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은 살아야지

by 아무개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셋이 얼싸안고 당장이라도 죽겠다고 공언한 적도 없거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건넸다. 마주쳐오는 시선을 애써 피했다. 차리리 고개를 숙이는 편이 나았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땐 동공에 힘을 풀고 상대방의 인중을 응시했다. 기분 나빠하는 티가 날까 봐서였다.


마음 같아선 핏대가 섰을 두 눈을 한껏 부라리고 싶었다. 울어 젖히느라 제법 단련된 뱃심으로 심도 있는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어쩌라고. 누가 그걸 몰라서 지금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반대의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걸 조언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무슨 자격으로? 나는 조언 같은 걸 구한 적 없는데. 그저 서투른 위로였을까.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조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산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의 기원을 알고 싶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의 창시자를 찾아내 저의를 따져 묻고 싶었다. 이걸 말이라고 지껄인 거냐고.


기운을 차리라는 함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죽을 만큼 힘들 테지만 어찌 됐건 살라는 뜻이라는 것도 안다. 눈앞의 죽음을 어루만지며 슬퍼하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악담을 퍼부어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산 사람은 개똥밭 위를 굴러도 살고,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을 때에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산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잃지 않는다. 때가 되면 배고픔을 느끼고 졸음이 밀려올 때마다 살아 있다는 치욕스러움에 몸서리쳤다. 그런 와중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일갈이 좋게 들릴 리 있겠는가. 나는 버젓이 살아 있는데 아빠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다들 안달 난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그러지 않아도 떠나보내야 할 것들은 내게 무리 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당장 매일 아침 집안을 가득 메우던 커피 향과도 이별해야 했고, 밤낮 가리지 않고 들려오던 코골이 소리와도 이별해야 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 한마디로 일단락될 만큼 쉬운 일이었다면 장례식은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의식으로 남겨졌을는지도 모른다.


사고 정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는 서둘러 아빠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다. 산업현장에서 일어난 사고였기에 장례식을 치르기에 앞서 반드시 부검을 거쳐야 했다. 사인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유 없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망증명서에 기록될 내용보다도 공란에 채워져 있을 글자 자체가 두려웠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을 똑바로 기억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날 이전의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얹지도 덜어내지도 않는 채로 두고 싶었다.


이른 아침 아빠를 부검의에게 인도하고 뒤돌아 내딛는 걸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빠의 모습이 보일리 없는데도 병원 밖으로 나와서까지 연거푸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아빠 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선택지는 세상에 없는 것이 되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집과 가까운 곳으로 아빠를 데려오고 싶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곳이라 어쩌면 아빠가 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체 길눈이 밝아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것 같았다. 아빠의 육신은 병원 내 안치실에 누워 있었지만 아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육체를 뛰어넘는 정신력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육체는 너무나도 쉽게 깨어지고 정신은 그것에 종속되어 있으니 더더욱 유약할 수밖에. 길을 헤매고 있을 아빠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상해 본 적 없던 아빠의 장례식을 가능한 한 빨리 치르고 싶었다. 장례식을 서둘러 치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병원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극심한 멀미에 시달렸다. 커브길을 돌던 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길가에 차를 세우고는 넋 놓고 토악질을 했다. 극렬한 애통의 무자비함을 받아들일 수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내 몸은 현실에 대한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은 있었다. 나는 아빠를 찾기 전 연락을 주고받았던 동료 아저씨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도 고용주 측은 아빠를 찾지 못했다는 말만 전했다고 했다. 아빠를 찾았다고 하니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어느 병원인지를 물었다. 내가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빠가 무사하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은 믿음의 형태로 바뀌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분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가 울먹이며 부고를 알리자 말을 잇지 못하고 물기 서린 탄성을 되뇌던 목소리를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길가의 단풍나무 이파리들은 천진하게 샛노랬고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햇볕이 그토록 따갑고 슬픈 것인지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살을 에는 비수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안방으로 향했다. 아빠가 벗어두었던 옷가지는 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아빠가 두고 나갔던 그대로 침대머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엄마가 아직까지는 체취가 잔뜩 남아 있을 베개를 부둥켜안고 잠시 붙들어 두었던 울음을 쏟아냈다. 오빠와 나는 그런 엄마의 곁에서 함께 울었다. 창문을 통해 주홍빛의 저녁노을이 침대 위를 내내 비추고 있었지만 침구는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한인 장의사를 수소문했다. 사실 수소문할 필요도 없었다. 근방에 있는 한인 장의사는 굳이 손가락으로 꼽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수가 적었다. 매장할 것이냐 화장할 것이냐의 문제를 두고 논의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빠가 불현듯 아빠와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려 냈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매장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있기 전 나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이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오빠가 회상하기를 선산을 다녀오는 길에 운전을 하고 있던 아빠가 뜬금없이 자신은 화장은 뜨거워서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아빠의 장례식은 아스라이 저 멀리 있는 티끌 만한 별처럼 까마득한 것이었다. 고혈압약을 때때로 복용하기는 했지만 음식으로 조절될 정도의 혈압 수치였고 그 외에는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으므로. 장난스레 나눈 대화도 유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걸까?


