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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방랑자들』

by 새벽


“올해 소설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나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야말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므로.”


올가 토카르추크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폴란드 언론 TVN Fakty와의 인터뷰에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중 하나로 2008년 출간, 2018년에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00여 편의 파편적인 글로 ‘방랑자들’이란 주제를 성실하게 채웠다. 2008년에 출간했으니 현재의 주요 이슈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인지 어느 인터뷰에서 “만약 현시점에서 이 책을 썼다면, 난민이나 생계형 이민자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노마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손에 잡았을 때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이야기 때문에 몸이 뒤틀리더니 두 번째로 읽으니, 그녀가 계속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는 희끄무레하게 잡히는 듯했다.


*경계 허물기

그녀는 움직이는 서사를 구현했다. 어디에도 뚜렷한 경계가 없다. 제목도 내용도 모두 움직이는 사람에 관해서지만, 단편적인 글들로 600페이지를 채워 형식적으로도 파편화되고 머무르지 않는 움직임을 재현한 듯하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과거와 현재, 꿈(환상)과 실재, 육체와 영혼, 자연과 문명 사이의 어디쯤 머무는 듯한 것이, 그녀가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모호한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아마 그녀가 계속 말하고 있는 ‘경계가 모호하다’란 단절을 허문다는 의미가 아닐지.


*순례의 목적: 순례자

공산권 출신인 그녀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어린 시절엔 상상 속 여행을 했고, 여행을 할 수 있게 돼서부터는 자주 길 위에 있었다고 한다. 뚜렷한 목적지를 두지 않고 계속 여행하는 자신이 종종 에피소드의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면서 목적지 없이 방랑하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내 순례의 목적은 다른 순례자들’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책 속 화자에게 여행은 타인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딱히 목적지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길 위에 있는 수많은 순례자들, 그들과의 잠깐의 만남.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살아있는 한,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인간의 숙명.

여행, 이동, 만남, 탐구가 멈추는 지점이 죽음이고, 그조차 인생의 여정으로 보는 작가.

해부나 신체의 일부 보존에 관한 에피소드 같은 것을 통해 죽음은 존재가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멈추고 안주하는 삶은 누려야 할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는 거라 말이라도 하듯이.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지만 (....)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백여 개의 에피소드 중, 기억에 남았던 몇 편을 뽑자면,

사라졌다 돌아온 아내와 아들에 대한 의심으로 편집증 증세를 보이는 <쿠니츠키: 물 1, 물2>, <쿠니츠키: 대지>, 허만 멜빌에게 바치는 오마주 같은 <재의 수요일 축일>, 황제의 호기심의 방에 전시된 아버지의 사체를 찾기 위해 황제에게 쓴 편지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요제피네 졸리만이 보낸 첫 번째 서신, 두 번째 서신, 세 번째 서신>, 외로움과 과도한 책임에서 도망쳐 길 위를 방황하는 아누슈카의 이야기 <방랑자들>, 첫사랑 애인의 안락사를 돕기 위해 삼십 년 만에 그를 찾아가는 생물학자의 얘기 <신의 구역>, 노교수에게 다가온 카이로스의 시간을 탁월하게 묘사한 <카이로스>등이 있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 이성적이면서 담론적인 지성, 깨끗하게 살균된 고독한 지성,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많은 걸 알지 못하는 지성, (...) 모든 것이 함께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설득하는 지성,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 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기도,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여행 때마다 마치 안내서처럼 『모비딕』을 들고 다닌다고 한다.


<카이로스>에서 뇌출혈로 죽어가던 교수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묘사는 정말 탁월했다.

피가 그의 전 생애에 퍼지며 그의 모든 걸 멈추게 하고 지우는 순간.

몇 번을 읽어도 소름이 돋는 훌륭한 묘사.

역시 이래서 올가 토카르추크이구나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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