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부터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에 주말 아침마다 누리는 호사인 깊은 잠을 즐길 수 없다. 시원한 빗소리 덕분에 여름 내내 가동한 에어컨에게 모처럼 하루 휴가를 선물했다. 잠자리 정리하고 커튼을 젖히니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깨끗한 하늘과 청명한 공기가 손에 잡히는 듯 가깝게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무더운 여름을 온몸으로 버틴 작물들이 시원하게 샤워를 한 덕분인지 초록빛 자태를 뽐내며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지긋지긋한 무더위를 끝내고 시원한 가을로 전환하는 계절의 터닝포인트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듯하다.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 무엇을 할까? 고민한다. 아내는 교회, 딸은 출근, 아들은 도서관.. 한 지붕 4 가족이 모여 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는 시간은 공휴일, 주일 저녁시간 외에는 없다.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백팩에 노트북, 간식 챙겨 넣고 나만의 아지트 스터디카페로 향한다. 집 앞에 한 곳 있고 15분 정도 걸어가면 비슷한 스터디카페가 또 하나 있다. 날씨가 덥지도 않고 선선한 바람맞으며 걷고 싶은 마음에 백팩 하나 둘러메고 벙거지 쓰고 블루투스로 CBS라디오 음악 들으며 한적한 길을 걸어본다. 시원한 바람에 걷는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스터디카페에 도착하여 예약한 좌석에 앉는다. 컴퓨터석, 노트북석, 일반 좌석이 있는데 나는 주로 화면이 큰 컴퓨터 좌석을 이용한다. 좌석구조가 중고등학교 시절 독서실 분위기와 비슷하여 몰입도가 좋고 고성능 PC 환경을 구비하여 유튜브 동영상 시청, 보고서 작성, 그리고 지금처럼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는 데는 최적의 장소이다. 출출하면 휴게실에 비치된 각종 간식과 음료를 무료로 이용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실내를 살짝 스캔해 보니 좌석이 만석이다.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 등 이용자들의 연령도 다양하다. 나 같은 50대 후반 이용자는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겠지!. 주말에 집에서 TV 보며 여유롭게 쉬거나 동호회 등 친목활동에 참여하거나, 골프, 여행 등 체육행사, 레저활동을 즐길 시간이다. 아니면 직장에서 용돈 한 푼 더 벌어보고자 시간 외 근무를 하는 소시민 부류일 것이다. 나는 어떤 부류인가? 폼나게 주말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움을 만끽한다는 점에서 나름 행복한 중년이라 자부한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고자 웹에 접속한다. 마지막 글이 8월 21일 아들과 둘이 남해 캠핑 간 이야기다. 하얀 지면 위에 무슨 이야기를 쓸까 고민해 본다. 솔직히 내 브런치 스토리 소재는 광법위하다. 가족이야기, 직장이야기, 나라이야기 대부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베스트 작가들을 보면 자신의 직업군에 맞추어 "선택과 집중" 전략을 잘 활용한다. 공무원 작가의 경우 공직생활 내부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작가들이 많다. 나 또한 공직생활을 소재로 글을 써볼까 고민했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하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내 삶을 소재로 글을 쓴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회현상과 주변의 환경에 대하여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들로 많은 글을 썼지만 내 마음속 이야기를 공개한 적은 많지 않다.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굳이 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에서 50대 후반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남성의 고민을 공유하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56세 중년 남성의 머릿속 키워드(KeyWord)
1. 불안한 건강(건강검진 결과의 공포)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건강검진을 받는다. 공무원인 나는 직장에서 매년 1회 종합검진을 받는다. 직장에서 건강검진 비용을 1년에 40만 원씩 지원하며 본인이 원하는 의료기관에서 자유롭게 검진항목을 선택할 수 있다. 우수한 복지혜택이다. 그러나 50세가 넘어서면서부터 건강검진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과체중, 고혈압, 혈관성 질환 등등 나이가 들수록 건강검진 결과표에 빨간색 글씨가 많아진다. 학창 시절은 성적표, 중년은 건강검진표.. 학창 시절은 머리로 평가받고, 중년은 몸으로 평가받는 세태가 아프지만 수용해야 하는 현실이다.
