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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Oct 22. 2023

짜릿한 퇴원의 순간

 병동에서 근무하게 되면 퇴원하는 환자에게 감동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신규에게 퇴원이 가진 의미는 자리를 치우고 새로운 환자를 받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찾아오는 바람은 예외 없이 짜릿한 경험을 선사한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70대 환자가 응급실을 경유해 입원했다. 교통사고로 인해 경추가 부러지고 온몸 곳곳에 찢긴 상처들을 소독한 흔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연신 끄윽끄윽 대며 말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은 당시 상황이 심각했음을 알아차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중환자실이 아니라 병동, 그마저도 내과 병동에 보내졌다면 의사들의 판단 하에 경증으로 분류되었으리라. 실제로 병동에 올라오는 교통사고 환자들은 길어봤자 한 달을 넘기지 않고 퇴원했다. 그렇게 첫인상은 좀 많이 다친 금방 갈 사람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그 환자는 조금 달랐다.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움직이기는커녕 말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어했다. 이제 막 반년이 넘은 간호사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의사들이라고 뾰족한 수는 없는 듯 보였다. 주치의를 맡은 신경외과 과장이나 의뢰받은 정형외과 전문의, 신경과 또한 어떤 후유증에 대한 가능성만 제시할 뿐 결국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환자 본인의 의지에 따라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는 빼먹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줄 기대했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만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대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면 차라리 무당을 불러다 굿이라도 해봐야 되나라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오래 누워 있으니 폐렴과 욕창이 생겼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탓에 산소포화도는 위험한 수준으로 자주 떨어졌다. 한 번은 밥을 먹다 사레가 들려 즉시 suction을 했지만 좋아지지 않아 결국 중환자실로 가기도 했다. 좌우지간 병동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환자는 콧줄을 통해 캔에 담긴 액체를 주식으로 먹었다. 턱의 기능이 멀쩡했던 사람이 씹어먹는 자유를 박탁당하자 그 화 때문에 콧줄을 자주 뽑았다. 덕분에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콧줄을 다시 넣을 수밖에 없었고 달인의 경지에 이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폐에는 하수구 길이 새로 생긴 것처럼 하루에도 수 차례 가래를 뽑아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차라리 폐와 기관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세숫비누로 박박 문지르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욕창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는데 하루  번씩 소독을 해도 욕창의 구멍은 날이 지날수록 깊어져만 갔다. 그래, 이렇게 죽어가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우린 하루에  번이고 누워있는 환자를 억지로 앉히며 침상 밖으로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불행  다행이라면 들릴   듯한 욕설을 뱉으면서도 어떻게든 앉아보려고 환자 역시 안간힘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환자는 휠체어에 타는 것을 성공했다. 침대에서 휠체어까지 꺼내는데 장장 3개월이 걸렸다. 우리는 보호자들에게 병원 밖을 산책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했다. 그 해 여름은 지독한 폭염으로 인해 세상 모든 이들을 젖게 만들었고 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땅 속 깊은 곳에 영원히 눕히는 것보다는 옳다고 생각했는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와 휠체어에 옮기도 내리 고를 반복했다. 산소수치는 여전히 떨어져서 이동할 때면 산소통을 매고 움직였고 그마저도 10분 남짓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휠체어에 활동이 자유로워졌다고 평가됐을 때 드디어 물리치료실에 갈 수 있었다. 관절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심해질 줄만 알았던 x-ray상의 폐는 뿌연 음영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몸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당연히 욕창에도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환자는 턱으로 음식을 씹는다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산소를 중단하기로 한 이후로 비교적 한가한 주말이면 나는 환자에게 워커바를 잡게 하고 세상 어떤 걸음보다 느린 마음으로 함께 병동을 산책했다.


 반년이 넘었을 때 비로소 환자는 퇴원했다. 여전히 가래를 끓고 목에 보호대를 찼으며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아서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쉰 목소리로 '고생했어' 툭 뱉었다. 그 한 마디가 짜릿하게 느껴졌다. 옥수수 알갱이가 팝콘처럼 터지는 그 순간 같은 기분. 문득 실습생 시절 느꼈던 감정이 밀려왔다. 다 찢기고 썩어 가는 타인의 삶에 내 삶 한 조각을 떼어다 채우기로 다짐한 옛 정의로움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환자가 떠난 뒤 나는 퇴원자리를 치웠다. 떠난 자리에는 여름처럼 꿉꿉하고 기분 나쁜 장마의 흔적들이 우중충한 모습으로 가득할 것 같았지만, 떠난 이들의 안녕과 함께 나쁜 기억 또한 건너뛰어진 것처럼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시간들의 위로 나는 또 한 번 새 시트를 깔고 하얀 베개를 준비했다. 다음번 찾아올 계절도 모두의 안녕과 함께 훌훌 날아갈 것임을 믿는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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