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나의 힘

by 아무개

그날 이후로 나는 자주 운다. 내 울음에는 맥락이 없다. 동네에서 소문난 울보였던 유년 시절에도 이유 없이 울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겠지만.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떠나보낸 나로서는 요즘의 내 상태가 여간 낯선 게 아니다. 우는 이유를 헤아릴 새도 없이 내 시야는 이미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샘솟는 눈물을 곧장 닦아낼 수는 있어도 틀어막을 방법은 없기에 그저 흐르도록 둔다. 꽉 막힌 코를 풀어내고 나면 낮때쯤 명랑하게 웃어 젖혔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러다 일련의 검열 과정을 거친다. 내가 진짜 즐거워서 웃었던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나. 이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웃어 젖혀도 되는 건가. 이게 나한테 가당키나하나. 그럴 자격이 있긴 한가.


모든 인류의 고향 지구별은 삶과 죽음이 불규칙적인 형태로 교차하다 못해 한데 뒤엉킨 덩어리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을 가르는 분명한 선이 존재하지만 시작점과 끝점은 결국 맞닿아 있으므로 구분할 수 없다. 태양계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어쨌거나 아침은 오기 마련이다. 수천수만의 죽음이 남겨진 이곳에서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아도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한다. 죽기 직전까지 반복될 이 당연한 일상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살아있다는 건 엄청난 기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로구나, 아직 내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우주로부터 끌어다 쓴 참 빚 같은 행운이로구나, 하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사소한 다짐조차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 자잘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좀처럼 쉽지 않다. 무언가에 깊이 데기라도 한 것처럼 망설이고 머뭇거리기 일쑤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무엇이 됐든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처절히 학습했기 때문일까. 앞으로 뭔가를 이루겠다는 생각은커녕 당장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마련할 의욕조차 없는 상태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계획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 막대한 행운을 빚져 놓고도 이렇게나 대책 없이 살고 있다니. 이런 모습을 아빠에게 보여 줄 수 없음에 내심 안도한다.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어도 막연히 그려낸 청사진 같은 건 있었다. 그마저도 간이 스케치한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제한 없이 구상한 미래가 있었다. 텃밭이 딸린 작은 단독주택에서 네 식구가 복닥거리며 사는 모습, 나이를 먹고도 부모님에게 빌붙어 사는 모습이 내 미래의 초상이라 여겼다. 아빠의 은퇴 이후 늦어도 3년 이내에 실현될 수 있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을 등지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원주택에서 유유자적 남은 일생을 보냈을 아빠는 가까운 미래나 먼 미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나를 저 멀리 뒤편에 두고 온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현재의 나는 잔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은 가짜이고, 진짜는 저 멀리 아득한 소실점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진짜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필 우리여야 했는지. 사방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 분명한 것은 오로지 그날밤을 기점으로 내가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빠를 기다리다 먼저 저녁을 먹고 밥상을 치웠을 무렵이었다. 나는 오빠와 함께 아빠의 뒷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나를 제외한 세 식구가 한국에 갔을 때 선산에서 찍은 것이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었는데도 아빠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날따라 아빠에게선 이상하리만치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일이 끝날 때면 어김없이 걸어오던 전화도, 일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보내오던 메시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 될 가능성은 생각 외로 희박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집으로 돌아오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탓이었을까. 여느 때와 같이 아빠의 연락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귀가를 재촉하는 전화를 한 통이라도 했었더라면. 정반대의 결괏값을 얻어 낼 수 있었을까?


난데없이 불투명한 현관문 유리창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한국어로 웅얼거리는 음성까지 들렸다. 드물게 사이비 종교인들이 안녕하시냐며 문을 두드릴 때도 있었지만 웬일인지 문밖의 목소리는 친숙한 이름을 발음하고 있었다. 사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근처에 사는 아빠의 동료 두 분이 우리 집까지 직접 발걸음 한 것이었다. 낡은 지갑과 각종 마트 적립 카드가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 꾸러미 그리고 통신 불능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모두 아빠가 늘 지니고 다니던 것들이었다.


