구들은 대방중이 어디야? 하는 애도 있고 대방이 여길 왜와? 하는 애들도 있었다.
산기슭 고교는 금천구라서 엄마가 신길 5동 외가 근처에서 독산아파트로 전입하고 주민등록 등본을 학교 배정 전에 제출해 여기로 배정받게 한 것이다.
보민네가 입주한 아파트는 호빵으로 유명한 S제과 공장을 이전하면서 공장 부지에 아파트를 1,400 세대나 지은 대단지 아파트였다. 108 동 40X호가 보민 집인데 최선현이 제갈 상길의 군대 퇴직금을 담보로 5,000 만원을 대출받아 103 동 111X 호를 구입했다. 108동 40X 호는 38평인데 103 동 111X호는 45평이었다.
이사하던 날은 축제였다. 제갈 소령은 중령진급이 못된 상태로 만 45세가 되던 20XX 년 5월 31 일 전역을 했다. 문제는 전역을 하면서 5 천만 원문제가 수면 위에 떠올랐다. 대출받아 아파트를 구입한 5천만 원을 갚아야 아버지 퇴직 후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그 5천을 못 갚으면 퇴직금을 잔액만 일시금으로 받는다고 했다.
결국 5천만 원을 엄마가 마련 못해 연금 대신 퇴직금 2억 4 천 5백만 원을 받고 아버지의 평생 220만 원씩 받는 연금은 사라졌다. 아빠의 생각은 연금 200만 원에 사회 나가 최저시급 받으면서 월 130만 원 이상만 벌면 되겠다고 생각한 상길에게 성현은 350만 원 이상의 돈벌이를 요구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다가 안 되자 그는 P 생명보험사 설계사가 되었다. 다음 S 생명, 다시 D 생명을 전전하면서 아파트 원리금을 납부하지 못해 경매에 아파트 두 곳이 모두 넘어갔다.
집안의 장롱과 TV, 전축, 엄마의 샤넬 핸드백, 프라다 구두 등 명품에 대해서는 모두 압류 스티커가 부착되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압류를 숨죽이며 눈앞에서 목격했다. 아버지는 도피를 했다. 남부 가정법원에 가서 엄마 아빠의 이혼 재판에 동참을 하고 판결을 봐야 했다. 동생 종우와 나는 두 분이 이혼을 해서 우리가 어디서 살든지 엄마가 재혼을 해서 새아빠가 생기면 우리는 무조건 집을 나가자고 약속을 했다. 조 대령 부인이 우리 안방에 와서 엄마 머리채를 휘저으면서 너 죽고 나죽자고 싸울 때 아빠는 아무 편도 못 들고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아니, 그날로 아예 집을 나가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새벽이면 건설일용직 근로자들이 가는 인력시장에 가서 일을 나가면 한 공수(工手)해서 돈을 벌고 없으면 금빛 공원 근처의 벤치에서 편의점에서 막걸리 한 병과 추억의 꽈배기를 안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대낮부터 찜질방에 들어가면 거기 매표원이나 청소하는 아줌마가 직업도 없는 놈이라고 무시당한다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꿈에 가정법원의 재판이 재생되었다.
“피고인 제갈 상길은 아내 최성현을 구타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제갈 상길은 마약을 복용한 적 있습니까?”
“아니오.”
“재갈 상길은 알코올 중독자입니까?”
“아닙니다.”
“두 자녀에게 묻습니다. 먼저 제갈 보민 양,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와 살고 싶어요?”
“엄마요.”
“제갈 종우 군은?”
“저도요.”
“예, 여기 이혼청구서에도 그동안 제갈 영구는 전방에서 군인의 일만 하고 서울 가정은 몇 번 안 온 걸로 봐서 자녀 양육을 최성현이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혼 후에도 두 자녀 중 막내가 만 20 세 되는 12 월 31 일까지는 양육비를 보내기 바랍니다. 만약 양육비를 고의로 안 보내면 계좌 동결도 가능하니 그 점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때, 보민이가 고3이고 개구쟁이 종우는 중2였다. 우리는 엄마로부터 아빠가 야무지지 못하고 마음만 여려서 맨 날 남에게 치여서 이 모양 이 꼴로 산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어서 가정법원 판사의 질문에 서슴없이 엄마하고 산다고 대답했다. 내 나이 이제 스물아홉. 금년만 지나면 내 나이도 계란 한 판이다. 솔직히 엄마가 25 세 결혼해서 26 세에 나를 낳았고 스물아홉이면 내 나이 당당한 4 살이다.
동생은 20XX 년 11월 3일 군에 갔다. 내가 고3에서 대학 진학할 무렵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엄마 아빠는 부부지만 형식상 부부고 거의 하루 종일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지냈다.
보민은 학교에서 편집부장도 했고, 공부도 상위 1% 안에 들었고, 대외 봉사로 국회의장 상도 받은 경험이 있어 수시로 S 대학교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금이 없어서 외가에 부탁해도 안 되고 친가는 이미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동생 종우는 중2에서 학업을 포기했다. 그녀는 대학을 못 가더라도 종우는 대학을 보내려고 고졸 사회 초년병이 되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의류회사였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원단을 시장조사하고 남자직원과 원단을 사 오는 일을 했다. 대졸은 대졸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일을 하고 월급 230 만원을 받을 때 나는 130 만원을 받았다. 그것도 4 대 보험 공제하고 나면 그녀가 수령하는 금액은 120 만원 정도였다. 돌아다니다 보니 구두가 불편해 운동화를 신었더니 왜 운동화 신고 출근하느냐고 지적을 받았다. 시장조사를 하는데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발이 아파 운동화 신었다고 하니 운동화를 회사에 하나 두고 출퇴근은 정장으로 구두로 하라고 했다. 의류회사를 11 개월 다니고 나니 재계약을 하면 퇴직금을 주어야 한다고 해고를 했다. 나는 11 개월 일하고 백수가 되었다.
두 번째 찾은 직업은 신발회사였다. 회사가 아니라 신발 판매 매장이었다. 여기도 11 개월 일하고 또 해고되었다. 그다음 간 곳은 00 건설 회사였다. 건설회사 경리직원인데 총무를 봐야 했다. 어떤 때는 먹줄 작업하는 공사과장의 조수가 되어 줄자와 먹줄 시작점을 잡아주는 일을 했다. 먹줄 잡아주어 일 빨리 끝났다고 소장이 과장과 일찍 나가라고 했다. 좋다고 나왔는데 그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김포 공사 현장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소장이 벤츠 중고차량을 몰고 와서 타라고 했다. 차는 한강변을 한참 달려 산속의 흑염소, 토종닭을 하는 음식점으로 왔다. 소장과 공사과장, 보민, 소장의 애인이라는 조선족 여자가 일행이었다.
