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오브브라더스'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이지중대 대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특히 여러 에피소드 중 바스토뉴를 무대로 그린 의무병 유진과 하사관 립튼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지속되는 포격에 부상자들이 하나 둘 속출하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멀라키에게 립튼은 잠시동안 전선 뒤로 가있기를 제안한다. 그러면서 인상 깊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불과 50km 밖에 한, 두 시간 나가있는 것도 병사에겐 큰 위안이다.'
내레이션의 말대로 나 역시 얼마 전 우연의 계기로 6 오프를 받아 휴가 겸 교회 수련회를 떠났다. 항상 일-집을 반복하는 극도로 예민해진 일상에서부터 꽤 긴 시간 병원을 벗어나 타지에 있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수련회 장소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나는 바다의 음유시인인 냥 되도록 천천히 그리고 지긋이 걸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행사인 만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청년들이 모였다. 개중에는 간호사도 더러 있었는데 나는 그들보다 연차가 높은 편에 속했지만 병원 이야기에는 전혀 껴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남자들이 모이면 나올 수밖에 없는 군대 이야기 같았다. 내가 힘드네, 자기가 더 힘드네 시비를 가리기도 하고 본인들이 겪은 쾌활한 에피소드를 연이어 풀어댔다. 물론 나는 군대 이야기와 병원 이야기 양쪽 둘 다 관심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녹색 십자가를 벗어난 지 겨우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병원에서의 감정이 스며드는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어서 줄곧 침묵을 지켰다.
이제 막 간호학과에 진학한 어린 학생들은 임상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질문했고, 올해 입사한 신참 간호사 혹은 만 일 년을 채운 선배 간호사가 신나게 병원욕과 환자욕을 해대며 이미 겪어본 나의 반응을 은근히 살폈다.
한창 이야기가 붉어질 즈음 한 사람이 소리쳤다. "내가 볼 때 탈임상은 지능순이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확인시켜 주는 듯 나를 보고 또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렇지 않나요?" 라며 내게 분명히 강조했다.
욱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환자 하나 잃지 않기 위해 매일 8시간 내지는 12시간 모든 정신력과 체력을 쏟아붓는 나를 비웃는 듯한 말이었다.
내게 세 번째로 되물었을 때 나는 유연한 태도로 "그럼 나는 저능아란 소리야?"라고 되받아쳤다. 그 말 한 마디에 모임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웃으며 질문 한 사람을 노려봤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 따위 소릴 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었다.
병원이야기가 길어지는 탓에 나는 피곤함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달이 얇게 뜬 밤바다는 나를 걷고 싶게 만들었다. 수평선을 오른편에 두고 걸으며 휴가를 떠나기 전,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의 결말이 문득 궁금해져서 근무 중인 선생님께 연락을 했다. 한 차례 고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안정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게 왜 궁금했는지 알 수 없었다. 병원으로부터 300km가 떨어진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에 있으면서도 병원이야기는 죽어도 하기 싫고 듣기도 싫어했으면서 말이다. 산책길을 반쯤 걸었을 때 '저능아란 말이 꼭 틀린 말도 아니긴 하네'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겨우 전선에서 떠나와 압박감에서 벗어났는데 저 멀리서 또다시 포격 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숱한 병사들이 돌아가길 마다하지 않았듯, 내게도 돌아가야 할 전선이 있다는 것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멀라키가 대대본부로의 전출을 거부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