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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May 27. 2024

단편소설

명함

 여동생 미정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다.’

  ‘오빠? 은빈이가 나나 선우서방보다 오빠,  외삼촌을 더 좋아하는 거 알지?’

 ‘야, 아무리 그래도 자기를 낳아준 부모보다 외삼촌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니?’

마음속에 간직한 말을 부모가 차단했겠지?’

오빠는 상담을 많이 해봐서 조카들하고 대화가 통하는데, 은빈이나 언니네 애들도 자기 부모 보다 외삼촌 하고 더 말을 잘하는데, 최대한 빨리 부산으로 좀 오세요? 내려와서 은빈이랑 말 좀 해줘요. 애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와도 말을 안 해요. 미치겠어?’

‘알았다.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차표는 해줘?’

‘아이고 차표뿐이겠어요?

좋아하는 회대접할게요.’

‘알았다. 부탁받은  <2030 대인기피증에 대한 연구> 처리하내려가마.’

그녀는 어려서 그림을 잘 그렸다. 횡성군에서 사생대회가 있으면 늘 입상해서 <천경자 화백>  이후 한국을 빛낼 <제갈미정 화백>이 될 거라고 했으나 부모님은 여자는 한글 읽을 줄만 알면 시집가서 애나 잘 낳고 살림 잘하면 된다는 말에 여고 졸업이 최종학력이 되었다.

  할아버지 제갈재석은 1910년 국권피탈 생이다. 할머니 송혜령은 1911년 해생이다. 솔직히 혜령(惠玲)이라는 세련된 이름은 1910년대 수준에서는 혁신적인 이름이었다. 거의 자(子)로 끝나는 이름이 흔하던 때 령(玲)으로 끝나는 이름은 조선 전체에서도 몇 안 되는 이름이었다. 우암 송시열 후손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일자무식이지만 자부심은 컸다. 돼지띠라 욕심이 많은 분이고 할아버지는 천예성(天藝星) 타고난 예술성은 많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공부한 것이 없었다. 그는 20대에 만주에 가서 아편장수를 했고 돈을 많이 벌었다. 번 돈의 30%는 김구 선생에게 군자금으로 보냈고, 역시 30%를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88 여단에 보냈다. 할아버지가 상상도 못 한 시기에 도둑처럼 광복이 왔다. 항복하고 일본인이 조선 땅에서 물러갔다.  

모르는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왜 돈을 주었냐고 비난하지만 1940년대빨치산이나 임시정부  <때려잡자 일본 놈> 공동목표였다. 단지 노선이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을 추구하고, 빨치산은 공산주의를 지향했지만, 김일성이가 변할 줄 모르고 군자금을 보냈다고 했다.

  21세기<버닝썬 사건>이나 <영등포경찰서 백 팀장 사건>에서 보듯이  마약장사가 걸리면 감옥에 가는 위험이 있지만 걸리지 않거나 검찰, 경찰에 무마시킬 백 줄만 있으면 돈을 가장 쉽게, 많이 버는 것이 마약 종사 업무다. 광복이 되자 아편을 팔아 금으로 샀다.   금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화폐개혁이 있어도 전혀 손해 안 보는 것이 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금으로 비축을 해서 고향 땅으로 왔다. 

  장남인 내가 제갈길이고, 바로 아래 큰 여동생이 제갈미숙, 작은 여동생이 제갈미정, 가운데 남동생이 제갈상철, 막내 제갈상민이다.

   걸리지만 않는다면 이문이 가장 짭짤한 것이 마약 장사 듯이 1930년대 아편 장사도 이문이 좋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금을 팔아 소를 샀다. 농토가 있어 소먹이를 댈 수 있는 집을 골라 소를 맡기고 암소는 송아지가 태어나면 송아지를 키운 값으로 주고 황소는 팔아서 판돈을 6대 4로 나누기로 계약하고 소를 위탁사육을 했다. 

