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질 때 바다는 여러 모습을 지녔다. 사방을 물들이는 붉은 기운이 먼바다 전체에 스며들어 절로 경외심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붉게 물든 채 찰랑이는 앞바다 파도는 마음을 살짝 달뜨게도 한다. 이 그림에선 돌 위를 살살 건드리는 핑크 핑크 한 파도가 무꽃과 어우러져 기억 속 어느 한 시점을 아름답게 떠올리게 한다. 지금 아름답게만 떠올리는 그 시점은 그저 무겁고 단단한 생활의 한 장면이었을 게 뻔한데 말이다.
기억은 그렇다.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잔인하게도, 아름답게도 왜곡돼 머릿속에 머문다. 그래서 난 기억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때 그 일을 내 성향에 맞게 바꿔 해석해 버린 후 머리 한구석에 저장하고 있는 걸 테니 말이다.
라틴어에서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것만이 내게 진실이 될 수 있다는 소릴 테니 좀 섬찟하게 느껴진다. 내가 오롯한 진실이라고 평생 믿어 왔던 것들도 그저 내가 만들어낸 진실에 불과하다니,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단 얘기다. 그러니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만들어내며 사는 건지 모르겠다. 과연 합치점이 있기는 할까?
핸드폰 속에 저장된 아버지 사진을 자주 꺼내 본다. 치매 초기부터 아주 심해지셨을 때까지 연도별로 저장된 아버지의 얼굴. 더러 나랑 같이 찍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엄마와 함께 찍힌 사진들이다. 나랑 있을 때와 엄마랑 있을 때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내 옆의 아버지는 표정을 잃은 와중에도 아버지 특유의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고 계셨는데, 엄마 옆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이같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동영상 하나에선 엄마가 아버지에게 죽을 먹이고 있다. 파파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지만 죽을 드시는 표정이 꼭 아기 얼굴 같다. 엄마를 무한 신뢰하는 아기 같은 표정. 왜곡되며 뒤엉키다 아예 날아간 버린 기억 속에서도 오십 년을 같이한 아내만은 본능적으로 기억하는 것 같은 편안한 모습.
차마 잊지 못하고 본능 속 깊은 곳에 남겨 둔 아버지의 진실.
훗날, 그때까지도 선명히 기억한다는 건,
구체 상황이 어땠든 그게 내겐 진실이었고, 차마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망각하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왜곡된 기억이든 하나도 망각으로 잃지 않고 내게 진실이었던 모습으로 기억하면 좋겠다.
그땐 혹시 모를 일이다. 무겁고 단단하기만 했던 현실이 바위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핑크 핑크 한 물결처럼 예쁘게만 기억될지도 말이다.
박은성, <제주 바당>, 캔버스에 아크릴, 45.5 x 37.9 cm,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