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이라는 영화가 떠오른 건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를 살해했다는 기사를 접한 뒤였다. 48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교사 생활이 하루 이틀이 아닐 텐데 명 선생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기사에는 수업에서 배제돼 무조건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칼을 샀다고 했다. 명 선생에게 학생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필요한 도구였고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생명에 대한 존엄이 없었던 게 아닐까?
큰 아이를 처음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선생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내가 겪어온 선생도 여럿이었지만 세상이 정말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선생은 직업일 뿐이었다. 선생다운 선생은 거의 19년 동안 딱 두 명을 만났다. 사촌동생은 어느 날 학교에 참관수업하러 갔다가 수건걸이가 없길래 교사한테 얘기했더니 "어떻게 하는지 아시죠?"라는 교사의 답을 들었다. 동생은 수건걸이를 달아주고 왔다. 큰 애가 학교에 입학하고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도대체 왜 학교 청소를 엄마들이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들이 좀 더럽게 청소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지 엄마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청소를 했다. 손걸레를 만들어서 복도 마룻바닥을 반 전체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면서 닦았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부모가 용역도 아니고 내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말을 잘했던 큰 애가 반장이 됐고 나는 졸지에 반의 일을 도맡는 엄마가 돼야 한다고 했다. 아들은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됐고 학교 일은 알아서 잘해준 엄마가 있는데 갑자기 내가 반장 엄마니까 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도대체 반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때는 어린이날이고 학교 행사 때, 학기가 끝나는 날에는 책거리라고 교사와 학생을 위해 떡을 해 나르던 2001년이었다. 담임께 둘째가 갓난아이라 못한다고 정중히 사과했더니 여태 잘해왔던 엄마가 무조건 나보고 하라고 난리를 쳤다.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자기 아들을 반장을 시키고 싶어서 그동안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면서 담임을 도와주었는데 담임이 자기 아들이 반장이 되도록 전혀 손을 써주지 않아 괘씸했던 거였다.
알랑방귀도 떨 줄 모르고 내 아이라 해서 특혜를 받는 것도 별반 달갑지 않은 엄마인데 무얼 알아서 학교일을 척척 하겠는가? 세상 어려운 일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담임 상대하는 거였다. 애들 숙제도 저들 몫이니까 단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었다. 큰애는 글도 잘 쓰는 편이어서 학교에서 글짓기 상을 도맡아 왔다. 중3 때는 담임이 글짓기상을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면 어떻겠냐는 말도 들었다. 상점수가 차고 넘쳤다. 그 글짓기는 엄마가 써준 것으로 파다하게 소문이 돌았다. 옆학교에 다니는 엄마를 통해 들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쓴 것인데도 말이다.
성격이 별난 선생들을 종종 만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사만큼은 인성검사를 필수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큰애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다. 큰애에 이어 작은애까지 12년 동안 초등학교에 보내며 이상한 선생들을 마주쳤다. 큰애가 주의력 결핍이라 전학을 하면서 담임에게 부탁을 했다. 괜한 말을 한 것이다. 대놓고 한숨을 쉬는 선생을 보며 내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한 번도 담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던 아들이 담임이 무섭다고 했다. 유난히 뒷돈을 밝히는 선생이었다. 아우디를 타고 다니는 선생은 남들 이목이 신경이 쓰였던지 주변 아파트에 차를 세워두고 학교에 들어갔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과 학교에 자주 오는 엄마들을 편애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밝혀도 너무 밝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영란법이 생기기 전까지 많은 봉투가 오갔다.
별난 학부모가 별난 선생을 만들기도 한다. 아들이 태어난 후 너무 힘들어서 잠시 아이를 봐주실 아주머니를 모신 적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의 따님이 초등교사였다가 학교를 관뒀다고 했다. 분당에 위치한 학교에 첫 부임을 갔는데 극성맞은 학부형 등쌀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학부모는 자기 자식을 잘 봐달라고 90년대 후반에 2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건넸다. 초임교사는 기겁을 하고 돌려드렸다. 그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학부모는 교장을 찾아갔고 감히 자신의 촌지를 거부한 선생을 교장 앞으로 불러 세웠다. 아주머니의 따님은 교장과 학부모 앞에서 단단히 지청구를 들었으며 자괴감을 느끼고 사직서를 썼다.
어느 날 6학년 아이가 '고백'이라는 영화가 재밌다고 보여달라고 했다. 자기 담임이 이 영화가 정말 재밌다고 꼭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자극적인 카피와 첫 장면이 시선을 끌었다. 일본에서 촉법소년의 범죄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작가가 개인적인 복수극으로 쓴 것을 영화로 만들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자기 딸을 죽인 두 아이에게 에이즈에 걸린 남편의 피를 우유에 섞어서 마시게 했고 그 이후 치밀한 계획으로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6학년 아이가 보기에 너무도 잔인한 장면들이 난무하는 영화였던 거다. 이 영화를 보라고 했다고? 너무 재밌으니까 꼭 보라고 했다는 그 담임이 아직도 기억난다.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건지 그 선생은 도대체 어떤 세상을 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피가 낭자하고 엄마를 무참히 살해하는 그 잔인한 영화를 재밌다고 권했던 담임이 떠오른 건 명 선생의 살인사건 때문이다.
명 선생이 교사로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교단에 있었을까? 자기보다 힘없는 어린아이를 범행 대상으로 삼는 인격조차 형편없는 사람이 교직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우울증 각종 이유를 아무리 들어도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사람이 교단에 20년 이상 있었다는 거다. 예전에 교사는 천직이라고 했다. 아무나 못 하는 것이라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임에는 분명하다. 교권 운운하면서 애들 상대로 징징거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아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 시대는 바뀌었고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적어도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늘이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