아빠가 일하던 도중 크게 다쳤다고 했다. 아빠가 있을 병원에 가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가방에 지갑과 교통카드, 손소독제를 챙겼다. 기껏해야 다리가 부러지는 정도의 사고라고 짐작했다. 아저씨들과 함께 병원에 가기 위해 바깥에 나와 연락을 기다렸지만 의미 없는 통화만 오고 갈 뿐이었다. 아빠가 실려간 병원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빠를 태운 구급차는 동행인 하나 없이 홀연히 현장을 떠난 것이다. 일순간 교통카드를 괜히 챙겼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호송되었을 만한 인근 병원을 찾아 수차례 연락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911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관할 지역이 아니어서 신고 사실조차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사콜센터에도 문의했다. 당연히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전해 듣기로 아빠를 고용한 회사의 사장 아들이 현장 관리자 자격으로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아빠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번호로 아빠가 이송된 병원이 어디인지만 알려달라고 여러 통의 문자를 보냈다. 부재중 전화도 수 차례 남겼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튿날까지도 회사 측은 아빠를 찾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했으니까. 나는 그제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크게 다쳤다는 것은 다리가 부러진 정도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걸.


저녁 일곱 시부터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아빠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아홉 시까지는 견딜만했다. 응급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는 시간을 어림잡아 환산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시간이었다. 불쑥불쑥 고개를 드미는 직감을 찍어 눌렀다. 정말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며 발 구르는 엄마를 어르고 달랬다. 일단 기다려 보자고. 기다리면 연락 올 거라고.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들이 눈치 없이 떠올랐다.


'점심때 냉면 비벼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 이번에 강화도에서 사 온 청결 고춧가루로 엄마가 냉면 소스 새로 만들었잖아. 그거 넣고 비벼 먹었거든. 역시 국산 참기름은 달라도 한참 달라. 내일 낮에 같이 냉면 비벼 먹자.'


삽시간에 미래지향적 언어만을 구사할 줄 아는 멍청이로 거듭난 것 같았다. 손끝은 저릿하다 못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빠가 우리한테 연락 한 통 안 할 사람이야?"


엄마가 내게 따져 묻듯 말했다. 엄마의 눈시울은 진작에 붉어진 채였다. 나도 모르지 않았다. 아빠라면 손짓 발짓 모두 동원해 가며 전화를 빌려서라도 우리에게 연락했을 것이라는 걸.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다.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외면하려는 내 부단한 노력이 무색하게 비극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바깥은 적요하기만 했다. 거실에서 함께 연락을 기다리던 아저씨 두 분도 댁으로 돌아간 뒤였다. 세 식구만 남겨진 집안은 심해 밑바닥에 처박힌 잠수정의 내부와 빼닮아 있었다. 가슴팍에 납덩이를 얹어 놓은 듯한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자정이 코앞이었지만 아빠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간은 우리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없이 흐를 뿐이었다. 애 태우는 사이 날짜는 바뀌었고 애타게 기다리던 토요일이 되었다. 사고가 있었던 지역의 관할 소방서에 연락하고 나서야 우리는 아빠가 있는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연락했었던 문제의 그 병원이었다. 가장 먼저 연락했었던 그곳에 아빠가 있었다.


