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반려견용 장난감을 방 한구석에서 찾아냈다. 몽실이 우리 집에 온 지 꼬박 넉 달이 지났을 무렵 첫 미용을 받았을 때 가게 직원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무엇이든 먼지가 앉는 꼴을 보지 못하는 엄마는 진작에 버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 쓰는 건 좀 버려. 지저분하게 쌓아 놓지 좀 말고."
나는 엄마 손에 들린 장난감을 득달같이 낚아채며 말했다.
"아니, 이 멀쩡한 걸 왜 버려. 돈 주고 살려면 그래도 비싼 건데."
부모의 근성도 대물림되는 것이었던가.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안 쓰는 건 좀 버려라.' '이 멀쩡한 걸 도대체 왜 버리냐.' 제 품에 들어온 것은 떠나보낼 줄 모르던 아빠와 당장 쓸모없는 것은 지저분한 것으로 여기는 엄마가 늘 주고받던 대화의 일부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관망하는 편에 서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물딱지 같은 것을 두고 설전을 벌일 때는 엄마 편을 들곤 했지만. 그런데 이제는 도리어 아빠가 하던 말을 내가 이어받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별것을 다 닮는구나 싶어 엄마와 짧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도 공연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따금씩 잠에 들라치면 옛 기억의 편린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그때의 감정도 되살아나는 듯한 끔찍한 경험을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도 없고 없었던 일을 억지로 끼워 넣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절대 불변의 형태로 존재한다. 원상태의 과거는 현재와 미래 모두를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과거에 대한 회한과 참회는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과거의 모든 순간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면. 아빠가 했던 말들도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아빠를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게 말을 거는 일이고, 그에 따른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과거로부터의 응답인 셈이다. 제 아무리 꼴 보기 싫은 현실이래도 이를 부정해서는 과거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으리라.
쓰레기통 직행 예정이었던 문제의 장난감은 다행히 제 쓸모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뚝이의 기본 원리를 차용해 만들어진 것인데, 전체적인 모양은 계란형이고 둥그런 밑동은 여느 오뚝이와 다를 것 없이 묵직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몸통은 투명해서 내부가 환히 들여다보이고, 그 안에 간식을 넣을 수 있도록 뚜껑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줏빛이 도는 밑동 한 편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어 약이 오를 대로 오를 때쯤 이곳을 통해 간식이 밖으로 나오는 식이다.
나는 부리나케 장난감의 꼭지를 빙빙 돌려 열었다. 그 안에 말린 북어 간식을 손으로 뚝뚝 잘게 잘라 넣었다. 몽실은 내 역성을 들기라도 하듯 곁에 바투 앉아 내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몽실, 잘 봐봐. 이렇게 하는 거야.”
툭 하고 건드리면 몇 번을 오뚝오뚝 누웠다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다 끝내 간식을 토해내는 과정을 몽실에게 여러 차례 보여 주었다. 꼼짝 않고 내 옆에 앉아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는 줄 알겠느냐고 묻자 몽실은 이내 크고 동그란 눈을 귀엽게 치켜뜨며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바닥에 맞붙인 궁둥이는 연신 살랑거리는 꼬리에 덩달아 씰룩거렸다.
오뚝이 장난감이 간식을 뱉어내는 원리를 아직 깨우치지 못했는지 몽실은 그 앞에 앉아 한참을 골몰했다. 반질거리는 코끝으로 장난감을 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고 뚜껑을 깨무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비록 장난감이 반사적으로 오두방정을 떨 때마다 용수철처럼 폴짝폴짝 튀어 오르긴 했지만 몽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온 신경이 팥죽색 코끝으로 몰려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꽤 진지한 자세로 제 발치에 놓인 장난감을 연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엄마는 콧잔등이 한껏 구겨지도록 파안대소했고 멀찍이서 통화를 하고 있던 오빠도 너털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몽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괴롭기만 한 현실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기분이 들었다. 순결한 기쁨을 오롯이 만끽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천진난만한 개 한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나의 모든 감각을 몽실에게로만 곤두세웠다. 마치 그 이외의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순간 내 세계에는 방정맞게 휘청거리는 오뚝이 장난감에 발맞춰 토도독거리는 몽실의 발톱 소리와 어느 순간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말린 북어 조각이 풍기는 꼬릿꼬릿한 냄새, 그리고 접힌 두 귀를 너풀거리며 쉼 없이 겅중거리는 몽실의 움직임만이 존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이토록 즐거울 수 있다니.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이 개 한 마리가 이다지 풍족한 행복을 안겨 줄 수 있음에 나는 경탄했다. 가슴에 들어찬 것은 행복이 불어넣은 고양감이 분명한데 마음 한 구석은 왠지 시리기만 했다. 솜털보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털에 냅다 코를 들이받고는 두툼하고 탄탄한 몸을 껴안았다. 피부에 스며드는 뜨끈한 체온을 천천히 음미하고 구수한 몸내를 양껏 들이마셨다. 그러고 있기도 잠시 삽시에 코끝이 아릿해지더니 느닷없이 눈물이 질금 새어 나왔다. 손에 잡힐 듯 선연한 이 온기와 평화와 기쁨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몽실의 재롱을 지켜보며 함께 웃음 짓는 순간은 너무나도 고결한 것이기에 감히 붙잡아 둘 수 없다. 보탬만 있을 뿐 덜어 냄 없는 이 애수의 그늘은 눈치 없이 모든 순간순간에 드리워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노라 읊조리던 윤동주 시인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몽실은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포스럽기도 하다. 훗날 몽실의 빈자리가 나에게 어떤 슬픔을 가져다 줄지 너무나도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몽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커질수록 내가 감당하게 될 것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을 테다. 생명이 깃든 것은 무엇이든 그 끝이 존재하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 이롭겠지만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드는 것은 불가항력과도 같다. 나에게 미래란 두려운 것들로만 가득 채운, 반송하고 싶은 선물 꾸러미일 뿐이므로.
그러나 몽실은 언제나 내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한다. 잘 눌은 누룽지와도 같은 향내를 풍기는 앞발을 부여잡고 그의 커다란 눈망울을 응시할 때마다 생각한다. 매 순간 열과 성을 다하느라 바쁜 이 개는 우리를 구하러 온 인명구조견임이 틀림없다고. 어쩌면 확신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원’을 갖다 붙일 수 있는 대상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바라는 멍청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인 것일까. 혹은 내 성정이 무른 탓일까. 어느 쪽이 됐든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몽실을 포함한 가족들의 건강과 평안의 현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