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전화는 언제나 긴장된다. 수신자 미상의 택배를 열어보는 기분이랄까. 수화기 너머로 말보다 숨이 먼저 터져 나오는 구급대의 신고 내용을 듣고 있으면 안 그래도 미어터지는 응급실을 어떻게 정리하고 기다려야 할까 고민하게 만든다.
며칠 전 mental change 환자에 대한 119의 전화가 왔었다. 50세 남자로 어제까지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의식이 없고 산소포화도가 80대로 떨어져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머릿속에는 최악의 모습이 그려졌다. 현장에서 병원까지 20분. 그 시간 동안 심정지로 이어진다면 모든 일을 멈추고 달려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컨디션을 확인했다. 다행히 숨은 쉬고 맥박은 뛰고 있었다. 응급의가 빠르게 환자 상태를 보고 저혈당에 준하는 치료를 시작했다. 살 수 있다. 명백히 살 수 있다.
몇 시간 뒤 환자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무기력해지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줄곧 머리끝까지 예민하게 서있던 더듬이가 수루룩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중환자실로 올린 환자들 중 대다수는 다음 날, 조금 더 길면 그다음 날 죽었다. 오늘도 살려냈다는 자부심은 '장례식장에 인계함'이란 마지막 기록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감사했다. 죽지 않아서. 이제는 볼 일 없겠지만 기록 속 환자의 상태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혈압이 유지되지 않아 인공호흡기에 각종 약물을 투여하고 있어도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적어도 죽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출근시간 직전이 되면 무섭다. 살려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한 달에 몇 명씩 떠나보내던 신규 시절, 의료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형이 내게 말했다. 사람 죽고 사는 문제는 신의 영역이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나는 되려 말하고 싶다. 내 슬픔이 신의 의도를 반하는 행동이라면 기꺼이 기도하겠노라고. 나를 들어 쓰셨으니 염치가 있으시다면 내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참고 또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