무슨 기성품 고르듯 아빠를 뉘일 관도 골랐다. 관의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나는 장의사에게 보통 많이 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값비싼 관으로 하면 종종 그것을 빼돌리는 경우가 있다는 낭설을 속으로 되새기면서 가장 좋은 것이 아닌 가장 무난하고 값도 딱 중간인 것을 골랐다. 그 밖에도 장의사는 사망증명서를 몇 부나 발급받을 것인지 물었다. 우리는 만약에 있을 일들을 대비하여 넉넉히 열 장을 요청했고 비용은 장당 청구되었다. 보통 뉴욕 주에서는 부검의가 작성한 검안서를 토대로 장의사가 보건 당국에 사망 증명서 발급 신청을 하는데, 원할 경우 유족이 당국에 직접 발급 신청할 수도 있다. 사망증명서는 후에 고인의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 해지, 주미 대사관 혹은 영사관을 통한 한국에서의 사망 신고 시 필요하므로 넉넉히 발급받아두는 것이 좋다.


장의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필요한 일부터 처리했다.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자 맡은 몫을 착실히 해나갔다. 나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준비해야 했다. 가지고 있는 독사진이라고는 이십 년도 훨씬 전에 찍었던 증명사진이 전부였다. 언젠가 아빠가 당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넙데데하게 보인다며 구겨서 버렸던 것을 내가 몰래 주워다가 보관해 둔 것이었다. 한껏 구겨진 두어 장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여분의 사진은 다행히 멀쩡한 덕에 아빠의 영정사진으로 쓸 수 있었다. 스캔한 사진을 장의사에게 이메일로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사진을 영정으로 쓰자니 마음 한 편이 영 불편해서였다. 하는 수 없이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솜씨를 발휘해야 했다. 포토샵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통해 아빠가 가장 원했을 너부데데한 얼굴의 면적부터 줄이고 화질 저하 때문에 흐릿했던 눈동자도 더욱 총명해 보이도록 살짝 매만져 주었다. 원본보다는 생기가 더 있어 보였으면 싶어 약간의 보정도 빠뜨리지 않았다. 푸른기는 없애고 노란 기운을 더했다. 이렇게나마 아빠에게 이제는 없는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소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례식 당일 자가용이 없는 우리는 큰 문제없이 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의 직장 상사가 우리 가족의 발이 되어 준 덕분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감사를 표한 뒤 최대한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뒷좌석에는 오빠와 엄마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고모가 타고 있었다. 고모는 직장에 휴가계를 내고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왔다. 마지막으로 고모를 보았던 것이 친조부모님의 장례식에서였으니 근 십칠여 년만이었다. 그동안 연락은 자주 주고받았으나 거리 때문에 왕래는 하지 못했었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크게 기뻐했을 것 같았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중 내 편에 있는 창문 바깥으로 주말마다 아빠와 함께 찾았던 마트와 아웃렛이 보였다. 그곳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되직한 울음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울음을 터뜨린 것을 숨기고만 싶어 애써 창문 너머의 바깥만 바라봤다. 하늘은 내 기분처럼 흐렸고 발인이 있을 내일에는 부디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의 장례식은 미국식으로 치러졌다. 관 뚜껑을 상반신 쪽만 열어 놓고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하는 식이었다. 사실 고모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 전장에 나가는 듯한 비장한 심정으로 집을 나섰었다. 그 덕에 오래간만에 아침밥도 든든히 챙겨 먹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빈소에 들어서기 전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문득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생각났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친척이 갑작스러운 병증으로 세상을 떠나 아빠와 함께 장례식장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보았던 식장 내의 정경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잘 정돈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참관할 수 있도록 관을 열어 두는 것이 내게는 충격적인 광경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례식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우리 아빠라니.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울분이 치밀어 곧장 입이 다물렸다. 게다가 삼일장이 익숙한 나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되는 이곳의 장례 문화가 낯설기만 했다. 보통 삼일 동안 장례를 치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의 장례식은 보통 하루나 이틀에 걸쳐 거행되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정해져 있어 시간 내에 식을 반드시 마쳐야 한다. 그래서인지 다시는 없을 아빠의 장례식이 물밀듯 밀려드는 고인들의 행렬에 빨리 해치워야 할 일감 중에 하나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은 몸은 실로 낯선 것이었다. 병원에서 봤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어서였을까? 머리는 멀끔히 빗겨져 있었고 뽀얗게 단장한 얼굴은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눈앞에 아빠가 있었음에도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집에 가자고 채근해도 아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아무리 화를 내어도 홀로 길길이 날뛰는 꼴 밖에는 안 됐다. 관 앞에는 기다랗게 생긴 낮은 소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 아빠의 품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고는 아무런 미동 없는 아빠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아빠를 불러도 아빠의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아빠의 얼굴을 눈에 많이 담아 두는 것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이목구비를 꼼꼼히 뜯어 살폈다. 그런 것도 재주라고 두피에 힘을 주어 움직였던 커다란 귀와 다듬지 않은 내 눈썹과 빼닮은 눈썹의 결을. 주름의 깊이와 콧볼 크기와 입술의 모양을. 이마에는 못 보던 점들이 보였는데 나는 그것이 죽음의 흔적일 것이라고 함부로 짐작했다. 머리가 뉘어져 있는 베갯잇에는 검붉은 핏자국도 보였다. 아빠가 겪었을 고통이 가시적인 것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아빠에게서 나는 소독약 비스름한 냄새도 맡았다. 방부 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미국식 장례 문화를 따르기로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더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과연 이런 방식을 원했을까?