  1970년대는 강림은 중학교가 없었다. 중학을 보내려면 자전거를 타고 20 리 가서 안흥중학교를 다니거나 원주로 보내  원주 중학을 보내거나 해야 했다. 원주 중학은 최규하 대통령, 시인 김지하, 철학자 윤노빈 등을 배출한 학교였다. 최규하, 김지하는 잘 알지만, 윤노빈은 잘 모르는 분이 있을 텐데, 부산대학교 철학 교수를 하다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보도되고, 불순분자와 좌익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보도된 것에 분개했다. 이런 나라에 살 수 없다고 월북을 해서 <구국의 소리> 원고를 쓰다가 작고했다. 김지하는 그와 동창이라는 이유로 안기부에 잡혀갔다. 윤노빈에 대해 불라고 몽둥이로 맞았다. 서울대에서는 만나 술도 마시고 유신반대도 했으나 부산대 철학과 교수로 내려간 후는 만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장손인 나를 소 99마리를 다 팔아 서라도 서울대학교를 보내겠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대방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강림초등학교는 한 학급 58명이 전부인데 서울 대방초등학교는 8반까지는 남자반 9반부터 15반은 여자반이다. 6학년 8반 77번이 전학을 와서 77번인데 9반부터 15반까지 77번은 키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보다 더 컸다. 점심시간에 포크댄스를 위해 마주 보고 있으면 얼굴이 그녀 젖가슴에 묻혔다. 춤을 추다 보면 그녀에게서 엄마 냄새가 났다. 엄마 생각이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제갈미숙은 원주여고를 졸업했고, 제갈미정은 강릉여고에 합격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강림서 강릉으로 학교를 보내면 학비도 학비지만, 생활비 감당이 안 된다고 가까운 횡성여고에 보냈다. 횡성여고는 대환영이었다. 강원도 지명은 강릉과 원주를 앞글자를 따서 강원도가 되었다. 강릉여자고등학교는 대관령 동부의 명문이고 원주여자고등학교는 대관령 서부의 명문이었다.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 여고 1학년 때 <국군 장병 아저씨께>하는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학교로 왔다.


      <제갈미정 양에게>

  미정 양이 보내준 위문편지 잘 받았습니다. 원래 위문편지는 병장부터 이병까지만 나누어주는 것인데, 포천군단 정찰대에서 전체 병사들에게 위문편지 한 통씩 배분하고 남는 것을 대대본부로 가져와서 한 통씩 무작위로  간부들 나누어 받았는데, 미정 양 편지를 내가 받았어요.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되어 답장을 보내봅니다.

 일단 편지 봉투 글씨가 어디 서예대전에 입선한 사람 수준으로 고체로 쓰여 있어 좋았습니다. 궁체는 펜글씨 교본으로도 연습할 수 있지만, 고체는 전문적인 서예를 익혀야 쓸 수 있고 쓰더라도 균형 맞추기 힘든 것인데, 봉투가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첫 답장이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싶어요.

 1980년 12월 10일

포천군단 정찰대대 작전과 중사 선우재길 씀


  그 편지로 1학년 1반은 난리가 났다. 위문편지를 전교생이 보냈는데, 첫 번째로 답장을 받은 것이라고 담임선생님이 낭독을 해버렸다. 그 편지를 받고 답장을 했고 선우재길 중사가 또 편지를 보냈다.


  <제갈 미정 양에게>     

  편지 잘 읽었습니다. 강릉여자고등학교에 합격해 놓고 등록을 못 해 횡여고를 다니고 언니는 원주여고라고 알아주고 횡성여고라고 무시당하는 그 느낌 알아요. 내가 오빠라면 강릉여고 등록금 내주겠어요. 그 집은 돈 버는 오빠도 없나 봐요?

힘들겠지만 공부는 보통으로 하고 그림 잘 그리기 바랍니다.

