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고쳐 드립니다

by 아무개

“O가이버가 못하는 게 어딨 냐?”


아빠는 자칭 ‘O가이버’였다. 스스로를 만능맨 맥가이버라고 칭할 만큼 손재주가 좋았고 잔재주가 많았다. 웬만한 것은 새로 사지 않고 모두 고쳐 썼다. 사람을 불러야 하는 일에도 당신이 직접 나서서 수리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공수해 온 형광등을 천장에 설치한다든가. 발품 팔아서 사 갖고 온 장판을 일일이 손수 재단하여 집안 전체에 깐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지랖까지 태평양처럼 넓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이었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는 딸내미 친구에게 하루동안 창문형 에어컨을 빌려 주기 위해 직접 수레에 싣고 가져다주기도 했고, 그 집에 가서는 나서서 침대 해체 작업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엄마가 늘 하던 진담에 가까운 우스갯소리처럼 아빠는 돈 버는 재주는 없어도 손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기가 막히게 잘했다. 결과물은 보기에 투박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섬세하고 꼼꼼했다. 쓸만해 보이는 부품은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썼다. 가령 오빠가 혼자 살았을 적에 썼던 밥상 다리를 따로 분리하여 쟁여 두었다가 컴퓨터 책상의 상판에 부착해 밥상을 만들어 썼다. 그 덕분에 집안 곳곳엔 아빠가 쌓아둔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흥부네 집구석이 따로 없다며 엄마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 쓸데가 있으니 모르면 그냥 가만히 좀 있으라며 호언장담하곤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막대한 양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아빠가 남기고 간 것들은 전부 치워야만 하는 유류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을 위해서 모아둔 것들의 종류와 수가 적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아빠가 애지중지하던 공구들은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언젠간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아빠가 보관해 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한국에서부터 바다 건너 멀리 이곳까지 짊어지고 온 생때같은 것들이기도 했다. 아빠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을 한낱 고물처럼 처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예외는 있었다. 아빠가 아끼던 물건들 사이에서 생전에 하던 일과 관련된 물품들이 간간이 나올 때마다 엄마는 터져 나오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모두 나중을 위해 아빠가 미리 쟁여 놓은 것들이었다. 군복을 오마주한 일바지 두 벌. 정체성이 의복보다는 걸레에 가까운 요란스러운 색깔의 티셔츠. 석면을 제거할 때 필수품인 방독면 필터. 이마에 장착해서 쓰는 헤드 랜턴 전구. 전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 거였다. 헌 것이든 새것이든 물건의 상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아빠가 하던 일은 오래된 건물에 남아 있는 석면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주 발행 면허가 필요한데, 아빠는 정기적으로 면허를 갱신하고 관련 교육을 받았다. 일감은 주로 도심보다는 뉴욕 주 위쪽의 변두리 지역에 많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작업 일정이 잡힐 때면 아빠는 주말에만 집에 머무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몇 주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아빠의 부재가 더욱 실감 나지 않았다.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집을 비운 것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더더욱 분통이 터졌다. 일하러 갈 채비를 할 때마다 챙겨 들었던 가방이며 일할 때 쓰이는 장비를 담은 시커먼 짐꾸러미도 망설임 없이 전부 내다 버렸다. 항상 부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터라 가장 먼저 폐기 처리될 운명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이 끔찍한 것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망할 것들 때문에 아빠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울분이 치밀었다. 하지만 막상 바깥에 그것들을 내놓고 나니 버려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일하러 떠나는 아빠를 배웅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겸언쩍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배웅을 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문단속을 할 요량으로 문 앞까지 나갔으니 안 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원체 살갑지 못한 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몸 쓰는 일을 하는 아빠를 배웅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썩 내키지 않았다. 일하던 도중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바닥을 짚은 손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도 손목을 움켜쥔 채로 집안을 거닐었던 모습도 떠오른다. 늘 앞서 걷던 아빠가 언젠가부터 가쁜 숨을 내쉬며 내 뒤를 부지런히 따라붙었던 기억과 음량을 크게 키우지 않고서는 음악 소리도 잘 듣지 못했던 모습까지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해 왔던가. 나는 그날 아침에도 아빠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 알았더라면 인사는 고사하고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을 테지만 이것이 정녕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면 조심히 잘 가라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해 주고 싶다. 알았다는 아빠의 대답도 듣고 싶다. 홀로 하는 인사는 작별인사가 될 수 없기에.


어릴 적 아빠가 내게 택시를 모는 당신이 창피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고작 중학교 3학년이었지만 그 질문이 함의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나는 세상 심드렁한 말투로 아니라고 답했다.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부도덕한 일도 아니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고 덧붙였다. “그래?”하고 대답한 아빠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서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빠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 대답엔 함의 같은 건 없었다. 정말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되레 좋았다. 등굣길에 가끔씩 공짜로 얻어 타던 아빠의 택시가 좋았다. 걷는 수고를 덜 수 있었으니까. 단지 그뿐이었다. 나의 철없음이 아빠에게 뜻밖의 기쁨을 안겨 준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이제는 도리어 내가 그때의 추억에 기대어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아빠는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사고 당시 아빠가 했던 작업은 주된 일과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부아가 나게 만든다. 아빠는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걸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워낙 겁이 없기도 했고, 남들이 꺼리는 궂은일은 그것도 못하냐며 차라리 당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그저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었다. 대가를 받는 일이니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까? 아빠에게는 어째서 예외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하지 않았음에도 그곳에 올랐던 아빠의 선택을 여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안전장비만 제대로 주어졌었더라면. 지붕이 아래로 꺼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더라도 이런 식의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덧없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며 나 역시 매일 같이 직장에 나가 시간을 때우고는 있지마는 먹고사는 것이란 진정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아빠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고장 날 때마다 처치할 수 없는 슬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내게 가르쳐 주었던 드릴 사용법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건만 무엇이든 고쳐 주던 아빠는 모든 걸 망가뜨린 채 떠났다. 수도 없이 원망해 보았지만 별다른 효용이 없어 곧 그만두었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부재는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고 망가진 일상은 결코 원상 복구될 수 없다. 정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어떤 가수의 수상 소감처럼 정말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미래가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쯤 아빠는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있거나 비옥해 보이는 땅을 일궈 집 한 채 정도는 짓고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한다. 넓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마당 한 편엔 텃밭이 있고 테라스가 있을, 먼 훗날 다시 만나게 됐을 때엔 완전히 갖추어져 있을 우리가 함께 그리던 우리의 집을. 한편으로는 삶이란 결국 고통으로 끝맺음되는 것이기에 아빠가 이 끔찍스러운 생의 굴레에 다시금 휘말리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해 본다. 죽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에 골똘해 있기보다 차라리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열렬히 신봉하련다.


그날 이후로 밥 먹듯이 하는 생각의 원료가 죽음이 되다 보니 내 임종의 순간이 딱히 두렵진 않다. 다만 혹여나 엄마보다 앞서 죽게 될까 두려운 마음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큰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아프지 않고, 불의의 사고도 당하지 말고. 잔잔히 내지는 굴곡 없이 직선에 가깝게 사는 것이 지금으로서 내가 가진 유일한 계획이자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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