소장과 애인이 나란히 앉자 보민은 과장 옆에 앉게 되었다. 공사과장은 나이 40 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토종닭이 나오고 소주 한잔 두 잔 마시자 남자 본색을 드러냈다. 소장이 지 옆에 앉은 애인을 젖가슴을 주무르자 과장도 보민 허락도 없이 손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보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하러 회사 취직했지 술시중 들러 온 거 아닙니다. 보민이 현장을 스마트 폰으로 현장 사진을 찍었더라면 고발할 수도 있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건설 현장서 며칠 경험이 돈은 못 받아도 소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전화가 그렇게 무거운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제갈 상길은 그 무거운 안전화를 9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고 일당벌이를 하면서 보민 종우 남매에게 돈을 보내주었다.
세 번째 찾은 회사는 약품관리 회사였다. 300여 개 약품 이름과 같은 이름이라도 용량 크기에 따라 박스처리 해서 병원이나 약국으로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내가 일이 아닌 구청 위생과의 검열 나온다고 나보고 검열관 안내를 하라는 것이었다. 말이 안 내지 접대라는 것을 짐작했다. 여기서도 한 달을 못 넘기고 그만두었다.
현재 근무하는 곳은 상표와 저작권 업무를 하는 곳이다. 회사 대표 겸 사장, 부장, 과장, 대표의 여동생 기옥 언니가 대리 나머지 나처럼 평사원은 여자 3 명, 남자 2 명이다. 기옥 언니가 회사일 마치면 가영 씨는 바로 퇴근하지 말고 남으라고 했다. 보민은 화장실에서 상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기옥 언니가 오늘 퇴근 말고 남으라는데 왜일까요?”
“글쎄, 너 최근 회사 일 잘 못한 거 있거나 곧 1 년이 되어가니 퇴직금 안 주려고 11 개월 차에 해고 통지하는 건지 모르겠다.”
“웬 지 좋은 일은 아닌 느낌인데?”
“회사서 돈 벌기 쉬운 일 아니다. 하지만 해고되어도 거기 부장, 과장, 대리 보다 네가 경제적 어려움 빼고는 훌륭하고 나이 젊은것이 너의 재산이라 여기고 회사 나와.”
“내가 뭐 훌륭해?”
“야,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이건희 회장이 누가 제일 부러울 거 같아?”
“아하, 건강?”
“그래 건강한 청춘은 돈으로 1 조원으로도 살 수 없는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기옥언니 뭐라 해도 생긋 웃으면서 대해.”
“예.”
보민은 저작권 관련 회사를 그만두었다. 상길의 짐작대로 그녀에게 퇴직금 주는 것 아끼느라 11 개월에 보민을 해고한 것이다. 다시 백수가 되었다. 고용노동부의 워크 넷, 사람 인, 잡 코리아, 알바 몬 등에 이력서를 다시 작성해 올렸다. 총무사원 한 곳에서 면접 연락이 왔다.
“왜 우리 회사를 지원했어요?”
“제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습니다.”
“세금관계 잘 알고 액셀 잘 다루어야 하는데 가능해요?”
“예, 제가 이력서에 구질구질 다 기록 안 했는데, 법무사 사무소에도 일했었고, 약품 도매상에서 재고관리도 해서 엑셀 잘 다룹니다.”
“만약 우리 회사 합격 후 2 개월 후에 우리 회사보다 월급 20 만원 더 준다는 회사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없는 사람에게 월 20만 원이면 큰돈인데, 20 만원에 회사 바꿀 만큼 천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왜 천박해요?”
“돈 20만 원에 회사 이동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20만 원을 너무 우습게 아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20만 원이면 자장면 40그릇입니다. 큰돈이지만 어려서 부모님으로부터 돈은 소중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으로 되는 것이 있고 돈으로 안 되는 것을 구분 잘하라고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예, 돌아가시면 합격여부는 내일 문자로 알려드립니다.”
다음 날 문자가 왔다. 합격을 축하하며 주민등록 등본, 초본, 사진 1 매, 급여통장 사본을 지참해서 출근하라고 했다. 다니던 저작권 관련 회사를 그만두고 새롭게 총무사원이 된 것은 두 남자 때문이다. 내 나이 29 세에 띠 동갑인 41 세 남자와 사귀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띠 동갑 박영일 부장이라는 사람이 회사 내에서 노골적으로 내 책상에 꽃도 놓아주고 외근 때는 꼭 동행자를 나를 지명했다. 회사에서 외근이라는 것은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상표위반 저작권 위반을 인터넷에서 걸러낸 것을 실제 시장에서 위반하는 증거를 잡아내는 것이기에 내 얼굴을 알 수 없게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도 하나 헐렁한 것을 푹 눌러쓰고 가격이 비싸지 않은 것은 현금으로 구매하고 현금 영수증을 받으면서 시간을 끌고 스마트 폰으로 현장 배경을 촬영했다. 그러니 어설프게 하다가 걸리는 날에는 현장에서 욕을 먹고 심한 경우는 멱살을 잡히는 일도 있다. 당신이 단속 경찰이냐? 공무원이냐? 신분증 제시하라고 하면 꼼짝없이 죄송하다고 하고 현장을 빨리 이탈해야 했다. 박 부장이 보민을 외근 파트너로 데리고 가는 이유는 외근 단속 증거를 확보하고 나서 수고했다고 저녁 식사를 하고 술도 한잔 하면서 그녀를 한번 데리고 놀고 싶어 하는 것임을 뻔히 알지만 그놈의 돈 때문에 꾹 참으면서 일했다.
한 번은 단속이 아니라 회사 대 회사의 미팅에 나를 대동했다. 우리 회사에게 많은 일감을 주는 14 K 귀금속제품 회사 사장을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 그 회사 미팅 룸에서 공식적인 미팅을 마치고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암소 한 마리를 저녁 식사로 하고 소주도 마셨다. 2 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회사일로 여기 회사에 와서 미팅을 하고 저녁을 먹은 것으로 말단 평사원의 책임은 다한 것이다. 나는 퇴근을 하겠다고 퇴근을 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을 하니 대표이사의 얼굴이 표정이 늙은 호박처럼 푸석푸석했다.
“제갈 보민 씨?”
“예?”
“어제 미팅 잘했어요?”
“잘했습니다. 암소 한 마리 사줘서 잘 먹었습니다.”
“잘했는데 들어왔던 오더가 취소되었어요?”
“아닌데, 미팅에서 분명히 다음 달도 자기들 상표 도용하는 거 계속 추적해서 통보해 달라고 했습니다. 박 부장님도 들었습니다.”