1980년 12월 20

선우재길 씀


 그렇게 여고를 졸업하는 때까지 주고받았고, 졸업식 하루 전날에 장미 100송이를 들고  강림리를 찾아왔다. 1970년대는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였다. 집으로 찾아온 선우재길 중사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 는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반대 사유는 첫째, 나이 차이가 얼 정도라야지 13세는 너무 크다고 했다. 둘째는 궁합 도 너무 나쁘다고 했다. 미정은 <천하수>인데 선우 중사의 사주가 <대역>라고 했다. 흐르는 물을 제방이 막으면 그게 잘 풀리겠느냐고 반대하셨다.  네 분 어른들이 반대하자 미정과 재길은 폭탄선언을 했다.  졸업식만 마치면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군인관사도 민간아파트와 동일하게 살지만, 선우재길 중사가 근무하던 시절은 민간아파트 애들이 군인 아파트를 보고 <거지 아파트>라고 부르는 것이 싫어서 상사 진급을 포기하고 전역해 축협 직원이 되었다. 

  딸 아들에게 거지 아파트에서 키울 마음이 없었다. 여고 졸업식을 마치고 왕방산 근처에 보증금 없는 월 5만 원짜리 월세 살다가 6개월 후 진군아파트 304호가 배정되어 이사했다.


 여기서 은빈의 오빠 선우천명이 태어났고, 선우재길이 중사로 전역해 축협 기장지점에 근무할 때 은빈이 태어났다.


  부산 터미널에 도착하니 여동생 부부가 픽업을 나왔다. 나이는 나보다 10살이나 위지만 처가 족보로 제갈미정 큰오빠기에 손위 처남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미정이가 운전하고 선우재길이 은빈 이야기를 했다. 부산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꼭 11개월에 퇴사를 했다. 그러기를 다섯 번을 반복하더니 요새는 회사도 싫고 사람도 싫고 부모도 싫다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매부가 은빈이랑 대화는 했는데?”

“대화는 못 했어요. 딸이 제일 꼰대가 엄마, 아빠라고 말이 안 통한다고 해서, 시도를 못 했지요?”

은빈이 뭘 먹기 좋아하는지는 알고?”

“어려서는 자장면인데 커서는 몰라요.”

“스쿨푸드에서 만드는 오징어먹물 김밥 먹어봤어?”

“아니요?”

“그런데, 오징어먹물 김밥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세요?”

“음, 재작년인가 왜 은빈 회사에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 제품 출품했다고, 부스 지키러 출장 온 적 있지, 그때 점심시간에 회사 대표랑 부장 꼰대들하고 밥 먹기 싫다고, 외삼촌 시간 되냐고 해서 갔더니 난 봉은사 옆 은행나무집 사주려고 했더니, 횡성한우는 돈 많은 꼰대들이 먹는 거고 자기 또래 2030은 스쿨 푸드가 가성비 으뜸이라던데?”

“그러니, 엄마, 아빠보다 방문 걸어 잠그고 외삼촌 특사로 부른 이유가 있네요?”

“어이, 그런 말 마시오, 집에선 영경이랑 우인 이 가 날 꼰대라고 그래.”

“왜 애들은 제 부모는 꼰대라고 하고 외삼촌, 이모, 고모 하고는 말을 하죠?”

은빈을 금이야 옥이야 키운 거 아니야?”

“아닙니다. 집에서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위아래 알아보게 키웠어요. 회사에서 위, 아래, 좌, 우 두루두루 잘 지냈어요.”

“그럼, 회사서 퇴직금 몇 푼 아끼려고 고의로 11개월 부려 먹고 해직하는 악덕 회사만 들어간 걸까?”

“그건 모르겠어요.”

“이놈 나라가 제2공화국 헌법이 그나마 노동권이 잘 반영된 헌법이었는데,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자본만 중시하고 노동을 무시했는데, 이후 국회의원들이 공부했어야지? 죄다 보좌관이 해주는 대로 법을 만들어 대니 노동권에 대해 아는 자가 없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오빠, 일단 씻고 나오세요. 얼른 밥 준비해서 은빈과 겸상 준비할게요.”

“왜? 네 명이 먹지?”

“아니요, 모처럼 서울서 부산 행차인데 기분 좋게 시작해야지요.”

“알았다.”

 차린 밥상을 들고 은빈 방을 두드렸다.

