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초등학생 시절, 매 년마다 장래희망을 그림으로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딱히 되고 싶은 것이 없어, 그리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미술 시간이 그렇듯, 무엇이든 그려내야 했다. 따라서 때로 그림 속의 나는 미용사가 되기도 했다가, 엄마가 되기도 했다가, 파일럿이 되기도 했다. 무엇하나 진심으로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충 떠오르는 것들을 그려냈다. 당시에는 어린이는 당연히 꿈이 있어야 한다고 모두가 낭만적인 기대를 했다. 꿈이 없다고 말하면 이상한 어린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이상한 어린이인 채로 어른이 되었다.
어학원은 연령대와 국적이 다양하다. 클래스 메이트 중에는 덴마크 소녀 소피가 있다. 소피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를 올라가기 전에 1년을 쉬는 갭이어(gap year)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바로 대학으로 진학하는 15%의 덴마크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갭 이어를 가진다고 한다. 덴마크는 갭 이어 프로그램이 잘 되어있어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파리로 건너와 베이비 시팅을 하며 어학공부를 하기도 한다. 만약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했다면, 필요에 따라서 3-4년의 갭 이어를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모두들 서두를 필요 없이 천천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분위기라고 했다.
덴마크인들 뿐 아니라 유럽인들의 이십 대는 비교작 여유가 있는 것 같다. 마일리스의 친구인 다니엘은 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1년간 공부하다가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서 스스로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관련된 일 해보기 위해 인턴십을 알아보는 모습을 보니 어리지만 다부지게 느껴졌다. 또 다니엘의 친구인 보람도 1년 동안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전공을 바꾸어 정보학을 공부하고 있다. 어쩌면 대학교가 평준화되어 있다는 것도 그들이 쉽게 전공을 바꿀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시험 성적만 가지고 있으면 다른 전공으로 지원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 전공을 공부할 때 어쩌면 내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만 둘 용기가 없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유럽인들의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워졌다.
나도 늦은 나이에 갭 이어를 가지고 있다. 비교적 어렸던 날에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금이라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 시간 동안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잘하는 일이 뭔지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고 있다. 물론 잘 되지는 않는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경험이 부족한 탓 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퍽 나쁜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는 경쟁적으로 공부를 했었고, 성적도 좋았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고 남들이 좋다는 직장도 가졌다.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순식간에 시간은 나를 삼켜 버렸고 나는 삼십 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과거를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직업은 분명 많은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다만 여유 있게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며, 다른 시도를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가끔은 답답해지곤 한다. 스스로를 찾는다는 게 가능은 한 걸까. 때로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나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분명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갭 이어 기간 동안 아무것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이겨내고 단비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