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구름이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 숙혜는 할머니 집 마당에 서서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가 삭막한 마음의 잔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그녀에게 잠시 위로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지워지 않았다. 엄마의 폭력과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이곳으로 온 그녀였지만, 일상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숙혜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가 가출하기 전, 그녀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홀로 갇혀 있던 공포의 시간을 보냈다. 그 기억은 마치 지워지 않는 상처처럼 그녀의 꿈속에서도 나타났다. 이렇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지만, 숙모의 차가운 시선과 날카로운 언어가 다시 그녀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숙모와의 생활은 또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매일 식탁에 앉아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것은 숙혜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숙모의 한마디에 따라 하루의 식사가 편안할지, 아니면 혼자 주방에서 식은 밥을 씹으며 눈물을 삼켜야 할지가 결정되었다. 어떤 날은 모두가 자리를 뜬 뒤에야 비로소 주방에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방 안에서 눈물을 훔치던 어느 날, 그녀는 희미한 따스함을 발견했다. 할머니가 몰래 두고 간 컵라면 박스가 문 옆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작은 배려는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고, 그 박스를 볼 때마다 숙혜는 자신이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숙모의 차가운 언어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올 때마다, 비록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숙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상처를 반드시 잊을 수는 없겠지만, 이제 불안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