 “은빈아! 문 열어. 딸이 좋아하는 외삼촌 오셨다.”

 “너랑 둘 겸상이다.”그 말에 철옹성처럼 굳게 닫혔던 방문이 딸깍 열렸다. 은빈이 내 허리를 럭비선수 태클 들어오듯 달려들었다. 그녀는 내 허리를 잡고 나는 그녀 긴 머리가 등 중간까지 내려간 것을 옆으로 밀고 등을 쓰다듬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마음껏 울도록 기다렸다. 한참 울더니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왔다. 언제 울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은 목소리로 외삼촌 오랜만에 오셨는데, 눈물을 보여 죄송하다고 했다. 아니야, 사람이 울고 싶을 때 울고 기쁠 때 기쁘다고 해야 하는데, 요즘 세상은 솔직한 사람만 손해 보는 세상이더라.

“어서 밥 먹자?”

“예. 맛있게 드세요?”

“음, 너도.”

“외삼촌은 보림 언니나 우종이 와 대화 잘하세요?”

보림이는 가끔 하는데, 우종은 존 바이든 얼굴 보기보다 더 힘들어. 바이든은 그래도 뉴스채널에 종종 나오는 거 보는데, 우종은 월부터 금은 새벽에 나가 퇴근하면 씻고 밥 먹고 자야 아침 새벽 나가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게임동우회에서 작전통이라고 우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승률 차이가 엄청나다고, 상대 팀이 제갈우종 출전하는지 안 하는지가 관심 사항 1호래.”

“와, 그러면  돈 좀 벌겠는데요?”

“게임이 돈이 돼?”

“그럼요, 모르셨어요?”

“그냥 PC방 바둑 두러 가면 옆에서 헤드 셋 쓰고, 욕지거리해 가면서, 에너지 음료 마시면서, 라면 먹어가면서 전투하는 거 봤지만 돈이 되는 줄을 몰랐어.”

“제 친구도 게임에 미친 애 있는데요, 직장 다니면서 월급 타서 게임용 PC는 비싸고 모니터도 두 개 쓰잖아요?”

“그래, 우종 방에도 모니터 두 개야.”

“돈 벌어 최신형 나오면 계속 업그레이드해요. 자기 팀원 중에 나머지 최신인데 자기만 등급 낮으면 게임 지면 왠지 자기 때문에 진 거 같아서 최신형 안 살 수가 없다고 해요.”

“그럼, 그런 애는 게임이 실제 전쟁터의 병사로 보일 나이니까.”

밥을 다 먹을 무렵 커피와 과일을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말이든지 지금부터는 외삼촌과 조카가 아니고 동갑 32세 친구로 생각하고 말하라고 하니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했다. 나는 일단 말 놓는 시간을 하고 그 버전으로 계속 말하라고 했다. 내가 먼저 한다.

“야, 선우은빈 너 첫사랑이 언제 누구였어?”

“기장중학교 3학년 때 김인환이다.”

“왜 깨졌는데?

“인환이가 전교 1등인데, 나랑 사귀면 공부 안된다고 그 애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난리를 쳤어.”

“그에 대한 복수 방법 생각해 봤어?”

“아니.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물을게.”

“말해봐?”

“제갈상일 너는 첫사랑이 언제야?”

“중 3 겨울 서울시 고입 연합고사 마치고 종로 2가 YMCA 학원 특수반 B반 김경희였다.”

“어떻게 사귀었는데?”

“우리 할머니가 대방동에서 수유리 신일 중․고등학교 앞에 내려 작은집에 가야 하는데, 한 정거장 지나가서 내려 고생하시니까 여학생이 주소를 들고 작은집에 데리고 와 준 거야. 검정교복 단정하게 입은 여학생이 길 안내해 주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감동하신 거지, 손주며느리 감이라고.”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소개로 알게 되었고, 둘이 YMCA 학원에 들어갔는데, 매월 시험으로 A, B, C, D, E, F 반을 만드는 거야. 나는 수학을 잘한다고, 그녀가 수업 마치고 남으라고 해서 남았더니 자기가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테니, 나보고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했어.”

