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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Oct 22. 2023

베르길리우스처럼

 대학교 3학년 시절, 내 첫 성인 간호 실습은 중환자실이었다. 그곳엔 말마따나 '중환자'라고 불릴 사람이 있었고 당시 내 눈에 그들은 이때껏 내가 배운 책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곳에서의 내 첫 주는 '배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이 주를 더 머물렀다. 그러자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장면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서의 재원 일수가 한 달이 넘어가던 할머니 한분이 꼭 그러했다. 탐구의 영역으로 바라보던 내 시선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무뚝뚝하게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던 내 손은 정성이 묻어 나왔다. 정은 그렇게 생겼다.


 실습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던 날 환자는 퇴원했다. 정확히 병동으로 가는지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가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행방을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내 침대 위에 누워 '아파...'만 되풀이하는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띤 채 휠체어에 앉은 모습은 지난날 어떤 불만이나 미처 따지지도 못한 것들을 담담히 잠재울 수 있는 순수한 기쁨이 감돌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대변냄새 가득한 이런 음침한 곳을 떠나 일상의 숨을 다시금 마실 수 있다고 이해됐을 때 진정 살아있음은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벚나무의 꽃이 지고 새로운 잎새들이 푸르게 익어갈 때 할머니는 그렇게 영영 떠났다. 떠나는 자동문이 열리는 틈새에서 쏟아지는 신선한 바람은 마치 저승 이제 막 빠져나온 오르페우스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느껴졌다.


 문이 열리기까지는 한 달이나 넘게 걸렸으면서 손을 흔들며 남은 삶의 축복을 빌기엔 자동문은 야속하게도 금방 닫혀버렸다. 나는 반투명한 문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을 잠시동안 묵상하듯 쳐다봤다. 그러다 조금 전 세상의 생명을 가득 담은 바람이 지나간 길을 환희에 벅찬 두 눈으로 좇았을 때 나는 이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은 머지않아 추락하는 에우리디케의 운명이 비통한 자들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곳에서 멈췄다그들의 눈은 가히 이곳 저승에서의 구원이 오직 신의 자비뿐이라고 고백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 손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내 손에 맡겨진 남은 이들의 숨이 스틱스 강 위를 지나는 배에서 어이없게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처럼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오르페우스처럼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그 끝이 절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만날 수많은 에우리디케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끝없는 저승의 밑바닥으로 몸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느 꽃이 필 때 자신의 손으로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한순간도 실족하지 않도록 저승을 인도할 안내자로서 사명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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