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 Aug 11. 2023

백색소음

난 일상에 백색소음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고요를 잘 못 참는다기보단 백색소음이 있어야 뭐든 집중을 더 잘한다.

그래서 내 주변엔 언제나 FM 라디오가 켜있다. 백색소음이 존재감을 드러내면 일에 방해가 되니 진행자가 말을 많이 한다든지 발랄하게? 진행하는 프로는 피한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는 FM 클래식 방송에 주로 맞춰져 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지만, 주변에 깔리며 내게 편안함을 주는 소리? 음악? 내겐 그게 필요하다.


그림 속 바다가 꼭 백색소음 같다. 파도가 밀려와 해안가 돌에 부딪히기 직전 약간 몰려 있는 듯해서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편안하게 풀어 주는 그림이다. 요동치며 화를 내지 않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의 바다와 하늘. 그 앞에 앉아 쉬고 싶다.


라디오는 주로 백색소음인데, 그래도 유독 기억나는 목소리가 있다. 20대와 30대를 보냈던 미국에서 밤 운전 때마다 들었던 목소리. 운전은 주로 남편이 했으니 정확히 말해 내가 운전하며 들었던 목소리는 아니지만, 긴장하며 잔뜩 힘쓰고 살았던 하루를 위로해 준 목소리였다. 처음엔 지역 방송이려니 했는데, 동북부에서 남부로 이사를 한 후에도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Delilah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시작하던 프로는 해가 완전히 넘어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어도 계속됐고, 난 그 목소리를, 그녀가 틀어 주는 음악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하루가 얼마나 빡센 버티기의 연속이었는지 상관없다. 어쨌든 오늘은 끝나가고, 난 지금 무사히 Delilah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된 거다....


그녀 목소리만의 마력이 있기도 했겠지만, Delilah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의 불안, 피곤함, 그 와중 느꼈던 찰나의 편안함과 위로가 한데 뭉쳐져 있어 난 지금도 종종 그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나를 지나쳐간 수만 시간의 백색소음 중 유일하게 내게 주파수를 맞추어 주었던 그 특별했던 소음.


난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 가족과 함께 그럭저럭 늙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고독하다고 느끼고 뭔가 비었다고 느낀다.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둥둥 떠다니는 이 마음이 상황이 나아지면 어딘가에 정착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나는 그냥 계속 둥둥 떠다니는 채로 더더 늙어갈 것 같다. 그래도 좋다. 내가 찾기만 하면 내 주변에는 백색소음이 있을 테고, 의도한 채로, 의도치 않은 채로 나를 위로해 줄 테니...    


나중에 검색해 보니, 그렇게 원숙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 지친 하루를 위로해 주던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썩 많지도 않았다. 그녀의 일생에도 굴곡이 많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던데.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참 고마웠노라고... 누군가는 당신 덕분에 하루를 버텼으니, 당신도 오늘 하루를 잘 버티라고 말이다. 


가끔은 내 주파수와 딱 맞는 소음?을 듣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새벽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백색소음이고, 내 마음은 여전히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다.


박은성, <제주바당>, 캔버스에 아크릴, 90.9 x 72.7 cm, 2022년

이전 06화 차마 잊지 못한다는 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