“그다음은?”

“수학 함수 개념을 잘 모르기에 동전을 들고 자판기로 갔지. 경희야 잘 봐. 함수는 내가 동전을 넣지. 너 코코아 좋아하자 코코아 누르면 나오지?”

“응.”

“자판기 속 안이 어떻게 생기고 부품이 몇 개 들어가고 필요 없어, 자판기에 100원 넣고 누르면 코코아 나오네? 코코아가 함숫값이고 자판기가 함수야. 그런데 X에 그냥 X면 1차 함수, 제곱이면 이차함수, 삼 제곱이면 삼차함수, 그러면 99 제곱이면 뭐겠어?”

“99차 함수?”

“오케이, 김경희가  함수에 통달했다. 겁먹지 말고 풀어봐?  한마디에 정말 수학을 열심히 했고, 다음 달 국어, 영어, 수학 시험에 국어는 나보다 2점 작고, 수학은 둘 다 100점, 영어는 그녀가 100점 나는 58점이라 국어 수학 덕분에 B반 유지했고, 그녀는 A반으로 올라가고, A반에서 B반으로 윤보경이라는 애가 내려왔는데, 야는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거야. 그러니 내가 수학을 가르치겠어? 경희를 가르쳐 준 거 아는 것은 경희 혼자인데, 그녀가 발설했거나 A 반에 가서 자랑했는지, 보경이도 나보고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싫어했더니 왜? 해서 나는 수학 가르쳐주고 수학 점수 올리는데, 영어 배우고 점수가 똑같으니 나만 손해야. 그냥 안 가르치고 안 배운다고 했더니 그 시절 귀한 파카 만년필을 사주는 거야. 중학교 교훈이 義에 살고 義에 죽자 인데, 처음으로 교훈을 어겼다.”

“파카 만년필 받고 또 가르쳐주었어?”

“음 함수 물어보니 횡설수설하기에, 동전을 들고 따라오라 했지. 100원 넣고 보경이는 땅콩 차 좋아하지? 땅콩 눌러? 나는 코코아.”

 역시나 함수 설명을 자판기에 비유해야 하였더니, 어머 넌 수학 최영수 선생보다 더 쉽게 가르친다 했다. 그 시절 최영수 선생은 청주고등학교 수학 선생인데 예비고사 출제위원 소집되어 가서 ‘킬러문항’ 출제로 유명세 치르고, 서울 ST학원으로 스카우트되었었다.

 인생 알 수 없는데, 내가 수학 가르쳐 준 여자 김경희는 중학까지는 장래 희망 영어 교사였고, 영문과나 영어교육과 간다는 애가 서울대 수학과교육과 갔다.

은빈 초등, 중학 시절 제일 흥미 있고 그 시간이 행복했던 고목이 뭐야?”

“미술!”

“그런데, 왜 미술 분야 꼭 미술 동양화, 서양화 아니더라도 산업디자인이나 응용미술과 그런데 생각은 안 해봤어?”

“예!”

“예가 뭐야? 말 놓는 시간 벌칙 나가서 배나 사과 밤참 만들어와?”

“알았다. 상일아~~~”

“그래. 이제 제법 말 놓는 시간 할 줄 아내, 너 엄마, 아빠랑 말 놓는 시간 한 번도 못 했어?”

“당근!”

“어이쿠 배 예쁘게 깎았는데?”

“음, 요즘 매스컴에 2030 한심하다고들 하는데, 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또, 말 놓는 시간 벌칙 뭘 할까? 너 강림 외할머니 댁에 와서 외할머니와 윷놀이하고 옷 할머니 옷 다 벗긴 거 기억나?”

“기억나지, 그땐 윷이 얼마나 잘되는지, 던지면 모, 모, 모, 윷, 걸 잡는다고 개! 외치면 개, 도 외치면 도가 나왔는데, 그거 비디오로 찍어야 했는데, 이젠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아까 미술 좋아했는데, 그 생각 못 하고 경영학과 점수에 맞추어 갔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미술 정통 미술 아니더라도, 응용미술, 산업디자인 아니면 그냥 동네 화실에서 미술 배워 공모전 응모할 생각 없어?”

