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은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마지막 절차인 발인을 마치고 나서도 좀처럼 실감할 수 없다. 매일 같이 봐 왔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과 이런 참극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진실을. 영원한 이별은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은밀히 약속되어 있었다.
2021년 11월의 어느 금요일. 미국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한 어느 산업창고의 지붕을 보수하던 중 일어난 사고였다.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십여 분 남짓 되었을 무렵 그렇게 아빠는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홀연히 떠났다.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귀가시간만 되면 멍하니 현관만 바라본다. 그날을 기점으로 유류품이 되어버린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그 빈자리를 바라보는 것부터. 사고가 있기 불과 며칠 전 아빠가 사다 놓은 양파 꾸러미에서 양파 한 알을 꺼내고, 함께 페인트칠했던 바람벽을 바라보는 것까지. 현실로 인식하는 매 순간이 난관이지만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또 무엇이 남았나 싶어 되레 간장이 끊어지는듯한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기억하는 것만이 함께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므로 나의 슬픔을 면밀히 적으려 한다. 내 슬픔에 주석을 달고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발단부터 차근차근 써 내려가는 것이 지당할 테지만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날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적잖은 고통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창작이 아닌 고작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을 글로 적는 것일 뿐이지만 내가 가늠할 수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얀색 바탕 위에서 연신 깜박이는 막대기를 온종일 바라보는 것 자체로 고역이다. 한 문단도 제대로 쓰질 못해 몇 달은 토막글로 남겨두기도 했다. 따라서 그날에 대한 기억은 가능한 여러 갈래로 나누어 서술하려 한다.
글은 나의 설운 마음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어느 누구든 나의 슬픔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종래엔 글쓰기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손쓸 수 없는 얄궂은 운명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하다못해 글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글이라도 써서 티끌만 한 숨통이라도 트고 싶었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마음껏 슬퍼하고 성내고 그리워할 수 있다. 보잘것없는 기쁨을 느낄 때나 하릴없이 슬퍼지는 때에도 오직 글만이 내 뜻을 받든다. 내 죽음조차 내 소관이 아닐진대 짧은 줄글조차 마음대로 휘갈길 수 없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서글픈 일일 것이다.
체기가 있을 땐 속을 억지로 게워내면 잠시일지라도 메스꺼움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첨예한 바늘로 손끝을 따는 방법도 있다. 눈앞의 토사물과 검붉은 핏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거짓말처럼 병증이 사그라든다. 깊숙한 데 응어리진 슬픔을 끄집어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작은 위안이라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미진할지는 몰라도 가슴께에 멍울진 설움을 글로써 토해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활자로 기록된 그날의 기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큰 도약이므로. 글쓰기를 핑계로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슬픔을 더듬는 것은 내 바닥을 살펴보는 일이고, 제멋대로 자리 잡은 슬픔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도닥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라 믿는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중 하나인 <주교>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옛날의 일들은 실제로는 그랬을 리 없는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으로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저승에서 아마도 우리는 먼 과거에 이승에서 살았던 삶을 바로 이런 감정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실 큰 효용은 없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때때로 최악의 선택으로 탈바꿈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행복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평온을 발밑에 두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한에 잠기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 그 자체로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 어쩌면 이승에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명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