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찬가

by 아무개

오랜만에 한국행 비행 편에 몸을 실었다. 봄기운이 감도는가 싶다가도 동장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지 않아 약간의 추위는 머물러 있었던 3월의 중턱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다녀온 것은 역사책에서나 봤을 법한 역병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전이었다. 그래봐야 지금으로부터 3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날을 기점으로 시간이 기형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일까. 여하튼 목적이 다른 때보다 뚜렷한 방문이었는데, 발목에 박아 놓은 철심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신호위반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였다. 서울에 있는 할머니댁 바로 앞 횡단보도의 한복판에서 나는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녹색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을 건넌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어쩌면 해가 떨어진 다저녁때 바깥으로 나돈 탓이었는지도. 오토바이는 내 오른쪽 발목에 처박혔고, 오토바이도 운전자도 나도 모두 당연시했던 일상의 테두리 밖으로 튕겨 나갔다. 사고 전후의 기억도 함께 튕겨 나갔는지 내 기억력은 여전히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신호가 바뀌어 발걸음을 떼고 난 이후의 일은 아예 없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석증 때문에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던 까닭에 이튿날까지도 누워만 있었다. 쓰고 있던 안경까지 박살나는 바람에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변 소음에 귀 기울이거나 시선을 내리깔고 부러진 다리의 안위를 살피는 일이었다. 병원 침상에 누워 내내 생각했다. 겨우 다리가 부러졌을 뿐인데도 기억을 찾을 수가 없는데 이보다 더 큰 사고를 당했더라면 내 몸이 죽은지도 모르고 사고 난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심령 현상을 다루는 방송에서 무당들이 흔히 말하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바로 이런 식으로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고 넘겨짚어 보기도 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처지라니.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련한 마음이 들었다.


다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급기야 사고 원인을 제공한 쪽이 다름 아닌 내가 아닌가 하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족들조차도 사고의 원인을 내게서 먼저 찾았다. 길 건너면서 휴대전화 본 거 아니냐. 뭐 하러 길을 건너면서 그 멀리까지 버스를 타러 가느냐며 나의 부주의를 먼저 의심했다. 그렇다고 내 발목 좀 부러뜨려 주십사 간청하며 길을 건넌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원체 겁이 많은 터라 위험을 자초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코흘리개 시절에도 또래 친구들이 이성을 잃고 앞다퉈 기어오르던 정글짐의 꼭대기는 내 안중에 없었다. 늑목을 가로질러 오르내리는 곡예를 펼친 적도 없었다. 상대방은 내가 무단횡단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제 안위만큼은 끔찍이 챙기는 지독한 겁보가 오밤중에 길을 건너면서 휴대전화를 봤을 리 만무했으니.