“32세, 이 나이에?”

“그럼, 70세 노인도 시인으로 등단하고, 서예대전 미술 대전에 60세 이상 어른들도 공모전 입상하는 거 뉴스에서 봤지?”

“응.”

“오늘은 너와 말 놓는 시간만 하고 자고 내일 네 엄마, 아빠 승낙을 얻어서, 너를 데리고 강림 지금 일가친척 하나 없는 집이지만 구경하고, 횡성 공원묘지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포천 왕방산 정기 좀 받고 포천서 너는 부산으로 나는 서울 구로구 개봉동으로 헤어지자?”

“알았어!”

그렇게 그날을 보내고 나는 거실로 나와 매부와 잠을 잤다.

  다음날 여동생 부부에게 말했다. 은빈이 강림 우리가 살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처분한 집 구경하고, 태종대 노고소 찍고, 횡성공원묘지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 막걸리 한 잔 올리고, 포천 왕방산 정상 찍고, 진군아파트 다 사라졌겠지만, 위치 답사하고, 포천 맛, 집 홍두깨나 풍뎅이 통나무집이 지금도 있나 확인하고 있으면 거기서 포천 산나물비빔밥 먹고 없으면 아무 중국집 가서 자장면 곱빼기 먹고 헤어질 테니 알아서 여비 공주에게 주라고 했다.

  강림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시장길 우리가 살던 집은 지붕도 그대로 벽면도 초록색 그대로였다. 횡성군 강림면 강림시장길 13 주소에 가서 30년 전에 여기 살다가 부모님 돌아가셔서 강림을 떠났는데, 조카가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 해 방문했다고 하니 구경하라고 허락하셨다.

뒤란 뜰에 방치된 녹슨 세발자전거를 보더네 은빈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세발자전거 돌아가신 은빈 외할머니가 누에고추 판 돈으로 사주신 것이다.

“외삼촌!”

“왜?”

“나 이거 탈게. 밀어 봐?”

“야, 이 강아지야, 안장에 안기나 하겠어, 다 큰 어른이?”

“일단 엉덩이만 걸치고 다리 옆으로 뻗을게 밀어봐!”

“야, 말 놓는 시간 끝났다!”

“뭐야? 나 여름방학에 외삼촌 저 동해안 통일전망대 근무한다고 휴가도 없다고 해서 아빠가 부산서 7번 국도 타고 가도 가도 바다라 나 차 안에서 자고 도착해, 생활 국어 가르친다고 친족 간에는 공대의 안 쓰고 나이 불문 남녀불문 반말이 통용된다고 했지?”

“와~우리 은빈, 중학 때 외삼촌이 말해준 거를 서른둘에도 기억하네?”

“그럼, 기장중학교 김혜정 선생이 생활국어 시험에 존대어 나왔는데, 우리 반에서 나 혼자 100점이라고 너 방학 동안 무슨 일 있었어? 물어서 여름방학에 강원도 통일전망대 중대장 하는 외삼촌댁에 가서 화진포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구경하고 회 먹고 관사에서 외삼촌이 중대장이지만 대학교는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출신이라서 국어 가르쳐주셨어요?” 했더니 참 좋은 외삼촌 둔 것도 복이 구나라고 하셨어요. 옆집 초롱 미용실과 길 건너 수고 다방은 그대로였다. 숙다방에 들르니 사장님은 30년 전 그분이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로 은빈은 아이스 바닐라 라테로 마셨다.

 노고 할미가 태종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진한 노고소와 태종이 쉬어간 곳이라고 주필대(駐匹臺)라는 비석이 있지만 통상 태종대라 부르는 정자에서 사진을 찍고, 전찬수 사장이 운영하는 막국수 집에서 메밀전병과 막국수를 먹었다. 때마침 부곡에서 횡성 읍내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오기에 냉큼 올라탔다.