장례식은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간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단이자 살아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가 창자를 쏟아내듯 목청 높여 울음을 토했던 것은 지금이 아니고서는 마음껏 슬퍼할 기회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려니 나는 최대한 아무렇게나 울어 젖혔다. 허투루 쓸 수 있는 시간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울었다.


내가 정의하는 장례식은 떠나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의식이다. 죽은 자는 목관이냐 철관이냐를 따질 수도 없고 관에 쓰일 목재를 고를 수도 없다. 의식을 미국식으로 치를 것이냐 한국식으로 치를 것이냐 혹은 특정 종교의 예법에 맞게 치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없다. 내 죽은 몸을 매장할 것인지 혹은 화장할 것인지도 논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리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과업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것은 이 세상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이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모두의 숙제이기도 할 테다. 죽음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임이 마땅한 데도 죽음은 그저 외면하고만 싶은 대상으로 분류되어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암실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삶에 한가운데서는 죽음의 기운을 쉽게 느낄 수 없어서일까? 그런 게 아니라면 너무도 아득한 것이라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으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함께 아빠에게 다녀왔던 날이었다. 나는 푸르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추모 공원의 전경을 멀리 내다보며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물음이기도 했고 가족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 자리도 미리 사놔야 하나?”


엄마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했다. 오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는 무슨 날짜 받아 놓은 사람처럼 그런 얘기를 해.”

“왜. 아빠랑 가까이에 있으면 좋잖아. 그러려면 미리 사 둬야지.”


죽음은 예정돼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토록 공포스럽고 무연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 내가 죽고 난 다음의 일들은 내 손아귀를 벗어날 것들이기에 가능한 한 많이 준비하고 싶다. 장례식을 치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므로 그것은 고려하지 않도록 한다. 아마도 한때 내 육체였던 것의 후처리 방법이나 장송곡정도는 준비할 수 있을지도. 내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개인 신상에 관한 것들을 열거한 항목도 만들어 두고 싶다. 해지해야 할 신용카드가 몇 장인지 항공 마일리지는 어디에 얼마큼 적립되어 있는가 하는.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그 때문에 서두르고 싶지도 마음이 조급하지도 않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이루기 힘든 꿈이라는 걸 잘 알지만 포부는 클수록 좋다고 하지 않던가.


덧붙여 혹여라도 주변에 사별자가 있다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힘이 아니라 부아를 돋울 뿐이니 관조적인 위로는 건네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때로는 배려심을 등에 업은 침묵이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몫을 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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