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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첫여름, 완주』

by 새벽

2025년, 불타는 여름의 신간이다. 작가 (김금희)가 글자가 아닌 소리로 독서하는 분들과의 대화를 염두하고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쓴 작품이라고 한다. 마치 영화 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이고 글에서 소리가 날 것만 같고, 거기다 좋아하는 박정민 배우가 만든 출판사 (무제)의 작품이다. 종이책보다 오디오 북이 먼저 출간됐다고 한다.


손열매...

사실,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표지 얼굴은 읽으며 상상했던 얼굴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게... 너무 예쁘지 않나? 왠지, 감정이입을 한껏 했던 열매라는 여성이 저런 어여쁜 젊은이라는 데 어이없이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이야기는 열매가 돈 떼먹고 도망간 선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수미 언니의 고향 완평을 찾아가 보내는 여름을 그렸다. 시작과 이야기 중간중간 삽입된 할아버지와 열매의 대화가 충남(보령) 사투리로 되어있어 자꾸 소리 내 읽어 보게 하는... 계속 웃게 만드는...



여보세요, 식사는 하셨쥬? 창세긴데 우리 비디오 즘 갖다주세요.


지끔 돈이, 연체료가 문제가 아녜요. 애타게 찾넌 분이 계셔서 안 올라걸랑 이짝 아자씨가 받으러 가시겠대유. 그럭하며는 동니 사람들끼리 뭐 인사두 하시구 으른덜끼리 해결하세요. 츰 보는 아자씨 손님인데 인상은 좋으셔유. (8)



창세기 비디오 집 딸 열매는 자라서 성우가 됐지만, 사는 게 뭐... 당연히 빡세다. 어쩌다 보니 목소리가 떨리는 증세까지 겪게 되어 정신과를 찾고, 심각한 우울증 때문에 나타나는 신체화라는 진단을 받는다. 발성 문제로 일을 못하는 탓에 거리로 나 앉게 된 열매는 수미 언니 엄마를 찾아가 바닥에 눕기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고향 집으로 향한다.



보령에서 올라와 오랫동안, 대학을 졸업하면, 서른이 되면, 경력이 차면, 듬직한 안정으로 나아가리라 믿었지만 이상하게 삶은 매번 흔들렸다. 마치 우는 사람의 어깨처럼. (15)


(보령) 바다가 누군가의 세찬 몸짓이라면 (완평) 강물은 누군가의 여린 손짓 같았다. 바다가 힘껏 껴안는 포옹이라면 강물은 부드러운 악수 같았다. (23)



예상대로 수미언니 엄마는 딸을 못 본 지 오래됐단 얘기와 함께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며 수미언니의 방을 내어주고, 전세 보증금을 날려 갈 곳이 없던 열매는 어찌어찌 수미언니의 방에서 머무르는 처지가 된다.


사람들에게 부모란 때론 온화한 태양 같기도 어느 날은 상당한 심술을 품은 태풍 같기도 한, 자식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자기 주도성을 갖기 어려운, 날씨나 계절 같은 존재인데 수미는 늘 건조하고 덤덤했다.(32)


그렇게 시작한 완평살이,



“그 외계인은 전나무 바닷속에서 살아.” (54)



내계인 열매는 마을 외계인 어저귀와 시작도 끝? 도 없는 사랑을 하지만,

내계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열매는 산불과 함께 사라진 외계인의 부재를 견디며,

꿈에 불쑥 찾아오는 할아버지와 신나게 고향 말?을 쓰면서,

특히 내 최애 영화 베스트 10 안에 들어가는 『첨밀밀』을 백서른 네 번이나 보면서,



열매는 순리를 거스르지 말라던 할아버지 목소리를 떠올렸다. 진짜 만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그때 그렇게 가 버린 뒤 할아버지는 정말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별이 이 여름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136)

비교를 하다 하다 외계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하다니, 이건 우주적으로 불공정한 일이 아닌가. (139)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가 절대 유기되지 않겠다는 자기 보호로 이끌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나서는 아주 깊은 외로움이 종일 열매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152)

하지만 이제는 그런 충동들을 잠재우며 무심하게 길을 걷는 감각을 알 것 같았다. 논둑을 논둑으로만 보고 한낮의 볕은 볕으로만 보며 주인보다 뒤처져 걷는 늙은 개는 늙은 개로만 보는 것.” (152)


버스에서 자고 있는 얼굴을 보는데 하루 종일 봐도 그 하루가 아깝지 않고 괜찮을 것 같은, 너무 말간 얼굴이었어. 그래서 이렇게 돼 버렸는지 모르죠. (158)


모든 것이 살아나고 유효했다. 열매는 울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76)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완평을 떠나고, 계절은 지나고, 오랜만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사랑을 잃었다는 열매에게 말한다.



인생은 독고다이, 혼자 심으로 가는 거야.(186)


사랑? 이, 사랑은 잃는 게 아니여, 내가 내 맘속에 지어 놓은 걸 어떻게 잃어? (212)



서울로 돌아온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원래 그런 건 없다.

하지만,


완평에서 보낸 여름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사실, ‘치유’라는 단어가 너무 아무 데나 쓰여 전혀 소울이 없는 단어란 느낌인데,


완주 나무, 완평, 어저귀, 그리고 열매... 이들 때문에 ‘치유’라는 단어의 소울을 좀 느끼게 됐다는...


계속 웃었는데,

짠하고,

열매의 매 순간에 공감하게 되는,

상큼한 초여름 같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손열매씨,

당신은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열매들에게 이 말을 전하며...



첫여름 완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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