고통의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고통은 차가운 것보다 뜨거운 것에 가깝지 않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뜨거운 곳이 지옥이라 하였으니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고통도 뜨거운 것에 가까웠다. 화기에 이끌리고 이끄는 능력을 타고난 듯 내 몸에는 유독 데인 상흔이 많다. 돌이 갓 지났을 때쯤 영글지 않은 무릎으로 집안을 종횡무진하다 바닥에 내려놓은 뜨끈한 누룽지 그릇에 고명 얹듯 고사리 손을 담갔다. 예닐곱 살 즈음에는 가랑이에 갓 떠낸 맑은 콩나물국을 쏟았다. 손수 들이부은 것은 아니고 밥상 표면에 남아있던 물기에 의해 국 대접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내 사타구니에 돌진한 탓이었다. 모두 워낙 어릴 때 입은 상처인지라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흔적은 보이지도 않지만 살갗이 훌렁 벗겨지도록 뜨거웠던 감각만큼은 내 신경 세포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것을 만지기라도 할라치면 반사적으로 연상되는 사타구니와 콩나물국과 전도성 좋은 피부를 근거로 하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떠올릴 때 흔히들 피가 식는다고 표현하지만 그날밤 내가 느꼈던 것은 되레 그 정반대였다. 밑바닥 깊숙이 처박혀 있던 겹겹의 심상을 끄집어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퇴원 처리되었다 말하던 순간을. 정수리에 내리 꽂히던 통렬한 감각을. 연거푸 유감을 표하던 음성을.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던 오빠의 오금이 맥없이 꺾이던 순간을. 몸속의 핏물이 절절 끓기라도 하듯 속 깊은 곳이 견딜 수 없이 홧홧했다. 어쩌면 그 순간 내 영혼의 꺼풀이 모조리 벗겨진 것인지도 몰랐다. 죽은 살 껍질은 도로 갖다 붙일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이루고 있던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른 뒤 몇 주 동안은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기 싫었다. 누가 봐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휘말리게 될 것 같았다. 마치 그게 유가족의 자격 요건이라도 되는 양 반드시 슬퍼 보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씻거나 양치질할 때 시선이 거울로 가지 않게끔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다스렸다. 거울 위로 내 이마가 투영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선까지만 고개를 맞춰 들었다. 화장품을 찍어 바를 때를 제외하곤 거울 속 내 모습을 굳이 살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가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태곳적 미소를 확인해 봤다. 죽상에 걸친 미소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를 빗고 눈썹을 매만져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두 눈은 울분으로 가득했다. 내 꼴을 직시한 이상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 속의 내 모습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겨졌고 내 앞가림만 걱정하면 됐었던 배부른 시간은 이제 모두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천진하게 웃을 수 있었던 호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난데없이 처치 곤란한 슬픔을 짊어진 낯선 내 얼굴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행복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박의 여지는 없다. 덜 행복하다고 해서 심장이 덜 뛰는 것도 아니고 불행하다고 해서 별안간 숨이 멎는 것도 아니므로.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멀리 아프리카 대륙의 사파리까지 가지 않아도 내 발치에 누워 있는 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몸을 옆으로 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안락조차 누릴 수 없었던 유기견 시절에도 몽실은 제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신선한 밥과 깨끗한 물이 주어지지 않았을 적에도 몽실은 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애당초 생존의 목적이 행복에 있었다면 인류는 역사를 써 내려가기도 전에 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축척된 수많은 고통과 죽음과 슬픔을 떠올린다. 이 모든 것은 행복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일까?


여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일 테다. 이 멋들어진 이성을 탑재한 인간이라면 건설적인 미래를 구상하고 그에 걸맞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응당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글쎄. 먹고 자고 싸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인류가 대대손손 제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다 못해 우상시해 온 까닭은 어쩌면 타고난 결핍을 만회하기 위함이 아닐까. 밑바닥이 보일리 없는 암흑 같은 슬픔을 맞닥뜨린 인간은 결코 이성적일 수 없다. 이성적인 인간은 애간장이 끊어질듯한 슬픔을 마주할 때에도 치미는 생존욕을 꺼트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인을 바로 눈앞에 두고 허기를 느낄 것이 아니라.


뇌 과학의 니은 자도 알지 못하지만 행복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뇌의 작용일 뿐이라는 주장은 내게 적잖은 위안을 준다. 결국 인간의 몸은 생존 본능과 욕망의 총체이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무의식의 발현일 뿐이라고 등허리를 도닥여 주는 것만 같아서. 생존에 용이한 형질과 특성만이 유전자라는 이름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것이라면 내가 느끼고 행하는 모든 것은 생존 함수의 출력값인 셈이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짊어진 와중에도 허기를 느끼고 농담을 건넬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본능적인 지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삶 바깥으로 도망치고 싶고 사라지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일수록 동물적 본능에 더욱 충실하려 한다. 선대가 남겨 준 위대한 생존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싶다. 배가 고프면 생존에 필요한 열량만큼 밥을 충분히 먹고 졸음이 쏟아지면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토록 해야 한다. 이성적 사고는 생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누릴 수 있는 것이므로 어쩌면 무기력함도 생존을 위한 부동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기에.


나의 슬픔이 나를 향한 연민 때문인지 상실로 인한 것인지 혼동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자기 연민은 애도의 일부분으로 분류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설령 자기 연민이 마음속에 은근슬쩍 스밀지라도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 훤히 전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동정심을 구걸하기 위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아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까닭은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든든한 무언가여야 하며 생존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 직접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애도는 슬픔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별 수 있나. 슬픔과 절망을 동력 삼아 어찌 됐든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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