 횡성 시내에 내려 택시를 탔다. 횡성 공원묘지 두 번째 블록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 기사는 나올 때는 어떻게 나오시려고요? 뭐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막걸리 한잔 부어드리고 나올 겁니다. 금방 나오시면 거기 기다릴까요? 아닙니다. 그냥 카카오 택시 부르겠습니다. 거기 묘지는 카카오 잘 안 잡혀요? 왜요? 카카오에서 개발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연결되는 기사가 없다고 문자 뜰걸요. 그때 그 문자 나오면 연락드리면 오실 수 있나요? 저게 핸드폰에 저장할게요.


  은빈은 솔직히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못 왔다. 정규직만 5일간의 경조사 휴가가 있고 계약직은 없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 자리마저 해고가 두려워 일했는데, 결국 11개월 마치고 해직되었다. 횡성 공원묘지 제2블록 경사진 길을 올라가 단풍나무 한그루 지나면 아버지 제갈선호의 묘였고, 다섯 번째 지나면 어머니 전선미의 묘였다. 준비해 간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라 상석에 올려 절을 두 번 하고 산소에 골고루 뿌렸다. 은빈이 외할아버지 묘소에서는 담담했는데, 외할머니 묘소에는 통곡했다. 외할머니가 꼬맹이 시절 업어준 것을 생각하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야 할 것을 그놈의 재계약 안 되면 어쩌나 두려워 못 왔어요. 외할머니 죄송하고, 거기서는 외할아버지와 싸우지 말고 잘 사시라고 했다. 두 분 돌아가신 후에 하는 소리지만 은빈이가 세 살 무렵에 강림 외가에 왔었다. 오면 외손녀 생각해서라도 싸울 일 있으면 미정이네 식구가 떠난 후에 싸우시든가 하지, 우리 부모는 전혀 그런 거 안 가리고 싸우셨다. 산소에 막걸리를 부어드리고 공원묘지 2블록만 돌아보았다.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타고 온 택시 기사 말대로 연결되는 기사가 없다고 문자가 0.5초 만에 떴다. 미친놈들이지 이걸 앱이라고 개발했나?


택시 기사가 알려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아까 하차한 횡성 공원묘지 2블록으로 와 달라고 했다. 기사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5분 후에 도착했다. 그동안 카카오 택시와 일반택시가 카카오 앱을 사용하는 것에 차별을 많이 지적해도 눈도 끔쩍 안 하던 카카오 창업자가 대통령이 한마디 하니 별별 대책을 다 낸다는데, 참 한심하다. 이런 횡성 공원묘지에는 즉각 연결되는 기사가 없다는 앱을 앱이라고 만든 것인지 그러고도 연구개발비 정부 지원을 받았나 의문이 간다.

  카카오 아닌 일반택시를 타고 횡성 KTX 역에서 서울역으로 왔다. 개봉동 내 집에서 은빈을 재우고 날이 밝자 개봉중앙시장 맛, 집에서 아침을 먹고 포천으로 갔다. 의정부까지는 전철로 가서 포천 올라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군단 앞에 내려서 기억을 더듬어 왕방산을 올라갔다. 포천이 은빈 아빠 선우재길 중사 총각 시절 근무하던 때와는 너무 많이 변했지만, 왕방산만은 등산로가 안전하게 정비된 것 외에는 그대로였다. 정상에서 군단사령부와 진군아파트 자리가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나무 그루터기 2개 있는 곳을 물색했다. 은빈이 한자리 나 한 자리 차지하고 각자 물병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은빈아, 저기 도로가 직선이고 나무가 줄 똑바로 맞추어진 거 보여?”

“네.”

“저기가 네 아빠 중사시절에 근무하던 부대다.”

“엄마는 횡성여고 출신인데, 포천 중사를 어떻게 만났어요?”

“다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한다. 간단히 말하게 궁금한 건 엄마에게 물어봐라. 아니, 너 그 유명한 여고 졸업하고 바로 동거한 사건을 몰라?”

“엄마. 아빠가 싸울 때, 너 나 이렇게 고생시키려고, 여고생 앞길을 가로막았냐고?