“여기 메일을 읽어봐요. 그동안 단속 감사합니다. 회사에 사정이 생겨서 다음 달은 귀사의 의뢰한 것을 취소합니다. 미안합니다. 보여요?”
“예, 하지만 낮에 회사에서 미팅할 대는 분명히 거절의사 없었습니다.”
“하여튼 박 부장하고 제갈 보민 씨가 미팅 가서 들어왔던 오더를 물거품 만들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각오하세요.”
“책임이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단속 나가면 내 얼굴 알아보고 나가라고 하는 회사도 있는데, 이 회사 오래 다닐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잘 되었군요. 내일 제 개인사물 다 빼겠습니다. 이번 달 월급 오늘 근무까지만 시급으로 정산해 주세요.”
여자 직원을 노래방 도우미로 착각하는 일부 남자들 때문에 회사를 1 년 이상 다니기 힘들었다. 회사에서 교묘하게 퇴직금을 안 주려고 11 개월 부려먹고 12 개월 차에 해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노래방 도우미가 싫어서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보민이 사귀는 남자도 그녀와 디 동갑이었다. 그는 보민에게 회사의 박 부장을 어떻게 알고 박 부장 조심하라고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여의도 KBS 방송국 근처의 무지개 스튜디오다. 당시 보민은 주식회사 한복나라에서 주최하는 한복 홍보대사 선발에 출전했다. 그녀가 다니던 연기 학원에서 3명이 한복 홍보대사에 출전했다. 그때 차윤택이 공익 광고 촬영감독이었다.
대길연기학원에서 남녀 2 명이 여의도 무지개 스튜디오서 촬영을 했다. 보민은 감독이 하라는 대로 남자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유 감독은 촬영을 했다. 촬영을 마치고 나 혼자 갈 수가 없어 다른 사람들 촬영이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조감독이 메모를 가지고 나에게 왔다.
“제갈 보민 씨 감독님이 보자고 합니다.”
“예?”
메모를 들고 감독에게 갔다.
“감독님 찾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제갈 보민입니다.”
“반가워요, 제갈 보민 양!”
“무슨 일이신지요?”
“무슨 일은 아니고 저녁시간 되었으니 식사나 하자고 불렀어요.”
“예. 감사합니다.”
여의도 ‘일송정’이라는 한식집은 방과 방 사이에 파티션 작업을 해서 방에서 식사하는 일행이 다른 일행을 볼 수 없게 꾸몄다. 감독과 나는 맥주와 소주를 시켜서 소맥을 만들었다. 감독과 초면인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개구쟁이 동생 제갈 종우와 얼굴이 비슷했다. 앞니가 토끼 이빨처럼 넓적한 것도 비슷했다.
“보민 씨, 촬영 처음이죠?”
“예, 그렇습니다.”
“처음 치고는 너무 차분하게 앵글에 비치는데, 얼굴이 자연 미인이더군요.”
“예, 저는 쌍꺼풀도 아빠, 엄마 두 분 다 쌍꺼풀이라 자연산입니다.”
“예, 요즘은 성형수술 안 한 사람 찾기가 힘들어요.”
“정말 보민 양은 그 몸 그대로 자연으로 유지 잘해요.”
“예, 감사합니다.”
“자, 식사합시다.”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훌륭한 촬영을 위해 축배 한잔 소맥으로 합시다.”
“예.”
“제갈 보민 양 좋은 촬영을 위하여!”
“위하여!”
소맥 한잔을 하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예고 없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비명소리도 지를 수 없었고 숨만 할딱할딱 쉬었다. 이어 네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더니 내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내 젖꼭지를 만지작거렸고 내 꼭지는 탱탱해졌다.
식당을 나가 바로 여의도 한강이 잘 보이는 모델의 반 하나를 잡았다. 첫 만남에서 그는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아니, 그녀가 차 감독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했어도 첫 만남인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고, 끌리는 이 남자 뭐지? 보민 나이 서른둘. 여자나이 계란 한 판에 두 살을 더한 나이다. 엄마에게 넌 어떻게 된 애가 이 나이 되도록 남자 하나 변변히 만나는 일 없냐? 핀잔의 소리를 들었는데, 이 남자 나에게 청혼을 해 오면 엄마에게 인사시켜야지. 혼자만의 착각일까?
동생 종우는 20XX 년 11 월 3 일 입대하여 20XX 년 8 월 2 일 전역했다. 남들 다 가는 군대 뭐 동생 군대 이야기냐? 하는 사란도 있겠지만 아버지 직업이 군인이라 나나 종우나 어린 시절을 군인 아파트, 군대 관사에서 보냈기에 남매는 엄마, 아빠라는 단아 다음으로 배운 말이 ‘충성!’이다.
군인 아저씨들이 아침마다 구보를 하고 군가를 부르고 우리 집에 오면 아빠에게 충성! 하면 아빠도 충성! 하거나 손만 올렸다. 가끔 장관 후보자 국회 청문회에서 군대 미필이거나 꽃보직 이동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아빠는 저런 놈을 공직에 그것도 장관에 앉힐 만큼 이 놈의 나라에는 그렇게 인물이 없냐? 한탄했다. 가수 유 승준 같이 병역 기피 목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은 영원히 한국 입국을 통제해야 한다고 했다.
종우는 과체중이다, 키는 185 cm인데, 몸무게가 100 kg이었다. 00 사단신병교육대에 11 월 3일 입소하고 군의관이 체중초과니 귀향 조치한다고 하자 군의관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흐리면서 신병교육 기간에 체중 줄여 현역 규정에 맞게 하겠다고 그때도 체중이 안 줄면 귀향하겠다고 해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신병 훈련 600여 명 중에 사격 훈련에 20발 명중한 사람은 5명인데, 그중 한 명이 종우였다. 초등학교 시절 한국교육에 맞지 않는 아이라는 소리 들었는데 그 거구가 사격 만점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지만 사실이었다. 그 증거가 신병교육 수료식에 가니 엄마와 나에게 신병교육 우수수료 표창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표창장이 근거가 되어 표상휴가를 이등병 때 나왔다. 종우는 주특기 통신을 받았다. 00사단 포병연대 낙석대대 본부중대 통신병이었다. 제주도에서 건설일용직으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종우가 카카오 톡으로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 아버지 예비역 소령인데 군대 오니 소령이 높은 계급인 줄 알게 되었어요.”
“이병이 보면 높지만 예비역 소령들 대부분은 불만이 많다.”
“주특기 통신입니다.”
“통신이면 자대 가면 무조건 시간 날 때 음어 미리 외워라. 음어 못 외우면 통신병 어디 가나 고역이다.”
