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과업이라도 해결한 듯한 개운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제야 허기가 들었고 정신은 저 혼자 먼저 집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집에서 홀로 애태우고 있을 몽실을 생각하니 쉴 겨를도 없이 마음이 들볶인 탓이었다. 차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추모 공원에 다녀왔다. 꼬박 반년만이었다. 그동안 꽤나 그럴싸한 이유로 차일피일 방문을 미루었다. 날씨가 더워서 혹은 추워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가려고 마음먹은 날 비가 내려서. 동절기 주말에는 기차가 목적지에 정차하지 않아서. 핑계처럼 들린대도 어쩔 수 없다. 가령 생일이나 명절 같이 중요한 날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지 않고도 기꺼이 집을 나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이부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내키지 않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만큼은 기필코 가겠다고 작심하여도 그 결심은 마땅한 교통편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곤 한다. 도심 가까이에 살고 있는 덕분에 자가용을 몰아야 하는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야 있지만 대중교통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서는 변수를 피할 겨를이 없다. 주말에 운행되는 열차는 추모의 비수기라고 할 수 있는 늦가을부터 그다음 해 초봄까지 추모 공원역에 정차하지 않는다. 공휴일과 평일이 맞물려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굳이 기차가 아니어도 우버나 한인 콜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 문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터라 대중교통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이러나저러나 습관성 핑계일 뿐이려니 싶다가도 일상적 추모를 행하는 데 있어 경건함과 엄숙함은 역시 기대할 것이 못된다는 앞뒤가 안 맞는 소리만 되뇌게 된다.
기차를 타기에 앞서 역전에 있는 식료품점에 들렀다. 아빠에게 가져다 줄 꽃다발을 사기 위해서였다. 뉴욕 도심에서는 간단한 요깃거리나 식료품을 파는 가게에서 꽃이나 화분을 가판대에 내어 놓고 파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하필 어머니의 날이어서 그런지 노상에 내놓은 꽃다발의 가짓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그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숫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버이날을 하루로 퉁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은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따로 두는데 보통 어머니의 날을 더욱 극진히 챙기는 분위기다. 저마다 꽃을 고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엄마와 함께 아빠에게 줄 꽃을 고르고 있자니 겸연쩍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어릴 적 색종이로 만들었던 카네이션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버이날이랍시고 학교에서 만든 빨간 종이꽃이 아빠의 궁둥이에 의해 무참히 뭉개지는 모습을 건넛방에서 몰래 지켜봤던 기억은 어린 마음에 퍽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한때 카네이션이었던 것을 회수하기 위해 허둥지둥했던 내 모습까지도. 당시에는 각방을 쓸 만큼 부모님의 사이가 냉랭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시간 차이를 두고 각자의 몫을 전달해야 했다. 마치 어느 한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나는 은밀하고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내가 끼칠 수 있는 영향이랄 것도 없었겠지만 살얼음판 같은 평화가 어떤 식으로든 깨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남아 있는 반면 또 어떤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어떤 원리에 기한 것인지는 몰라도 만약 기억의 중추가 있다면 그것을 붙드는 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해 본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므로 기억의 유효성은 어떠한 일이 우리 마음에 얼마큼의 울림을 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닐는지.
