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오는 것들' 숏츠를 보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친구를 보며 눈이 커지는 남자친구의 모습에 기억이 겹쳐졌다. 예식과 형식에 익숙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쁜 내가 결혼을 앞두고 최소한의 것들만 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저렴한 웨딩샵을 찾았다. 지금은 남이 된 그와 함께 홍대 근처의 웨딩샵을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후줄근하게 차려입고 간 내가 달라졌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선 모습이 내가 봐도 이쁘게 보였다. 커튼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결혼식을 하던 날 첫새벽 칠흑 같은 어둠에 길을 나섰다. 그날 새벽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기월식을 보았다. 떨리는 마음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달을 보는 내내 교차했다. 결혼식을 정신없이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혼여행을 갔던 시간만이 느리게 흘렀고 숨을 편히 쉬었다.
처음에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그 공간에 익숙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다. 자기가 자랐던 공간의 익숙함은 그를 본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아버지와 편치 않은 관계라든지 집에서는 꼼짝도 하지 않는 아니 잠만 자는, 나를 만나기 전의 그 자리에 익숙한 사람으로 돌아갔다. 결혼을 실패하고 나와 재혼을 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다. 늘 배려해 주고 싫은 내색조차 내지 않던 모습만 보고 그를 착각했던 거였다.
매일 지독히 싸웠다. 혼인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너네 집에 왔으면 나는 이 결혼 안 했을 거라고 했다. 그가 집에서 어떤 모습인지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 자식 앞에서 늘 엄마 욕을 하는 아버지와 자식에게 남편 흉과 자식에 대한 험담을 일삼는 어머니란 걸 몰랐다. 동네 왕따였던 시모 덕분에 그 남자네가 오래 살았던 동네에서 나는 주변 상인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곤 했다. 집만 나서면 내 뒤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들 시선에 무관심한 내가 눈치를 챌 정도였다. 그가 보고 자란 환경은 그랬다. 우리 부모도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입만 열면 남들 욕을 하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시부모의 입방아에 올랐다. 좋은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 표적이 얼마 안 가 내가 되었을 뿐이다.
그 남자를 믿었다. 그 남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했다. 사랑에 지쳤던 나는 사랑이란 얄팍한 감정을 믿지 않게 됐다. 사랑도 제대로 모르고 그저 열뜬 감정만을 사랑이라고 알았던 나였다. 열아홉 살부터 만났던 그 남자의 변함없는 모습을 믿었다. 그 믿음 또한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선택한 거라는 걸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지독한 결혼생활이었다. 행복은 늘 먼 나라였다. 남의 자식을 키워주고 늘 욕만 먹고살았다. 남의 자식은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을 나한테는 눈치 보느라 말하지 못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걸 마음껏 요구하려고 조부모를 자주 찾아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조부모집을 찾아갔건만 나는 애 얼굴도 못 보게 만드는 새엄마로 낙인이 찍혔다. 억울함은 쌓여갔고 그 남자에 대한 믿음은 부서져 내렸다. 자신의 결혼에 뒷짐을 지고 선 그 남자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 집에 들어선 첫날 천장에 움푹 파인 것을 보고 궁금해하는 나에게 그 남자는 아버지가 밥상을 걷어차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대화보다는 폭력이 일상이었다. 말 한마디로 폭탄이 터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폭력은 그 남자에게 이어졌다. 전처와의 풀리지 않은 갈등을 나한테 퍼부었고 나를 집밖으로 내쫓았다. 폭력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늘 장대하게 끝이 난다. 그 남자가 두려웠다.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해 두 눈에 시퍼렇게 불을 켜고 덤볐다. 일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그는 풀 줄 몰랐다. 그 분노를 집으로 가져왔고 한 번에 다 터뜨리곤 했다. 경멸은 같은 공간에서 숨쉬기조차 싫은 혐오로 이어졌다.
웨딩드레스를 입던 날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다니 놀랍다.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 늘 도망쳤던 나인데 그 남자의 눈동자가 커진 그 기억이 화도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다니 내가 더 놀랍다. 가정법원을 나오면서 아들이 언제 군대 가냐는 말에 대답조차 하기 싫어서 도망쳤었다. 같은 공간에서 십여 년이 넘게 남남으로 살았으면서도 빨리 그 남자의 모든 것을 지우고 싶어 달아났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미움이 조금 사그라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