“음어 아무나 볼 수 없어요.”
“그러니까 상황 근무 때 장교에게 부탁해 한부 꺼내서 상황을 보면서 음어 써 보고 외우고 음어 쓴 종이는 반드시 세 절하 거나 태워 흔적을 없게 해.”
“예, 잘 알겠어요.”
아빠의 조언대로 동생은 이등병 시절에 음어를 외웠다. 이등병에서 일병이 될 무렵 사단 음어대회가 개최되었다. 사단 음어 대회에 낙석부대에 대표로 이등병 강 종우가 뽑혀 사단 대회에 갔다. 다들 병장이거나 상병이 수두룩한 상태에서 이등병이 당당하게 1 등을 했다. 완전 사단 창설 이래 이등병이 음어대회 1 등은 처음이라고 사단장이 표창수여는 직접 수여했다. 또한 우수자 금, 은, 동상 수상자는 점심시간에 사단장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영광을 얻었다. 부상으로 사단장 서명이 들어간 시계를 받았다. 엄마와 나에게 휴가 나와서 시계 자랑을 했다.
“엄마 이게 사단 음어대회 1 등 해서 받은 부상이야.”
“어머나, 어떻게 음어 이등병이 1 등 했어?”
“건설현장 일하는 아버지에게 카카오 톡으로 코치를 받았지.”
“어떻게?”
“처음 통신병이라고 문자 보내니 미리 음어 외우라고 해서 상황 근무 때 상황장교에게 부탁해 음어 꺼내 연습해 음어 외우고 다 외웠다고 문자 보내니 그럼 아버지, 어머니 음어로 보내봐 하시더군.”
“그다음은?”
“애국가를 음어로 보내라고 하셔서 그건 어렵다고 하니 음어 조립 분야 해역 분야 다 외우고 나면 군가를 음어로 써보라고 하시더군. 군가를 백지에 음어로 썼어.”
“그래서?”
“음어로 군가 6 곡을 음어로 쓸 수 있어요 했더니 네가 쓴 음어를 네 토막 내서 토막토막 한글로 고쳐봐 하시더군.”
“그랬더니?”
“애국가 1 절부터 4 절까지 해보라고 해서 그것도 연습해서 해봤다고 했어.”
“그다음은?”
“마지막 난코스라고 하면서 괄호 ( ), < > &, *, $ 특수 문자와 역괄호 ) (
> <, 단어도 아닌 말 문장이 이어지다 끊어진 말을 연습해 보라고. “
“그다음은?”
“그 정도면 입상은 한다. 1 등을 하려면 실력이 아니라 강심장이 필용해 하면서, 강심장이란 내가 외운 실력에 대한 믿음이야. 사단대회 선수쯤 되면 각자 부대서는 다 한가락하는데 사단 대회 나오면 떨려 아는 음어도 맞았는지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답을 쓴다. 넌 손가락 일체 사용 한하고 답 쓰면 1 등을 한다고 하시더군.”
“그다음은?”
“더 연습할 거 없어요? 했더니 국방일보에 난 대통령 연설문이나 음어로 연습해 봐. 통으로 다하진 말고 100 단어 씩 끊어서 해봐.”
종우는 아빠의 조언대로 연습했다. 사단 음어대회에 정말 국방일보 대통령 연설문 연습을 한 것이 효과만점이었다. 음어 시험에 김 정은, 핵 포기, THAAD, 평화통일, 남북의 공동발전,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 등등 연습한 것이 음어시험 절반이나 출제되었다.
종우는 속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하마터면 아 싸! 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단 음어대회에서 1 등은 낙석부대 창설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부대장과 주임원사 대대 전 장병의 축하를 받았다. 아울러 부대에서 부대장을 포함한 간부들이 종우를 부사관 지원하게 아니 지원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엄마도, 혼자 사시는 아빠도 나도 종우를 부사관을 해서 군대에 머물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결국 종우는 부사관 권유를 거절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의 길을 택했다. 5 일간의 포상휴가를 나왔다. 일병, 상병, 병장을 달고 20XX 년 8원 2일 전역을 20 여일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누나? 나 휴가 나왔다.”
“어서 와 동생!”
“누나, 군대 부사관 지원 안 하길 천만다행이야.”
“왜?”
“나 이번 휴가 마치고 복귀하면 징계위원회 회부할 거래.”
“왜?”
“나보다 한 달 선임병이 있었어. 그런데, 전역하기 전에 전역 빵을 한다고 나보다 후임들이 모포를 뒤집어씌우고 때렸거든. 그걸 전역해서 부모들이 국가인권위원회와 청와대 민원실로 민원을 올린 거야. 사단 헌병대서 실사조사 나오고 조사결과에 내 후임 병 가담자는 바로 헌병대 구속이고 나는 자대 징계할 것 지시 내려왔어.”
“아니 네가 왜?”
“최고선임으로 방조 죄래.”
“그래서 아빠가 군대는 내 잘못으로 처벌받는 경우보다 다른 사람 잘못으로 처벌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나 봐?”
“군대 가기 전에는 아빠 말을 이해 못 했는데, 가끔씩 던진 아빠 말이 군대서는 진리야.”
“그래서 아빠가 너 부사관 지원을 말했을 때 반대하신 거지?”
“난 군대서 철이 들었는지 전역할 때 군대 충성마트에서 통신소대장 명의 빌어 양주 한 병 사가려고.”
“술은 왜?”
“아빠 맨 싸구려 소주, 막걸리만 마시는데,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급의 술 한번 마시게 하려고. 군대 가서 느낀 건데 우리 가정법원에서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랑 살고 싶냐? 판사가 물은 거 기억나?”
“너랑 나랑 모두 엄마하고 살고 싶다고 했지?”
“그거 잘한 말일까?”
“잘하고 못하고 가 어디 있어? 우리는 어렸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데. 그게 왜?”
“요즘, 아니 군대 입대하고 훈련받는 기간에 우리가 가정법원 간 일이 꿈에 나타났어. 가정법원 판사가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와 살고 싶어요? 하는 질문에 누나는 엄마, 나는 아빠라고 대답했어.”
“그건 네가 아빠 그리워하는 생각이 꿈에 그렇게 나타난 거야.”
“나 전역하는 날 아빠 근무 마치고 쉬는 날 택해 우리 집에서 수산시장에서 횟감 사다가 회와 매운탕으로 오랜만에 4 명이 식사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하면 오시겠어? 차라리 밖에 음식점서 먹자고 하지?”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야. 아빠가 이혼당하고 엄마랑 다시 마주 앉아 식사하자면 오실까. 안 오시면 따로 엄마랑 전역 축하 식사하고 날 잡아 밖에서 아빠랑 식사해야지 뭐.”