손수 만든 카네이션이 처참히 깔아뭉개지는 결말만 아니었어도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한심스러운 생각도 해 본다. 그때 이후로는 최소한의 구색이라도 맞추겠다는 작은 노력조차 안 했던 것이 이제는 죄책감으로 남아 때때로 내 속을 들쑤시기에. 누군가의 해사한 웃음을 떠올리며 꽃을 고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까닭 모를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은 어쩌면 받는 이가 없는 꽃다발의 최종 목적지는 따스한 품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층층이 진열된 여러 다발의 꽃들 중 가장 조화롭고 점잖아 보이는 것을 고른 뒤 서둘러 플랫폼으로 향했다. 이번 어머니의 날에는 엄마에게 작은 액세서리라도 선물하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추모 공원역에서 하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차의 꼬리칸에 탑승해야 한다. 역마다 플랫폼의 길이가 천차만별인지라 정차하는 역의 플랫폼 구조에 따라 문이 열리지 않는 구간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듭해야 했다. 삼우제까지는 지인의 자가용을 얻어 탄 덕택에 별 무리 없이 다녀왔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출입구가 열리지 않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채 일말의 의심도 없이 가운데 칸에 탑승하고 만 것이다. 엉뚱한 곳에 앉아 있으면 대게 검표할 때 승무원이 어느 칸으로 가야 하는지 일러 주곤 하는데 그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렇다 할 언질이 없었다. 마치 반드시 길을 잃어야만 하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무릇 불행에는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으므로 열차의 출입문 역시 예외 없이 열리지 않았다. 전례 없는 상실감에 방향 감각마저 덩달아 잃어버렸는지 별안간 발재간을 부려대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목적지는 시야에서 유유히 멀어지고 있었다. 도망칠 곳도 방법도 없으면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땅이 꺼지는 기분. 이러다 자칫하면 발밑이 지구의 내핵까지 뻥 뚫리게 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없다는 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대체 무슨 잘못을 하였길래 하다못해 기차에서 마음대로 내리지도 못하는 걸까. 남의 속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리던 기차는 우리를 다음 역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오빠와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일은 이미 벌어졌건만 누구 하나 수습할 생각은 않고 때는 이때다 싶어 목젖을 쥐어짜며 꽥꽥댔다. 응집된 짜증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다 폐허처럼 보였다. 거무죽죽 을씨년스러운 하늘과 온몸을 후려치듯 거세게 부는 바람은 실로 인정사정없었다. 발 딛는 데마다 늪이었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아빠에게 꽃다발을 전해 주고 고상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는 선택지는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어느 하나 순조롭게 풀리는 일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배차 시간 때문에 반대편 열차를 다시 타는 것은 최선책이 아니었다. 결국 휴대전화로 택시를 호출했고 그마저도 도착지를 잘못 찍은 바람에 같은 운전기사에게 두 번의 값을 치르고 나서야 추모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 분에 못 이겨 울그락불그락해진 낯바닥은 둘째치고 바람결에 흠씬 절여진 머리카락은 덜 마른 미역처럼 얼굴에 제멋대로 들러붙기만 했다. 하다 하다 머리칼마저 내게 반기를 드는가 싶어 울분이 치밀었다. 길을 잃은 게 모두 아빠 탓 같았다. 잇따른 불운이 모두 아빠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그곳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아서였을까. 내가 딛고 선 땅이 이 세상 땅인지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시커먼 하늘이 원래부터 내 머리 위에 있던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일생일대 최악의 돌발상황은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대처 능력을 모조리 빼앗긴 사람들처럼 마냥 좌절하고만 있었다. 평온한 슬픔을 향유하기 위한 값을 그때 미리 치른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플랫폼의 맨 끄트머리에 서 있으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행선지 역시 우리와 같은 곳이겠거니 짐작하곤 한다. 날이 날이니만큼 꽤나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다들 누굴 떠나보냈기에 그곳에 가려는 걸까?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을까? 혹은 병환으로 인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아빠처럼 사고 때문이었는지도. 건물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지평선을 내다보는 척 그들을 곁눈질했다. 동류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추모 공원에 가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심 안도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 혼자만 이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비탄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는 증표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작은 설렘이 일곤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에게 반가움과 친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사별로 인한 슬픔이야말로 범지구적 공통 정서가 아닐까.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던 차에 기차가 굉음과 함께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탑승 티켓이라도 되는 양 꽃다발을 든 사람들만 같은 차량에 올라탔고 머지않아 열차는 저마다의 슬픔을 싣고 힘차게 출발했다.