여느 운동 법칙처럼 사고 역시 일정 요건이 갖춰질 때 발생하는 우주의 섭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신호를 지키지 않은 오토바이 운전자의 과실이라든지.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고도 멀거니 서 있던 멍청함 때문이라든지. 보행자 우선 문화가 채 자리잡지 못한 도로 위 실정 때문이라든지. 사고의 지독한 습성은 몸소 겪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릇 사고라 함은 굳이 위험한 상황을 유발하지 않아도 기어코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것이라고. 나는 연초부터 느닷없이 부러진 발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단지 그해의 액땜 거리로 삼았을 뿐 내 시선은 사고의 저변까지 가닿지 못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기에 나는 함부로 아둔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방은 작은 상영관이 되었다. 본 적도 없는 장면이 천장 위로 투사되어 정자세로 누운 나를 짓누른다. 아빠가 지붕 위에 오르기 전 지붕 밑에서 바라봤을 시커먼 구멍을 본다. 어두컴컴한 지붕 위를 밝히는 조명 같은 건 없다. 구멍 주위를 에두르는 바리케이드나 안전 테이프 따위도 없다. 부자재로 대충 덮어둔 구멍 위를 딛고 서야 했을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턱없이 짧은 로프 때문에 갈고리를 끌러야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징후들이 무시되어 왔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사고의 징후는 끊임없이 포착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날 이후로 마치 당신의 몫인양 아빠가 놓쳐버린 세월까지 전부 끌어안은 사람처럼 보였다. 소화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골반통도 계속되었다. 몸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 거듭됐다. 종래에는 아프다는 호소조차 잦아들 정도로 엄마는 부쩍 생기를 잃어 갔다. 검진을 받아도 이렇다 할 원인은 찾지 못했다. 엄마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때때로 아빠를 원망하며 조용히 울었다. 시들다 못해 일부러 바싹 말린 꽃처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슬픔은 고통을 증폭시키기라도 하는 것일까. 혹은 고통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것일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혈압이 치솟을 때 아빠가 쓰던 혈압계를 가져다주고 종아리를 주물러 주는 것. 고작 설거지 따위의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처리하고 의료 보험을 받는 통증병원을 수소문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아빠를 떠나보낸 것처럼 눈앞의 일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부터는 마음속으로 뇌까리는 한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속절없이 휘감긴 인간의 모습이란. 무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난관이 지나치게 많은 거 아닌가. 이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나.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자문했고 자답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진저리가 났다. 출제자가 작정하고 답이 없는 문제들만 엄선한 시험지를 받아 든 기분. 내가 써낸 답은 당연히 오답 처리될 것 같은 기분.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씻는 행위가 난제처럼 느껴졌다. 움직이기 싫은 기분까지 진저리났다. 넝마처럼 늘어진 몸은 염력 같은 묘술을 부려야만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듯싶었다. 변기 위에 간신히 앉힌 몸은 물을 내리면 오물과 함께 미지의 정화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이 모든 감상은 목덜미에 물 조금 묻히고 나면 씻은 듯 금세 사라졌기에 역시 내가 게으른 탓이겠거니 어물쩍 넘겼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시의적절한 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엄마의 상태를 핑계 삼아 함께 한국에 다녀올 수 있는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번 여정은 나의 평안과 즐거움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어야 했다. 오로지 유희만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졌다. 마땅한 이유 없이 설레어서도 안 되고 어떠한 기대를 해서도 안 됐다. 그렇지 않고서는 항공편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만한 여유를 부릴 수도 없지만 그 기저에는 살아 있다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당일치기 여행 계획에 대해 떠드는 순간에도 애써 당위성을 찾았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행복은 쫓는다고 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순간 그 틈새로 기민하게 스며드는 것이므로 조금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됐다. 행복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운 한편 내게 있어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내기라도 한 듯 이상야릇한 성취감마저 느낀다.


아무것도 변해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내 고향 서울은 3년 전 내가 뒤로했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상공을 가로지르는 내내 허전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가 두고 온 것은 휴대전화 충전기와 목베개뿐이었는데도 헛헛함의 원천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어디를 가든 꼭 출발 전날 짐을 싸는 못된 버릇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인천의 활주로 위에 착륙하기에 앞서 뭉뚝한 모서리의 창문 밖으로 해상도 낮은 풍경이 나를 반겼다. 마치 내 것처럼 익숙하고 안타까운 뿌연 하늘은 변한 구석 없이 그대로였다. 기체가 지면에 맞닿자 온몸에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활주로 위를 서행하던 기체의 움직임이 멈추자 기내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번잡스러운 소음을 꿰뚫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승객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막 도착했어. 응, 이제 곧 내릴 거야. 그래. 내려서 다시 전화할 게."


단지 장거리 비행의 끝자락에서 흔히 주고받는 대화에 불과했지만 맥락 없는 울음이 복받쳤다. 오른손에 쥔 내 휴대전화는 죽은 듯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뜨일 만큼의 짙은 향수를 느꼈다. 마침내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형체가 눈앞에 아롱거리는 듯했다. 그것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을 아빠의 참견이었다. 인터넷으로 비행경로를 수시로 확인하고 도착할 때쯤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오던 아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귀중한 무언가를 되찾을 심산으로 집을 나섰던 건 아니었건만. 나는 내심 아빠의 흔적을 쫓고 있었던 걸까?