“어머, 내 동생 개구쟁이가 어른 다 되었네?”
“그럼, 나도 이제 8월 2일이면 예비역 병장 제갈 종우다.”
“정말 군대가 사람 철이 들게 한다더니 널 보니 그 말은 맞는 거 같다.”
“뭔 소리야? 난 군대 가기 전에도 철이 들었어.”
8 월 2 일 낙석부대 제갈 종우 외 3 명의 병장들은 대대장 신고를 마치고 문산 역에서 양평까지 가는 경의 중앙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종우는 용산 내려 파란색 5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림동 집에 도착했다.
의무복무 군대생활도 지겨워 죽겠는데 아버지는 21 년을 아버지는 어떻게 참고 지내셨나? 아버지의 인내심을 존경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 최 성현 여사는 양재동의 모 한의원에 간호조무사로 출근했고, 나는 취직 상담을 하러 고용노동부 관악지사에 왔다. 텅 빈 집에 종우는 무거운 군화를 벗어 검은 비닐에 넣어서 신발장 맨 위에 놓았다. 올해는 전역 1년 차라 동원이 면제되니 내년 동원예비군 훈련통지서 올 때까지는 군화 신을 일이 없다. 군복과 러닝 팬티를 세탁기에 넣고 전원 버튼 누르고 잠시 후 동작 버튼을 눌렀다. 윙 철썩하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면서 방청소를 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빨래 한번 안 하던 녀석이 제대하고 자기 군복과 속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세탁기 돌아가는 시간에 방청소를 한다는 것은 그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가 텅 비어 있고, 밥은 언제 해 먹었었는지 밥솥에 밥이 누렇게 굳어 있었다. 일단 밥솥을 꺼내 개수대에서 물을 가득 받아 밥알을 물에 불게 했다. 청소를 마치고 세이브 마트에 가서 라면과 반찬거리 몇 종류를 샀다.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종우는 밥을 하고 반찬도 준비했다. 나도 고용노동부 관악지사서 상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엄마도 직장에서 퇴근을 했다.
“종우야, 전역 축하해!”
“아들, 전역 축하해!”
“누나, 아빠는 오신다고 했어?”
“전화하니 아빠 근무 마치는 시간에 근무교대 들어오는 아저씨가 장염으로 병원을 가서 오늘이 아빠 근무일이 아닌데 계속 근무 서는 중이래.”
“그럼, 아들 전역하는 날 술 한잔 약속 못 지키는 거네?”
“아니야, 장염 치료하면 바로 근무 교대 해주고 아빠 오실 거야.”
“누나, 그런데 24 시간 근무 24 시간 휴무 노동법 위반 아냐?”
“엄격히 말하면 8 시간 근로규정 위반이지 그런데 경비직 3 교대하면 인건비 너무 나간다고 24 시간 맞교대로 뽑고 경비들은 약자니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그냥 근무를 하는 거야.”
“오늘은 엄마, 나랑 누나 셋이서 내 전역 축하주 마시고 아빠 쉬는 날 다시 하지 뭐.”
“그래. 그렇게 하자. 엄마, 뭐 해? 아들 전역 축하 한 말씀해야지?”
“자, 잔을 들어주세요. 아버지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정상 못 오는 양반은 빼고 우리끼리 제갈 종우 전역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4 식구 밥 한번 먹기 정말 힘드네!”
“다 운명이라고 생각해.”
“아쭈구리~~ 군대 제대했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는데.”
“누나 원래 내가 좀 생각이 깊고 항상 파닥거리며 앙앙거렸어.”
“야, 너 기억나니 가납 초등학교 금붕어 사건?”
“기억나지, 아이 끔찍해.”
“엄마 학교 불려 가서 종우는 한국교육제도에 맞자 않는 아이 소리 들었지?”
“아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담임 송미정 선생 얼마나 독종인지 우리 초등학생을 완전 군인 다루듯 선착순 시키고 오리걸음까지 시켰어.”
“너 그런 거 초등학교서 마스터해서 군대 신병교육 잘 받은 거 아녀? 선생님께 고맙다고 해야겠다.”
“누나 군대 한 번은 의무니까 가지 두 번 가라고 하면 나도 유승준처럼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종우야, 너 말년에 영창을 간다는 소리 듣고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영창 안 가고 전역한 것은 고맙지만 나는 낙석부대 불 질러버리고 싶다니까?”
“왜?”
“내가 그 부대에 기여한 것이 얼마인데, 내 선임 제대한다고 후임들이 모포 씌워 놓고 몇 대 두들긴 것이 뭐 그리 큰 죄라고 나를 영창을 보내려고 해?”
“군대 규정이 그러니 그렇지?”
“규정? 계급 높은 인간들이 규정을 더 어겨, 봐봐 국방부 장관 후보자도 중령시절 음주운전 무마하고 대장까지 진급하고 국방장관 한다고 나왔지? 지들이 더 규율 어기고 아랫놈들만 잡는 게 군대야.”
“야 다 잊고 이제 전역했으니 사회생활 잘해?”
“그래, 이 좋은 날 좋은 말만 하자. 아들 전역 축하한다. 위하여!”
“위하여!”
엄마, 종우, 나 셋이 건배를 몇 번 외치고 나니 문밖에서 보림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에 나가니 아빠였다. 대퇴부 골절로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양손에 물건을 들고 오신 것이다. 미리 전화를 했다면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가는데 전화도 없이 바로 오신 것이다.
“종우야, 엄마 아빠 오셨어!”
“아버지 전역인사 드려요.”
“그래, 군대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뭐 똑같이 하는 건데요?”
“너 말년에 영창가게 되었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때 엄마가 끼어들었다.
“제갈 상길 씨 인사나 합시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소? 최성현 여사?”
“나 이제 최성현 아니거든요, 최미정라고 해 봐요?”
“최....... 미....... 정.......”
“최성현이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으로 너무 무거워서 내가 힘들게 살아온 거래요. 이제 영경으로 바꾸어 잘 풀린다고 해요.”
“그래, 이름 중요하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심성이야.”
“엄마, 아빠 오늘은 종우 전역 축하하는 날이니까 종우를 주목해 주세요.”
“그래, 아들 군대생활 얼마나 힘들었니?”
“군대생활 힘든 것은 다 같이 겪는 거라 참을 만했지만 마지막 전역 직전의 징계위원회 회부는 정말 분했어요.”
“징계위원들이 뭐라고 하든?”
“ 영창 5 일 결정을 대대장이 결재에서 근신으로 경감시켜 주었어요.”
이때 엄마가 말했다.