어떤 목적지로 향할 때 수반되는 것들이 있다. 낯선 여행지로 떠날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든지, 외출 후 귀갓길에 만끽할 수 있는 소소한 설렘 같은. 하지만 아빠에게 향하는 길은 그 어떤 기대도 설렘도 즐거움도 없다. 아빠가 잠들어 있는 그곳은 오로지 결말만이 존재하고 그 어떤 새로운 이야기도 전개될 수 없는 곳이다. 그곳만큼 삶과 죽음의 대비가 명확한 장소가 있을까. 떠난 이들과 남겨진 이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고작 널 위에 쌓인 흙 높이에 지나지 않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세계이다. 마주하고 서 있지만 결코 맞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다른 세계인 것이다. 언제나처럼 저쪽 세계로 건너가는 동안은 그 어떤 것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유리창 너머의 정경과 우거진 녹음 위로 내비치는 따가운 햇살까지도. 전부 나와는 무관한 건너편 세계의 풍경처럼 보일 뿐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그 위를 겉돌기만 했다. 나는 창밖 세상으로 녹아들 수 없었다. 그곳에 간다는 행위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내 슬플 수밖에 없는 이 여정은 내 방 침대 위에 드러눕고 나서야 갈무리될 터였다.
추모 공원은 도심지로부터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에 위치해 있다. 생김새에 걸맞게 '롱 아일랜드‘라고 불린다. 장지를 고를 때 장의사가 일러준 바에 의하면 이곳의 토양은 지리적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흙이 아닌 모래라고 한다. 발인하던 날 매장 절차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아빠의 새집이 될 자리 앞에는 간이 천막이 쳐져 있었고, 그 아래엔 장의사에게 미리 요청해 두었던 은박 돗자리도 깔려 있었다. 조문객들은 정해진 순서 없이 그 위에서 절을 하거나 묵념했다. 안치된 관 위로 준비해 둔 술을 뿌리거나, 하얀 플라스틱 양동이에 따로 담겨 있는 흙을 한 삽씩 떠서 뿌리기도 했다. 어김없이 내 차례는 돌아왔다. 절을 두 번 올리는 것으로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나 관계자들이 하는 양을 망연히 지켜봤다. 네모나게 파 놓은 구덩이 아래로 흩뿌려지는 미상의 가루가 느닷없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은 다름 아닌 ‘정말 흙이 아니라 모래가 맞구나’였다. 슬퍼하기도 바쁜 순간에 왜 하필이면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정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쭉 내달리다 보면 막대한 부지의 추모 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언뜻 보기에 말쑥하게 조성된 평범한 공원 같다가도, 발밑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딛고 선 곳이 누군가의 묘역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이곳에도 나름의 규칙이랄 게 존재하는데, 공원 입구에서부터 멀어질수록 이 세계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게 비석이 세워진 곳은 한 세기 훨씬 이전에 태어나 죽은 사람들의 터이고, 바닥에 평평한 명패가 박혀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이주한 사람의 터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명패에 푸른 녹이 끼어 있다면 1800년대를 살았던 사람의 묘지일 수도 있다. 이 추모 공원의 설립연도가 1902년임을 고려하면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공원 초입에서부터 아빠가 있는 곳까지 도보로 어림잡아 십오 분이 소요된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냅다 앞만 보며 걷거나 발치에 즐비해 있는 명패에 새겨진 글자나 읽는 것이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를 계산한다. 요절한 사람의 묘지를 지나칠 때면 더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빠가 이승에 머물렀던 기간이 저 사람보다는 훨씬 길구나 싶은 막돼먹은 안도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반대로 장수한 사람의 명패를 읽기라도 할라치면 한없이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명패를 위안 삼는 것으로도 모자라 망자의 나이를 가지고 내가 얻게 될 위안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 꼬락서니가 너무나도 천박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나는 이 의미 없는 짓을 쉽게 그만둘 수가 없다.