6002번 공항버스의 출발 시간이 임박했다는 안내 데스크 직원의 말에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와 쫓기듯 차체에 올랐다. 장거리 비행의 여파로 무릎은 끊어질 듯 욱신거렸고 씻지 않은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최종 목적지는 이 버스의 종점인 청량리역이었다. 엄마에게 탑승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푹신한 좌석에 몸을 맡겼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머잖아 해가 넘어갈 것 같았다.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은 더 넘게 걸릴 것이었다. 해가 뉘엿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설핏설핏 서러운 마음이 들어 눈을 감고 밀린 잠을 청했다.


청량리는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여섯 살의 엄마가 고향땅 강화도에서부터 바닷길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삭은 통통배를 타고 도착한 최초의 뭍이었고, 아빠와 백년가약을 맺었던 진주 예식장이 있었던 곳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생애의 두 번째 터전이기도 하다. 기억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중첩되는 얇다란 습자지 같다. 해묵은 것일수록 사실 관계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훗날 덧씌여진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정들었던 동네를 어째서 떠나야만 하는지 그때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작 아홉 살배기한테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 줬을 것 같지도 않지만 먹고사는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도 같다. 방을 한 칸 줄여 이사했던 데다가 장롱 깊은 곳에 처박혀 있던 이혼 신고서를 우연히 발견하고 난 후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야 할머니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달이나 먼저 와 있던 엄마는 배고프지 않냐며 대뜸 밥상부터 내왔다. 한국의 봄철에만 먹을 수 있는 데친 두릅과 초고추장 그리고 꼬막 무침이 나를 반겼다. 나는 밥과 반찬을 입에 욱여넣다시피 했다. 배가 고파서 속이 허한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집안으로 들어서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빠가 떠난 후 처음 마주하는 할머니와 삼촌의 눈빛은 아무래도 낯선 것이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날밤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는 아빠를 뒤로 하고 병원 복도에서 오빠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그때 전해 들었던 삼촌의 울음과 당신의 사위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말하던 울음 섞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불현듯 스쳤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사람을 등지고 쭈그려 앉아 가방을 풀어헤쳤다. 이내 선물로 가져온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며 오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느니 하는 현실에 관련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가짜 웃음을 짓는 것에는 워낙 인이 박힌 터라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지만 영문 모를 수치심이 눈물처럼 비죽 새어 나왔다. 추레한 꼴을 빼면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그랬다. 엄마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 주위를 감돌던 찰나의 어색함을 떨쳐내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피곤과 바깥 먼지에 찌든 몸을 씻기 위해 큰방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빠가 고쳐두었던 장롱의 손잡이를 보자마자 설풋 웃음이 샜다. 그곳엔 특유의 투박한 손길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발견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누덕누덕한 손잡이 위에 손끝을 살포시 갖다 댔다. 곧 부서질 것처럼 너덜거렸던 탓도 있었지만 나는 어떤 이유로 그것을 선뜻 그러잡을 수 없었다. 아빠가 지키지 못한 약속 하나를 떠올려냈다. 다음에 오면 새 걸로 바꿔 주겠다던 할머니와의 약속을. 그러나 이것을 빌미로 아빠와의 추억을 반추하고 그리움을 발화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볼일을 보러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섰다. 걸어가는 내내 터줏대감처럼 역전 초입에 우뚝 서 있는 시계탑과 그 앞에 오종종히 모여 있는 비둘기 떼와 분주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도 근방의 지리는 환히 꿰고 있다 자신했으나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풍경은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밤중에 도착했던 터라 거리가 뒤바뀌어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허망감이 솟고 실망감도 스쳤다. 서울은 시간이 머무를 수 없는 곳임을 간과한 대가였다.


