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도 돈이 필요해

8월 6일

by 너랑


무급 휴직을 하고 보니 새삼 돈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원래도 쇼핑을 즐기지 않았지만 휴직을 하면서는 더욱 즐기지 않게 되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소득이 없으니 통장 잔고는 자꾸 줄어만 가고, 그를 보는 내 모습도 자꾸 작아져만 갔다.


게다가 파리에 오니 잔고가 줄어가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졌다. 집세도 내야 했고, 학원비도 만만치 않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외식도 해야 했으니까. 가끔은 외식으로 인한 지출도 부담스러워, “나는 집에 가서 밥 먹고 오면 안 될까? “ 하는 물음이 턱끝까지 차올랐으나 입을 꾹 다물며 참아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한국인을 대표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한국이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간혹 삼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유로운 틴에이져들이 사주는 음료수를 모르는 척하고 얻어먹기도 했다. 한 마디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곤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웃렛을 다녀왔다. 수년간 쓰던 캐리어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기내용 캐리어도 고장 나서 캐리어를 두 개나 사야 했다.


캐리어를 사기 전에 아웃렛을 돌아다녔다. 프라다, 구찌, 입생로랑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했다. 나의 심경은 흡사 삼겹살집에 들어간 채식주의자의 심경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울렛 한 켠의 간식 코너에서 파는 젤라토 밖에 없었다. 젤라토를 먹으며,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사람들을 보는 나의 모습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작지만 소중한 젤라또


만만치 않은 가격의 캐리어를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결제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돈은 정말 필요하구나. 그동안 돈에 관심 없는 척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간은 돈을 벌어왔기 때문에 고고한 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어 가는 통장을 끌어안으며 뼈 아프게 느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구나.라고.


큰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끌고, 명품 백을 사는 것이 꿈이 아니더라도 돈은 정말 소중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낭만을 누리기 위해서 든든한 자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다.

keyword
이전 18화갭 이어(GAP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