가져온 꽃다발의 포장지를 완전히 벗겨내고 묘역에 마련돼 있는 화병에 한 움큼의 꽃을 꽂아 넣었다. 그 안에 따로 챙겨 온 물도 쏟아부었다. 덕분에 황량하기만 했던 소경은 제법 다채로워졌지만 엉뚱한 활력이 돌고 있었다. 갖가지의 꽃송이를 느릿하게 훑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통이 썩둑 잘린 꽃포기들은 머지않아 시들어 버리겠구나. 여기엔 모두 죽은 것들만 모이게 되어 있구나 하는. 그러나 며칠 새 말라비틀어질 한 줌 생명력일지라도 이곳 한해서는 생동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지도록 서글퍼지는 것은 어쩌면 그 대비 때문일까.
황동색의 구리 명패를 마치 아빠의 넙데데한 얼굴이라도 되는 양 나는 집에서 가져온 키친타월로 벅벅 닦았다. 돋을새김 되어 있는 아빠의 영문 이름과 생몰연월일 사이사이에 끼인 흙 부스러기도 꼼꼼히 털어냈다. 어쩌다 아빠의 머리가 뉘어져 있다고 추정되는 곳을 밟기라도 할라치면 엄마의 벼락같은 꾸지람이 귓전을 울렸다. 잔디를 지르밟았을 뿐인데도 한순간에 아빠의 머리를 짓밟는 패륜아가 돼 버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행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이 이곳에서 만큼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어떤 이는 묘역 주변의 잔디를 새치 솎아내듯 정성스레 다듬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명패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기도 한다.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나 지침이 있는 것처럼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기행들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남들에게 들킬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무표정이나 약간의 미소가 사회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까닭에 비애에 찌든 얼굴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눈물로 푹 젖은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다. 오는 길은 천근만근 같아도 가는 길은 발걸음이 사뿐하기 그지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묵혀둔 슬픔을 아무렇게나 쏟아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곳에는 오로지 떠난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만이 존재한다. 죽음은 불길한 것.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슬픔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것. 이 모든 암묵적인 약속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인종과 나이, 성별이나 종교관 내지는 가치관을 초월하는 영원한 슬픔만이 머물러 있을 뿐.
아빠에게 조만간 또 오겠다는 빈말로 훗날을 기약하고는 기차역으로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저 아저씨 좀 봐봐.”
엄마가 조심스레 눈짓한 곳에는 한 중년 남자가 돗자리 위에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꽃잎을 솎아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조금씩 늦추고 남자가 하는 양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분명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주변엔 들어주는 이 하나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는 그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비쳤다. 눈 시리도록 잘 정돈된 잔디 위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은 비애뿐인데도 그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방금까지 맨바닥에 주저앉아 말없이 눈물을 훔치던 우리의 모습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순간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그가 들였을 숱한 노력에 대한 존경이기도 했고 슬픔의 어느 극점에 이르렀을 그에 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무덤가에 앉아 여상스레 대화를 하던 남자를 보며 내가 느꼈던 일련의 감정은 훗날을 기약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일은 약속된 것. 슬픔은 길들여야 하는 것. 현실을 직시하고 견뎌내려는 의지. 보이지 않지만 올라서야 할 고지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대와 설렘도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나는 나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의 삶을 회고하면서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했다. 그는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신을 경멸했다. 그 문제들이란 이를테면 저녁으로 무엇을 먹게 될지, 특별 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으로 바꿀지 말지, 끊어진 신발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극심한 자괴에 빠져 있던 그는 불현듯 쾌적한 강의실에서 강제 수용소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그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는” 경험을 한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를 통해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다”라고 증언한다.
지금껏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리라 생각한 적도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기대는 나 모르게 내 정신 어딘가에서 자생하고 있었다. 아빠 곁에서도 내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 것처럼 그것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혼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나의 슬픔은 더디지만 착실히 정돈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