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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하다 May 05. 2023

어린 시절 기다리던 어른을 어른이 되고 만나다

오늘 건넬 문장: 『내가 말하고 있잖아, 정용준 (민음사)』

"걱정 마. 억지로 시키지 않아 천천히 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어른이 가진 힘.




나는 느린 친구다. 또 겁이 많은 친구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눈치 보는 친구가 됐다. 빨리빨리 해야 될 거 같았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그렇다, 현재 진행형으로 쓴 문장이 나타내듯이 난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어린 시절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어린 시절에 나는 한글 읽는 법, 시계 보는 법, 구구단 외우기 등등 다 늦었다.

겁은 또 많아서 체육활동, 특히 뜀틀은 그냥 시도조차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다 느꼈다, 주변의 답답한 시선들을.

그럴 수밖에. 나조차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런 어린 시절을 거치고 성인이 되니, 이제 졸업이 늦은 사람, 취업이 늦은 사람, 성공으로 가는 수순을 밟는 일이 느린 사람이 됐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굉장히 '느린 사람', 돈 그리고 성공과 거리가 먼 람.


그때 만난 정용준 작가님의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 속 문장, 그리고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원장님.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낼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을 냈겠지. 안 그래?(…)
  넌 지금 용기도 없고 힘도 없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너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천천히 말해. 차분하게 말해 봐. 떨지 마. 용기를 내!(…)
 하지만 아니잖아. 천천히 말해도 안 되잖아. 차분하게 말해도 어렵잖아. 떨려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해서 떨리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
  사람들은 줄줄 말을 참 잘해. 써도 써도 넘치는 말의 바다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어. 플라스틱 수조 같은 곳에 한 모금 정도의 물만 바닥에 남아 있거든.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사람도 있어. 수조가 깨진 사람도 있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사람도 있어.
우리 친구는 말하는 게 왜 힘드니?  어떤 단어가 어렵고 어떤 상황이 두렵니? 걱정 마. 억지로 시키지 않아. 천천히 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

『내가 말하고 있잖아, 정용준 (민음사)』


이 문장을 건넌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문장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읽고 쓰면서.

어른과 아이 서로 답답한 상황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라니. 그게 가능하다니.

용기가 없고 힘이 없는 친구에게는 용기 내라는 말, 힘내라는 말도 잔인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징하게 아는 어른. 그런 친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도와줄 테니 천천히 해보자는 어른.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회원 개개인을 천천히 기다려 주는 원장님이 실존 인물이길 바랐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그런 인물을 만든 작가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용준 작가님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문장낭독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런 인물, 이 인물의 대사를 쓸 수 있는 작가님처럼 나 또한 단 한 사람의 아픔이라도 이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했다.

기다리던 어른을 만났으니 이제 내가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어른이 되자고. 절대 쉽지 않겠지만.




그 다짐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도 왔다. 바로 유치원 5세 친구들 6명을 케어하는 보조 교사로 2년 가령 일하게 되면서.

6명 친구들은 제각각 다 다르고 다채로웠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그 친구들을 대하는 게 맞을까, 의문이 들었다. 각 수업에서 잘하는 친구보다 어려워하는 친구에게 상대적으로 더 시간을 쏟았다.

제일 먼저 친구들 각자가 가진 장점을 파악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그 점을 계속 인지시켜주었다.

단어 읽기를 못하는 친구가 위축되면,

친구는 말을 정말 예쁘게 하잖아,

친구는 웃는 모습이 참 예뻐,

읽기는 원래 어려워, 선생님이랑 천천히 배우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올바른 교육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듣고 싶던 말을 어른이 된 내가 맘껏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천천히 같이 해나간 순간순간들 선물 같았다. 친구들을 안아줄 때 그 시절 어린아이(나)도 안아줄 수 었다.

 



어린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들, '책의 바람'찾아온 독자들에게도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어떤 것도 견딜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찾아오면 정용준 작가님의 책을 건네며

더뎌도 괜찮다고, 천천히 같이 해보자,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곁에서 기다려 줄 줄 아는 어른 만나고, 되어가면서 그렇게 우리 삶을 잘 방어하면 좋겠습니다.



책방에서 그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어른 아이는 기다린다, 좋은 어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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