“야, 종우야 너 내 아들이지만 너무 한다. 너는 잘못이 없고 부대 간부들이 멍청하다고 하는데, 내가 행정보급관에게 전화통화 할 때는 대대장은 이미 너를 8월 2일 전역하는데 문제없게 하려고 마음을 굳혔는데 네가 엄마에게 아빠에게 메신저를 날려 문제가 커진 거래.”
“엄만 행정보급관 말을 믿어?”
“믿지?”
“부대 간부 놈들은 훈련 때 컵라면이 아니라 봉지라면 안 먹은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지들은 몰래 배낭에 버너 준비해서 라면 끓여 먹고 나는 충성마트서 컵라면 먹은 것도 문제 삼고 그게 규정준수야?”
“너 라면뿐만 아니라 휴가 나와서 독립기념관 다녀온다고 휴가 더 쓰고 독립기념관도 안 갔다고 하더라.”
“갔어!”
“간 건 병장 때 간 거고 그전 상병 때 안 갔다고 하더라.”
“나 참, 독립기념관 갔는데, 차가 막혀 도착하니 개방시간 끝나서 천안까지 전철 영수증, 천안에서 독립기념관 버스 영수증 그날 거 냈으면 된 거지 뭐가 문제야?”
“독립기념관 안에 들어가야 간 거지?”
“그럼 나보고 다음 날 독립기념관 구경하고 휴가 복귀 하루 늦게 하라고?”
“아니, 시간 활용 잘해서 문을 닫기 전에 독립기념관 갔어야지 하는 소리야?”
“정말 너무 하네! 에이 씨 내가 이래서 군대 전역 안 하고 말뚝이나 박는 건데.......”
“종우, 넌 병장도 힘들게 전역한 놈이 무슨 말뚝이야?”
종우가 8 월 2 일 전역인데 7 월 26 일 대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징계위원장은 부대대장 문 상옥 소령이고 위원들은 대대의 상사, 원사들 5 명으로 구성했다. 표결결과 영창 5 일로 결정이 났다.
“비행인 병장 제갈 종우는 선임인 전찬수 병장의 전역을 앞두고 후임 병사들이 배 병장을 모포로 씌우고 무차별 폭행을 묵인했지요?”
“예.”
“비행인은 복도로 나가 대기하기 바랍니다. 위원들은 무기명 징계 형량을 기입하여 함에 넣기 바랍니다.”
“징계 결과는 영창 5일이 최다 득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엄마와 종우의 말다툼에 아빠가 끼어들어 중재를 했다.
“됐다. 종우 병장 전역했으면 되었고 더 이상 군대 징계위원회 말은 하지 말거라. 군대는 군대야. 한번 다녀왔으면 끝나는 거야. 이제는 사회에서 제대로 취직하고 의, 식, 주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난 이만 가겠다. 잘 있어.”
연영애는 5 공주집 맏딸이었다. 순서대로 영애, 영미, 영자, 영숙, 영옥가지 딸 다섯에 아내 문화자까지 여섯 명의 여자에 남편이고 아버지 연선흠 혼자 남자였다. 선흠 자신도 외아들로 컸는데, 최소한 아들 형제는 두겠다는 결심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험이라면 열심히 해서 도달하지만 아들은 맘대로 안 되었다. 술만 마시면 아내에게 아들 하나만 만들자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문화자는 ‘당신 생물시간에 졸았어? 2세가 아들이고 딸 되는 건 여자책임 아니야, 남자 정자의 염색체가 X가 결합하냐? Y가 결합하냐? 는 순전히 남자 책임이라고?’ 조선사대는 그걸 몰라 여자가 칠거지악으로 쫓겨나지만 요즘 누가 아들 날 때까지 딸을 다섯이나 나요? 이 문화 자니 애국하는 심정으로 자식 세 명 이상 낳았지?’
선흠은 문화자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197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추위를 핑계로 그는 화작에게 이불속에서 슬슬 작업을 했다. 오랜만에 접근이라 화자도 옷을 벗었고 그를 받아들였다.
화자는 임신을 했고 한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느니, 수박을 먹고 싶다느니,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다. 겨울에 수박과 딸기는 못 구해도 순대는 바로 구해다 주었다. 그렇게 임신을 하고 겨울이 지나고 여름을 보내고 아기가 태어났다. 아들을 학수고대했으나 딸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름을 사내남을 넣어서 ‘옥남’‘부남’으로 지었다. 언니 5명은 ‘영’ 자 돌림으로 지었고 막내는 ‘남’ 자 돌림 쌍둥이 자매였다. 영애는 5 공주집 맏딸에서 7 공주집 맏딸이 되었다. 영애와 막내 쌍둥이와는 10살 차이가 났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된 가산동 770번지 사거리 목 좋은 곳에 ‘7 공주집’ 식당을 운영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휴일에는 낮부터 큰딸들이 식당일을 거들었다. 7 공주집은 장사가 잘되었다. 돈을 벌어 식당을 전세로 하던 것을 전세금을 빼고 벌어놓은 돈을 보태서 대방역에서 여의도 건너가는 길목에 ‘소문난 7 공주집’으로 간판을 변경해서 식당을 했다.
영애는 J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취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같은 대학교 유아교육과 평생교육원을 이수하고 유아교사가 되었다. 서울에서 공립유치원교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충청북도로 지원했다. 유아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첫 발령을 받은 것이 충북 진천군 능암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제갈 상길은 198X 년 3월 4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광주 초등군사반 교육에 입소했다. 재수가 없다 보니 유격을 상길이 속한 6중대부터 받게 되었다. 항상 군대는 1,2,3, 건재 순으로 모든 일을 하였으나 그해 초등군사반 중대장, 교관 구대장들이 하도 자기주장이 강하다 보니 교수부장 김홍기 준장이 야, 시끄럽게 말 많이 하지 말고 유격 순서는 중대장들이 사다리를 탄다. 그 한 마디에 1중대부터 9중대까지 중대장이 사다리를 탔다. 6 중대장 백경열 대위가 1번을 뽑았다.
동복유격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인솔하는 교관이 중간에 오리걸음도 시키고, 적 포탄 낙하도 시키고 힘겹게 유격장에 도착했다.
140 미터 활강활차가 설치된 도하 훈련장 교관은 조경수 중위였다. 어떻게 장교가 되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작은 키의 조경수 중위는 올빼미 중에서 제갈 상길을 지명했다.
“49번 올빼미?”
“유격! 49번 올빼미!”
