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고고학

by 아무개

2001년 11월 경기도 양주의 어느 선산에서 신장이 백 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미라 한 구가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30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다섯 살의 모습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무덤은 조선 중기 이후 보급화된 상장례 문화인 회격묘로 조성되어 있었다. 회격묘를 쓸 때는 우선 흙구덩이에 석회를 채워 넣고 한가운데 목관을 올린다. 모래와 자갈을 넣어 반죽한 석회를 다시금 채워 넣어 그 위에 봉분을 쌓는다. 시간이 지나 석회가 굳으면 완전히 밀폐되어 진공 상태가 되므로 죽은 몸은 더 이상 부패하지 않는다. 당시의 장례 풍습 덕택에 댕기머리를 한 소년은 손톱 하나 유실되지 않고 영면에 든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강 건너 증조부의 묘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뉘어졌다. 그는 명주솜을 넣고 한 땀 한 땀 누벼지었을 색동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오월의 어느 봄날 사랑스러운 추억을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우연찮게 방영한 지 이십 년이 넘은 다큐멘터리를 봤다. 명실상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라고 일컬어지던 3D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제작된 것이었는데, 지불한 적 없는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방송이었다. 300년 전의 소년 미라를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묘가 쓰여진 때가 언제인지 유추하고 의학적인 관점을 통해 소년의 사인을 가려내기도 한다. 천년고도 경주의 천마총에서 보았던 금빛의 유물들처럼 대게 껴묻거리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소년은 제 아비의 바지를 이부자리 삼고 제 어미의 장옷은 겉이불 삼아 덮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부모의 옷가지 외에 다른 것은 없었지만 다섯 살배기 어린 막둥이를 차디 찬 땅 위에 차마 쉬이 뉘일 수 없었던 부모의 애통한 마음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현대의 미국 장례식에서는 삼베로 지은 수의 대신 고인이 가장 아꼈던 옷이나 가족들이 입혀 주고 싶은 옷을 고인에게 입혀 준다. 우리 역시 아빠의 옷장과 서랍을 뒤져 가장 새것에 가까운 것들로 종이가방을 채웠다. 추위를 기다리다 입어 보지도 못한 기모 셔츠와 붙박이장 한편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넥타이.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던 남색 바지를 비롯한 새 속옷과 새 양말까지. 이런 걸 두고 아끼다 똥 되는 격이라고 하던가. 포장을 뜯지도 않은 것들이 한 무더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것은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쯤 아웃렛 매장에서 산 뜀박질하는 맹수가 그려진 운동화였다. 꺾어 신은 탓에 뒤축이 완전히 무너진 오래된 로퍼를 버리고 새것을 실로 오랜만에 장만한 것이었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한량처럼 널브러져 “아빠 어디 가”하고 물으니 조선 무 같은 내 발목을 한 손에 잡아 들어 올리며 “운동”이라고 답하던 기억을 끄집어 내 본다. 그 무렵 아빠는 몇 번이나 금연을 번복하던 담배도 끊고 운동도 시작했다.


“다 좋은데 발등이 왜 이렇게 조이냐.”


아빠는 새로 산 신발을 신은 채로 제자리걸음하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서 새 운동화를 개시하기에 앞서 집안에서 괜스레 신고 벗기를 반복하다 안방부터 현관까지 슬렁슬렁 걸어 다니기까지 했다.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신발 끈을 구멍이란 구멍에 다 꿰어 넣으니까 끼지. 구멍 한 개는 남겨 놓고 묶어 봐.”


아빠는 내가 하라는 대로 곧장 신발끈을 고쳐 맸다. 한결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런 거였냐”며 멋쩍게 웃어 보이던 얼굴이 어제의 일처럼 선연하다. 장의사 말로는 고인을 관에 뉘인다는 것은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므로 신발은 원래 신기지 않는다고 했다. 제 아무리 양말을 신었대도 이런 날에는 맨발과 다름없을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얼음장 같은 발로 신발도 없이 이 추운 날 어찌 갈까 싶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던 운동화만이라도 꼭 넣어 주고 싶었다. 우리의 간곡한 부탁에 장의사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몇 번 신지도 못한 구두와 남색 잠바도 발치에 함께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행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불룩한 배에는 겨우 찾은 가족사진 두 장을 안겨 주었다. 하나는 내가 일곱 살 때쯤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2년 전 한국으로 가는 비행편의 경유지에서 내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었다. 그마저도 전면 카메라로 해질녘 때 찍은 것이어서 화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후지다. 카메라 앱으로 찍어서였는지는 몰라도 희끄무레한 보정이 덧씌여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형편이 조금 더 나아지고 여유가 남아도는 때가 오면 그때 제대로 찍으리라 결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다짐은 끝끝내 다짐으로 남겨지고 약속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때때로 내가 유난을 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다들 한 번쯤은 겪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인데 지나치게 골몰해 있는 게 아닌 가 하는 의심. 어쩌면 내가 만들었을 이 괴로움을 마음대로 떨쳐내 버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에게 내 슬픔이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 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꼴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40만 년 전부터 죽은 사람 옆에 물건을 함께 묻는 부장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토록 괴로운 것은 수십만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인간의 본성에 기한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항변해 본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슬픔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상실에 잇따른 슬픔은 어딘가로 치워버리거나 지워버려야 하는 골칫덩이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와 늘 공존해 있던 것이고 우리가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코끼리도 제 가족이나 동료가 죽으면 그들만의 장례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의 저자 케이틀린 오코넬은 “야생 코끼리는 죽은 코끼리의 몸에 흙을 뿌리거나 나뭇가지를 덮어 매장한다”고 설명한다. 어른 코끼리의 몸집은 너무 커서 죽은 후 최장 몇 년까지 그 자리에 사체가 남아 있는데 그곳을 자주 찾아오는 코끼리들이 있었고, 이들은 죽은 친구를 혼자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한다. 코끼리 조문객들은 장지에 갈 때마다 사체 위에 수시로 흙을 뿌려 덮어주었다. 어쩌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슬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먼 훗날 세상이 뒤엎어지고 천지가 개벽해 아빠가 있는 곳이 더 이상 추모 공원이 아니게 된다면. 그래서 어느 누군가가 아빠의 묘를 우연찮게 발견하게 되고 우리가 실어 보내 주었던 신발과 사진도 함께 발굴하게 된다면. 내가 다섯 살배기 소년의 무덤을 통해 참척의 고통과 슬픔을 보았듯 그들의 눈에도 내 슬픔이 비쳐질까?


keyword
이전 04화산 사람은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