그 소리는 들었는데, 부부싸움에 나온 소리를 물어볼 수 없었어요.”

“그래. 본인들이 말해주지 않는데, 물어보기 그렇겠다. 그럼 좀 자세하게 말할 테니 묻지도 말고 집에 가면 모른 척해. 그냥 왕방산에서 아빠 근무한 부대 내려다보고 왔다고. 미숙 이모와 네 엄마는 한 살 차이라서 자라면서 싸우기도 엄청나게 싸우고, 공부도 서로 누가 잘하나 시합을 하는지, 양궁 선수 국가대표 선발전이 올림픽보다 더 어렵다고 하듯이, 미숙이와 미정이는 상장 누가 많이 타나 시합을 하는지, 둘이 탄 상장을 외할머니는 동네 사람 보라는 듯이 벽에 벽지 대신에 상장으로 벽을 한 면 가득 도배했다. 지금은 매월 월례고사가 없어졌는데, 네 엄마 학생 시절은 매월 시험을 봐서 1등에게 월 1등 상장을 수여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미숙이는 촌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주여고 입학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이에 질세라 네 엄마는 원주여고보다 강릉여고가 더 힘들다는 거 알고 겁도 없이 강릉여고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을 한 거야. 집에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나 강릉여고 합격했다고 자랑하자 집안이 난리가 났다. 여자가 집 가까운 학교서 공부해야지 뭐, 대관령을 넘어 강릉여고라고 당장 취소해? 하는 할아버지 호통에 울면서 포기했고, 원주여고는 입학 사정이 끝나 안 된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횡성여고 학생이 된 거야. 그러니 엄마가 공부 제대로 하겠어? 대충 하고 특활 부 미술부에서 강릉 오죽헌 사생대회 나갔는데 금상을 받았고, 홍익대에서도 고등학생 상대 미술대회를 했는데, 거기서도 은상을 받아서 미술과로 홍대를 가면 바로 합격인데, 여자라고 외할아버지, 증조부모가 반대해서 너 엄마 최종학력이 횡성여고야. 엄마 무시하면 안 된다. 알았지?”

“예!”

은빈은 왕방산에서도 나에게 태클하듯 안겨 꺼이꺼이 울었다.

“외삼촌,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안 해주었는지 몰라요?”

“미워 마라. 네 엄마에게 미안해. 강릉여고 합격이면 내가 서울에서 대방동 S 중학교 졸업하고 우신고등학교 시험 봐 합격점이 200점 만점에 190에 턱걸이인데 189로 낙방하고 뺑뺑이 추첨 검은 돌고교에  진학하였는데, 우신고보다 합격선 높은 것이 강릉여고라고 보내주셔야 한다고 말을 해야 했는데, 허수아비 오빠였다. 네 몸속에는 엄마 유전자가 51%, 아빠 유전자가 49% 흐르고 있으니 32세, 나이 무시하고 미술 공부나 디자인 공부 하거라 알았지?”

“예.”

왕방산을 내려왔다. 배가 고팠다. 풍뎅이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사장님은 30년 전의 사장님이 아니었으나 메뉴는 그대로였다. 산나물비빔밥을 주문했다. 포천까지 왔는데 이동막걸리는 먹어주어야 예의지, 하며 막걸리 주문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의정부까지는 시외버스로 의정부에서 전철로 서울역에 와서 부산행 KTX로 은빈을 보내주었다.  인천행 콩나물시루 전철을 타고 개봉에 내려 내 집으로 올라갔다. 은빈이가 부산으로 가고 해가 바뀌었다. 택배가 왔다.

  도서 출판 <義에 살고 義에 죽고>에서 펴낸 구범묵 회고록 <원주에서의 민주화운동> -지학순 주교, 무위당 장일순과 나-라는 부제의 책이었다. 책 표지에 명함이 있었다.


북 디자이너

선우은빈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도 65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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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출판 <에 살고 義에 죽고>


 나도 미정이도 평생 명함 없는 일만 했는데 선우은빈 명함을 보니 가슴 뭉클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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