“49번 올빼미 애인 있습니까?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샛강 건너 여의도에서는 ‘국풍 81’이라는 전무후무한 국가주도 어용축제가 열렸다. 제갈 상길은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연영애는 흑석동 J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1학년, 영애의 단짝친구 김미자가 만났다. 미자는 대방여중, 서울여고 6년 동안을 같이 다닌 친구이고 대학을 연세대학교 국문과나 영문과 어디를 원서 내도 합격할 실력인데, 부모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지명도 SKY에 떨어지는 J대학교 국문과에 4년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다. 그 장학생에 학보사 기자도 합격을 했다. 학교 측에서 4년 장학생이 학보사 기자가 되었으니 이중 장학금 줄 수 없다는 것을 학보사 지도교수와 상담하고 장학금 반만 기자활동비조로 받게 해달라고 해서 그녀는 4년 대학등록금 걱정, 생활비 용돈 품위유지비를 한 번에 해결했다.
김미자는 영애가 ‘국풍 81’ 구경을 가자고 했을 때, 거절을 했다. 영애는 자기가 사귀는 남자 제갈 상길의 남자로 됨됨이 좀 파악해 달라고 말을 바꾸자 그녀는 중고등학교 6년 지기의 애인이 남자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 매력 감별사 자격으로 여의도에 온 것이다.
여의도는 인산인해였다. 행사를 주관하는 K.B.S 는 ‘국풍 81’을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우리 국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연일 방송을 했지만, 그 이면에 지난해 5월 27일에 ‘5.18 광주사태’ 최종 진압을 하였기 때문에 그 1주년이 되자 전국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데모할 것을 염려하는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처한 것이라고도 했다. 국풍 81에 지방에서만 알려진 음식이 전국적 인기음식이 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충무김밥이다. 뱃일하는 사람들이 고기를 잡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간단히 정식 김밥으로 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김에 밥만 싸고 반찬은 바닷가에서 쉽게 구할 것으로 버무려 먹던 것을 여의도에 선보였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제갈 상길, 연영애, 김미자 3인도 충무김밥 4인분을 사서 막걸리와 함께 여의도에서 대방역을 바라보며 샛강 나무그늘 아래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영애가 상길에게 미자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상길 오빠, 저랑 대방여중, 서울여고 함께 다니고 대학까지 J대 동기가 된 김미자예요. 미자는 학보사 기자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제갈 상길입니다.”
“어머나, 부산 사나이세요? 우리 아빠가 부산 사나이라서 무뚝뚝하다고 넌 절대 부산 남자 만나지도 마라 했는데, 상길 씨는 부산 사람치고 말투가 부드럽군요?”
“아 예, 제가 부산학생이지만 집은 경기도 김포입니다. SKY를 갔으면 좋겠는데, 합격할 자신은 없고 부모님이 재수는 없다. 합격하면 대학 등록금 대주지만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고 하여 학비 저렴하고 평판 좋은 곳 부산대학교에 갔습니다.”
“어쩐지 억양이 부산 억양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그런 사연이 있군요?”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충무김밥을 세 개 먹더니 미자가 돌발 질문을 했다.
“상길 씨와 영애 넌 국풍 81을 어떻게 생각해?”
“좋지요? 언제 우리가 이렇게 통행금지 없이 놀아본 적 있나요?”
“영애 넌?”
“나도 좋아?”
“상길 씨에게는 초면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떻게 좋다고 하세요?”
“그럼 나빠요?”
“나쁜 정도가 아니지요?”
“왜 나빠요?”
“작년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요?”
“5.18 광주사태?”
“거기서 학생과 민간인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아요?”
“신문과 TV이 뉴스에 보도되었지만 그 숫자는 믿을 수 없어요?”
“그래요,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숫자로 사망자 발표하고 1년이 되어 고인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가 우선이지, 국민들과 의식이 깨어있는 대학생들의 눈을 멀게 하려고 ‘먹고 마시고 놀자.’ 판으로 국가가 국민이 낸 세금을 퍼부어 이 굿판을 한다는 것이 한심하다 생각 안 들어요?”
김미자 학보사 기자의 그 말에 상길과 영애는 할 말이 없었다. 숙연해졌다. 김 기자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1980년 광주사태에 희생된 피가 몇 말인데, 광주시민들이 5월만 되면 밥맛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고, 정부의 발표 앵무새처럼 조잘대는 아나운서를 패 죽일 만큼 독이 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걸 어떻게 위로해 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3 S(Sex, Sports, Screen) 정책과 더해서 ‘국풍 81’을 기획한 놈이나 대통령이나 수준이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고 했다.
김미자 기자 말에 의하면 전두환 정권의 실세 ‘쓰리 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중 한 명인 허문도가 이걸 기획했다고 했다.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있으면서, 쓰리 허 중에서 허문도와 허삼수는 육사 출신인데, 자기는 서울대 출신이라 뭔가 육사출신에게 밀리지 않을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것이 ‘국풍 81’이었으며 전두환에게 보고하니 전두환이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잘해봐!’하고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이에 고무되어 허문도는 자신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했다고 후배들을 국풍 81에 참여시키기로 작정했다. 과대표들과 농악대 동아리 대표를 만나 선배로 술을 사주면서 부탁을 했다. 허문도의 말을 들은 과대표와 동아리 대표들 반응은 싸늘했다. 개인적으로 선배님과 허심탄회한 술자리는 좋았으나, 광주의 피를 흘린 1주념 주도를 경건하게 해도 모자랄 시국에 먹고 마시고 춤추자 판에 명색에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서울대학교가 ‘국풍 81’에 적극참여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재학생들에게는 술을 사주고 부탁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한 허문도는 플랜 B를 가동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재학생이 아닌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공무원 중에서 하위직 젊은 사람과 군대 복무 중인 사람을 찾았다. 학생시절 농악대에서 상모를 돌려봤거나 징을 쳐봤거나 꽹과리를 두들겨본 사람은 무조건 군인은 특별휴가, 공무원은 출장을 급조해 대통령 명령이라고 전라도 모처 언론기자의 눈을 피해 합숙을 했다. 그 국풍 81에 자막 ‘서울대학교 농악대’로 지나간 화면 속 인물들은 서울대는 맞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을 가장한 서울대 출신 하위직 공무원이고 군인이었다.
무심코 TV를 보던 서울대학교 재학생이면서 농악대 동아리 회원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자신들은 국풍 81에 불참한다고 통보했는데, 전 국민이 시청하고 해외까지 송출하는 중계에 ‘서울대학교 농악대’ 자막이 지나가고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공부만 잘하는 서울대학교인 줄 알았는데, 농악대 수준도 높다고 칭찬을 했다.
