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돌아오는 계절처럼 아빠가 돌아오는 꿈을 꾼다.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악한 상상력을 발휘해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늘어놓자면 대략 이러하다. 여느 롤플레잉 게임에서처럼 누적 경험치가 백 퍼센트에 도달하면 레벨 업과 동시에 이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듯 그리움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면 보상처럼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게 된다는 엉터리 메커니즘.
꿈속에서 우리는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 아빠는 좌식 생활에 익숙한 여느 한국 아저씨답게 안방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은 채 반쯤 누운 자세로 티비를 보고 있다. 꿈이 전개되는 배경이 집이 아닐 경우에 우리는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낯선 여행지를 활보하기도 한다. 꿈속에서 바라본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어서 현실감이라곤 느낄 수 없다. 막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내가 봤던 것이 꿈속의 한 장면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눈을 뜨자마자 안방을 들여다보는 일이 예삿일이 되다 못해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가 되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집안 전체를 장악했던 코골이는 온데간데없고 침대가 있던 곳은 몽실을 위한 얄팍한 변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내가 겪었던 슬픔이 가짜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나면 이내 명치끝이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기분이 마냥 나쁘진 않다. 적어도 꿈속에서만큼은 함께할 수 있으므로.
내 꿈은 대게 아빠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외는 없다. 그날의 사고는 꿈속에서조차 없던 일이 될 수 없다는 듯 늘 그렇다. 내 물음에 아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능청스레 괜찮다 말하지만 꿈속에서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수긍한다. 꿈속 아빠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모조리 쓸어 넘긴 탓에 납작한 뒤통수가 돋보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칼 하며, 고집스러운 성미가 드러나는 물 빠진 남색 바지까지.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빠의 모습은 여지없이 그 반대다. 잊고 싶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모습으로 매일 밤 잠들지 못한 나를 부단히도 찾아온다.
여태껏 잡아 본 적 없던 오빠의 손을 내가 먼저 부여잡고 걸었던 낯선 병원의 복도와 영안실이 마주 보이는 복도 한 편에 덩그러니 놓인 침상. 그 위 뉘인 아무런 움직임 없는 몸. 완전히 감기지 않은 눈. 코와 입가에 번진 핏자국. 하늘색 목 보호대. 그 몸을 두른 빳빳한 광목천. 연이어 연상되는 것들에 나는 베갯잇을 적실 수밖에 없다. 아무리 흔들어도 아빠는 깨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오빠는 아빠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내 몫으로 주어진 것은 아빠의 허벅다리부터 발끝까지였다. 나는 광목천으로 둘러싸인 다리를 두 팔 벌려 품에 안았다. 유독 뜨거웠던 체온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단단한 몸은 아직도 이렇게 만져지는데 어째서. 전부 누군가가 꾸며낸 가짜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복도가 떠나가라 울었지만 내가 울고 있는 게 맞는지 울어야 하는 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날밤 머물렀던 병원 인근의 호텔에서 나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방안까지 뻗쳐 들어온 저 시커먼 어둠이 태초의 암흑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난방을 해도 까닭 모를 한기가 몸서리치게 했다.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 아빠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왔음에도 날이 밝아 집으로 돌아가면 안방에서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느낀 것들만 현실에 속해 있었고 내가 바라는 것들은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깜빡 선잠에 들기도 했지만 숙면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게 한밤에 꾼 악몽이길 바랐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튿날 아침 담당 형사가 우리 방으로 찾아와 부고와 함께 아빠의 지갑이 담긴 지퍼백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형사가 하는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들은 것인 양 또다시 한바탕 울어 젖혔다. 낮은 목소리로 유감을 표하던 형사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게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없는 두 번째 밤을 맞이하고 나서야 아빠가 진정 우리의 곁을 떠났음을 받아들였다. 안방은 금단의 구역이 되어 나는 엄마와 내 방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긴장이 풀린 나머지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지만 그마저도 금방 달아나버리곤 했다. 그렇게 혼곤한 상태로 있던 중 어찌 된 일인지 현관문 밖에 있는 센서등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다며 오빠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거실로 나가 보니 정말 그랬다. 사람이 오고 가지 않을 때는 금세 꺼지던 것이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불을 밝히고 있었다. 현관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오빠 방이기 때문에 그 주장이 틀렸을 여지는 없었다. 오빠가 느닷없이 현관문을 열어젖히는가 싶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밖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 와.”
그러자 놀랍게도 좀처럼 꺼질 줄 몰랐던 등이 머잖아 꺼졌으며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켜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나타나 주길 바란다는 푸념만 주고받았을 뿐. 그러다 정신을 잃듯 잠에 빠졌던가. 정신을 차려 보니 엄마는 조금 전 당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빠는 세 식구가 모여 있는 내 방에 들어서고는 평소처럼 장난기를 발휘하여 엄마를 뒤에서 놀라게 했다고.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여 엄마는 꿈속에서도 펑펑 울며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느냐’고 아빠를 힐난했다. 내 침대 위에 모로 드러누운 아빠는 줄곧 웃는 얼굴이었고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고 했다. 그러다 나에게 불을 좀 켜 보라며 닦달했지만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전등이 켜지질 않는다고 답했고 끝내 불은 켜지지 않은 채로 엄마는 꿈에서 깨어났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아빠가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포근함이 집안에 감도는 듯했다. 불면을 호소하던 엄마도 그 꿈을 꾸고 난 이후로 오랜만의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오빠와 나도 해돋이 이후에나 깨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꿈을 두고 아빠가 정말로 집에 다녀간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철썩 같이 믿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꿈처럼 그리워한다. 이제는 그때의 꿈마저 그리워지지만 아빠가 없는 이 세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근래에 꾼 꿈은 내 생각이 맞다고 역성을 들어주는 듯했다. 꿈속에서 나는 아빠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따가 집에서 보자던 사람이 오도 가지도 않아 나는 꿈속에서도 아빠를 찾아 헤매었다. 생전에 아빠가 우리에게 쓰기를 강요하던 위치 추적 앱을 켜서는 아빠가 있는 곳을 따라갔다. 위치 추적 앱이 가리키는 곳은 봉긋한 봉분 앞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엎드린 채로 땅이 꺼지도록 울다가 깨어났다. 몽중에서의 나도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만한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 무속신앙에 기대어도 보고 불교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이나 양자역학을 다룬 책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죽음의 순간에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티벳 사자의 서>도 읽어 보기 위해 구매했다. 내가 원하는 답을 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보다는 생의 근본이 무엇인지 이해해 보고 싶다.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에 따르면 “죽음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원소로 분해되어 결국 양자 상태의 입자가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우주의 최소 단위인 양자로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을 이루고 있던 양자는 관측 가능한 우주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과학적인 접근은 내게 잠깐의 안식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이승을 떠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생과 사를 가르는 것은 고작 육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몇 번이고 좌절한다. 생전에 지녔던 활력과 뜨거운 생명력이 한순간에 휘발되듯 사라지는 것이었다니. 나는 이 모든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라는 형상으로서 존재해 있는 것일까?
한 때 아빠였던 양자는 슬픔의 형태로 치환되어 내 안에 존재할 수도 새로 틔운 싹에도 존재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어디를 가든 늘 함께 동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아빠를 이루고 있던 양자가 내 꿈의 원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일지도. 양자역학이니 다중 우주론이니 뭐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날 짓누르는 무력감과 슬픔은 덜어낼 길 없어 무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내 물음에 대한 답을 언젠가는 찾을 수 있기를 바라 본다.
참고 기사: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1117/1165371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