요즘은 편하게 검진결과를 핸드폰으로도 보내주지만 집으로 우편 송부되는 검진결과표는 북한의 탄도미사일보다 무섭다. 아내의 잔소리는 건강검진결과표 도달시점부터 1년 365일 동일한 강도로 계속된다. 아내는 물론 건강식과, 비타민 등 영양제를 꼼꼼히 챙겨주지만 태생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백약이 무효하다. 20KG 감량하면 모든 병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말이 쉽지 곰이 마늘만 먹고 사람으로 환생하는 단군신화가 아니고서는 비현실적 이야기다. 지금도 좌석옆에는 탄수화물 음료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저출생고령화사회, 100세 인생이 현실화되고 있다. 60세에 퇴직한다면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내가 아프면 내 고통은 감내하겠지만 의료비 부담, 가족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다. 건강검진결과표의 빨간 글씨를 검은 글씨로 바꿀 때까지 단군신화 속 곰처럼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
2. 사무관(5급) 8년 차, 서기관(4급) 승진의 꿈
인간의 욕구를 유발하는 3가지 요인이 있다. 돈, 명예, 권력이다. 대기업 CEO처럼 부자가 되거나, 노벨평화상 수상자처럼 명에를 획득하거나 대통령처럼 권력을 얻기 위해 인간은 노력한다. 나에게 3가지 요인 중 1개를 선택하라면 단연코 명예를 택할 것이다. 다음은 권력, 돈에는 관심 없다. 아마도 내가 공무원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공직을 떠나는 것이 현실이지만 공직생활 10년 이상 한 공무원들이라면 승진을 최고의 인센티브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 의왕시 일반행정 9급으로 공직에 입문하여 2017년 경기도청 사무관으로 승진하였다. 정년인 2028년 6월에는 공직을 떠나야 한다.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정년까지 3년 6개월 정도 남아있다. 공로연수 1년을 제외하면 직장에 출근해야 할 시간은 2년 6개월이다. 아직까지 정년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치부했는데 곧 내게도 쓰나미처럼 다가올 현실이라 생각하니 왠지 모를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1997년 공직에 입문했을 때는 열심히 일하면 3급 부이사관(국장)까지 승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공직에서 30년 가까이 경험해 보니 꿈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삼고초려한 결과 4급 서기관(과장)에서 공직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목표를 하향조정하였다. 요즘 공직 인사는 고시, 발탁인사, 개방형 채용 등 속칭 다다까이들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나에게 조직이 충분한 보상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공직의 최종 목적지인 서기관 승진에 대한 한가닥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다.
3. 2028년 6월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 정년은 2028년 6월이다. 국가에서 공무원으로서 신분이 보장되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법적기한이다. 계산해 보니 3년 6개월 남아있다. 그런데 이 이러니 한 것은 박근혜정부 시절 공무원연금법이 개정되어 1996년 이후 공직에 입문한 공무원의 공무원연금 지급개시연령이 차별화되었다. 1997년 공직에 입문하여 2028년 퇴직하는 나는 63세부터 공무원연금이 지급된다. 퇴직은 60세에 하는데 연금은 63세부터 지급받는 것이다. 당연히 퇴직 이후 3년 동안 소득공백이 존재한다. 오래전부터 예상된 문제지만 정부는 현재까지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퇴직하는 공무원들은 생계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미봉책으로 '임기제 재고용' 등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소득공백의 피해를 최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현재 논의되는 정부의 정년연장 안이 확정되더라도 다가오는 정년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년 이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할까?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가치와 소득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접점은 어디까지일까?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유튜브에서 최신정보를 얻고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 조언도 구해본다. 마음은 조급하다. 그러나 아직 나를 만족할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4. 사회적 관계의 구조조정(버려야 할 것, 남겨야 할 것)
30세에 직장 생활한 이후 56세 현재까지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직장 내 소모임,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동창회, 지역모임, 직능별 모임 등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리더로서, 팔로워로서 많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카카오톡, 라인, 텔레그램 등 가용가능한 정보매체를 이용하여 인간관계를 확장하는데 시간과 비용,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핸드폰 속 저장된 이름은 1,000명이 넘지만 절반 이상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입하며 다양한 사회적 관계의 틀을 유지하고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주고 저들은 나를 왜 필요로 하는 것일까? 실용적 관점을 탈피한다면 나와 저들의 관계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요약가능하다. 허무한 마음이 빈 가슴을 가득 채운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과대포장된 사회적 관계를 구조조정해야 할 시점이다. 대신 깊고 가치 있는 만남을 추구할 것이다. 건강모임, 취미모임, 신앙모임등 가치 있고 행복한시간들로채워나갈 것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상갓집이 문전성시이고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말의 함축적 의미를 생각해 볼 시점이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주말 오후 스터디카페 후미진 좌석에서 요즘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혼란한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 보았다. 더불어 지난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글로 정리해 보니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 정체들이 하나 둘 형상화되는 듯하다. 56세. 사춘기, 갱년기 산전수전 다 경험한 세월이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감출 수 없다. 정답은 없다. 인생 후반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하고 강약 속도조절 잘하며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인생일 것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거움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Bravo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