본 적도 없는 건물 여러 채가 으스대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개중에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주위는 온통 내 옛 기억을 대체하는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지평선에도 값을 매겨 놓은 양 일정 층수가 아니고서는 탁 트인 조망 따윈 즐길 수 없는 동네로 변모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북적이던 거리의 반절은 건축 자재들의 이부자리로 전락했고 그 덕택에 버스와 자동차들의 거리는 멀어질 줄 몰랐다. 개발의 숨결이 닿지 않은 데가 없어 진눈깨비 짙게 내리던 날 목발 짚고 일부러 찾아가 먹었던 순댓국집도 온데간데없었다. 별다른 추억이 깃든 곳은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떠나간 자리를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기분이 울적해진다. 떠나보내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남겨지는 것에 대한 면역도 덩달아 키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눈앞의 전경이 더없이 못마땅했다. 개발은 과연 다수의 행복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하늘 모르고 높게 치솟은 건물을 두고 흉물이라고 연신 손가락질하다가도 느닷없이 서글퍼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어쩌면 이곳의 전경이 아빠의 마지막 기억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내 마음에는 종잡을 수 없는 슬픔이 번지곤 한다.


서울의 조망은 어쩐지 슬프다. 곳곳에 슬픈 역사가 배어 있기 때문일까. 큰 강줄기를 품은 도시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언젠가 백여 년 전 서울의 풍경을 담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빛바랜 필름 속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댕기머리를 한 아이들과 빨래터에 모여 앉아 빨래방망이를 두들기는 아낙들 그리고 갓과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노신사까지. 그중에서도 상여꾼들과 발맞춰 걷던 어떤 여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동영상을 되감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상엿길이 포착된 건 겨우 몇 초 남짓이지만 그는 내내 곡을 하며 상여의 뒤를 따랐다. 상여를 붙잡느라 굽힌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나는 그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실은 상여를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리가 절로 굽어지는 지극한 애통 때문이었음을. 토악질하듯 쏟아낸 울음은 허리를 펼 수 없게 했으니까. 일순간 하도 울어서 배창자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던 그날의 슬픔이 복받치는 듯했다. 백 년 묵은 슬픔일지라도 그것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가 보다. 백 년 전의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니. 사람들의 차림새는 이제는 낯선 것이 되었지만 각각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풍진세상에서도 웃음과 울음은 존재했다. 죽음은 곳곳에 있었고 삶은 그 곁을 지켰다. 옛 육조거리에 흩뿌려진 그의 설움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까.


유년의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모든 것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 살았던 그 동네는 여전히 잘 있을는지. 엄마가 위생장갑을 끼고 눈앞머리에 안연고를 발라 주었던 떠돌이 개 바둑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지. 아빠의 검지손가락을 움켜잡고 거닐던 황제빌라 앞 골목은 여전할는지. 친구들과 함께 거닐었던 개천의 둑방길은 무사한지. 한 번은 찾아가 볼까 싶으면서도 아홉 살 때에 머물러 있는 동네의 정경이 한순간에 사라질까 두렵기만 하다. 그곳에 마냥 좋았던 기억만 서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그때의 모든 희로애락이 겨우 이따위 현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릴없이 서러워지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사라져 간 모든 것들을 마음 위에 덧그려 본다. 영등포에 자리하고 있던 경방필 백화점에서 아빠가 종종 사다 주었던 기다란 피자빵의 맛과 언젠가 그곳에서 딱 한번 사 주었던 구슬 아이스크림의 질감을. 늦은 밤 떡전교 근처에서 종종 사들고 오던 불맛이 진하게 베여있던 양념 바비큐 치킨 냄새와 까르푸 표 연어 초밥을 먹으며 함께 들었던 대학가요제 출연자의 노랫소리를. 당신의 증명사진을 가리키며 저 잘생긴 사람은 누구냐고 묻던 외할아버지의 실없는 농담과 당신의 손에 쥔 내 책가방의 색깔과 내 어깨에 느껴지던 가벼움을. 전화를 받을 때마다 당신이 누구냐고 되묻던 친할머니의 웃음소리와 친할아버지의 누룽지 사탕을 한 움큼씩 몰래 꺼내 먹을 때마다 느꼈던 조마조마함과 앞을 볼 수 없었던 친삼촌을 이끌고 함께 사 먹었던 군것질의 맛을. 아무래도 내 고향 서울은 한 폭의 슬픈 풍경화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