그 사건으로 그날 화면에 나타난 서울대 선배들은 서울대학교 81학번 이후 후배들에게 선배가 아니라 벚꽃 취급을 받았다. 이에 괴로워 몇 명은 한국을 떠났다.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은 ‘국풍 81’ 개막 전날인 5월 27일에 서울대학교에서 국풍 81을 반대하는 데모 중에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세 번을 외치고 옥상에서 투신했다. 국풍 81을 국가적 차원에서 홍보하느라 대학생의 죽음은 한 줄 보도도 안 되었다.
요즘은 넘쳐나는 것이 대학교이고, 출산율이 저조해 대학 정원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고3 학생 수가 더 적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고등학교 졸업 학생 중에 대략 1/4 정도만 대학생이 되었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1일까지 1주일 동안에 국가예산 3억을 여의도에 퍼부었던 것이다. 1981년의 화폐 가치와 오늘의 화폐 가치를 비교한다면 30억에서 100억 정도의 돈을 여의도에 풀었다. 가요제, 연극제, 농악, 탈춤, 줄다리기, 국궁 등 전국에 TV시청자 눈과 여의도 참석한 국민들의 눈을 사로잡은 ‘국풍 81’은 그렇게 성황리에 끝났다.
김미자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사태의 피의 한’을 풀어주는 대신 정권 찬탈한 인간들이 그들의 치적으로 둔갑시키고, 국민을 우매하게 하는 굿판이라는 악평을 하고 떠나자 상길과 영애는 더 이상 여의도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둘은 샛강을 건너 대방 정류장으로 왔다. 영등포역 방향 버스를 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는 ‘영등포장. ’ 대방장’,‘시길장’,‘우신장’,‘대영장’등 초등학교 이름의 여관이 즐비했었다. 영애는 자신이 대방초 출신이라고 대방장을 정해 들어갔다. 상길은 다음에 만나면 ‘우신장’으로 가자고 약속했으나 그 일은 발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애가 다른 부잣집 아들 프로 골프선수와 결혼했고, 상길은 짐 보따리 들어준 인연으로 최성현과 결혼했고, 세월이 지나 영애도 이혼녀가 되었고, 상길도 이혼남이 되어 만났다.
제갈 선호는 젊은 시절 상길과 영애가 연애할 때, 그녀가 5 공주집 맏딸에서 7 공주집 맏딸이 된 것을 빌미로 둘의 연애를 금지시켰다. 이유는 상길이 영애와 결혼하게 되면 제갈 선호 제사 지내줄 손자가 없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한 번도 대학생이 될 때까지 장남에 장손자로 상길은 할아버지가 두 발로 타는 자전거, 오토바이, 자전거, 스케이트, 스키 등은 타면 안 된다고 해서 경기, 강원 출신이지만 육군 소위 시절 스케이트를 못 탔다.
초등군사반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철원 XX사단으로 갔다. 그 시절 겨울철만 되면 사단 스테이트 대회를 연대장들이 목숨 걸고 우승하려 했다. 6 연대장 정수성 대령은 차마 스케이트 잘 타는 소위 전입시켜! 할 수 없어, 인사과장에게 무조건 강원도 1순위 경기도 2순위로 뽑아오고 충청 이남은 전입 금지를 시켰다. 인사과장이 제갈 상길 소위에게 물었다. 스케이트 탈 줄 아냐고? 안다고 하고 연습하면 될 것을 상길은 집이 한강변이지만 장손이라 할아버지가 두 발로 가는 것은 금지시켜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인사과장은 빈 종이 휴가증을 한 뭉치 50장을 주면서 무조건 토요일, 일요일 일직사관만 아니면 서울로 점프해서 스케이트 타고 와라 했다. 제갈 소위는 한 여름부터 동대문스케이트장을 매주 방문해서 연습했다.
그해 동계 사단체육대회서 제갈 상길 소위는 중․소위 400미터 우승, 중. 소위 400 미터 계주 우승, 계급별 계주는 이병, 일병, 상병, 병장, 하사, 중사, 상사까지 2등으로 달리던 것을 제갈 소위가 1등도 20미터 정도 앞 선 1등을 11 중대장 김세호 대위에게 넘겨주었다. 김세호 대위는 육사 XX기 중에서도 알아주는 스케이트 선수였다. 육사 생도체육대회에서 스케이트 1,000미터 우승기록 보유자였다. 김 대위가 제갈 소위로부터 바턴을 넘겨받아 얼마나 빨리 달렸으면 꼴찌 부대 소위를 추월했다. 그해 정수성 대령은 연대장 취임 이후 가장 기쁜 날이라고 제갈 소위! 김세호 대위 앞으로 와! 해서 우승 트로피에 막걸리를 부어주었다. 세월이 흘렸다. 정수성 대령은 별 셋으로 진급해 XX군단장이 되었다. 제갈 상길 소위는 대위 진급 소령진급을 해서 가납리 무인항공기 중대장이 되었다. 정수성 장군이 지휘하는 XX군단에 무인항공기 부대를 창설준비 중이라고, 지휘통제실에 상황보고 참석자를 대상으로 간부교육을 시켜달라고 했다.
“충성!”
“충성!”
‘ 방금 군단장님께서 과분한 소개와 칭찬을 해주신 XX군단 가납리 무인 항공중대장 제갈 상길 소령입니다. 군단장님께서는 제가 소위 시절 00 연대장님이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군단장님 앞에 군단 주요 직위자들을 대상으로 무인항공기 간부교육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인항공기는 여러분 어린이들 장난감 무선으로 조종하는 자동차 많이 보셨죠? 요즘은 헬리콥터도 무선으로 조종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절대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겁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조종사가 비행체 안에서 타고 조종하던 것을 무선으로 모니터를 보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하생략)
제갈 상길에게 군대 생활이 좋은 일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민간인통제선 안에 영농민이 들어와 들어가면 안 되는 지뢰지대 표시가 있는 곳에, 더덕을 캐러 들어갔다. 지뢰가 터졌다. 제갈 상길 소령의 책임구역이라, 수색 중대장 이재현 대위와 정보과장 제갈 상길 소령이 탐지 병이 지뢰 탐지기로 탐지한 곳을 대검으로 탐지하면서 민간인 시신을 꺼낼 통로개척을 했다.
통로개척을 하고 사단 헬기로 영농 민 시신을 이송하고 나니 군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제갈 상길 소령은 철모를 벗었다. 땀이 범벅인 철모 속에는 흑백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샛강에서 영애와 첫 키스를 하고 그녀가 잃어버리면 죽음이야. 알지? 하고 전해준 검은색 교복에 하얀 칼라가 눈부신 사진이었다. 그는 힘들고 위험한 순간에도 이 흑백사진 한 장을 부적으로 여기고 지냈다. 결과론이지만 위험한 고비고비마다 잘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