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잊는 건 포기했다.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도 문득 그가 떠오르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그리움이 퍼져나간다. 대체 어떤 물건이, 어떤 상황이 기폭제가 되는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당장 그렇다. 잊을 수 없다면 차라리 기억하기로 한다.
아직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엔 짧은 기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순간에 떠오르는 그를 외면하며 괴로워할 바에야 소중히 기억하고 간직하련다.
언젠가, 그와 내가 아직 우리라는 명사로 묶여있을 때,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사유는 무엇이고 어떤 모습으로 지낼지. 점심 무렵 카페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나눈, 특별할 것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그는 생각하기도 싫다면서 너스레를 한 번 떨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 만약 그렇게 되면 넌 글을 써야지.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고 어떻게 싸웠고 어떤 추억에 살았는지 꼭 기록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뒷말이 이어졌다.
- 글쟁이 만났으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아직 모르지만, 아마 우리가 헤어진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닐 거야.
그날의 대화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뒤에야 우리는 이별을 맞이했는데, 그는 더 이상 헤어지는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어떻게 그날과 똑같은 말을 하면서 헤어지자고 했을까. 하여튼 희한한 사람이다.
그의 취미 중 몇 개는 내게 옮아왔다. 두 시간짜리 과학 영상을 틀어놓고 잠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내가 그러고 있다. 농구라고는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운 게 전부였던 내가 NBA 선수와 팀 정도는 외우고 있다. 내 옆에서 신나게 농구 얘기를 떠들던 그 덕분이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다. 그를 욕하려면 끝도 없이 할 수 있고 그를 의심하려면 온갖 정황을 가져다 붙이며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뭐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건 누워서 침 뱉기나 다름없지 않나. 솜사탕 같은 거다. 막연한 향수로 범벅되어 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지만 한 입 먹는 순간 그냥 구름 모양 설탕일 뿐이란 걸 깨닫는. 아마 그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예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 거다. 그리움으로 미화된 솜사탕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그의 말대로 글을 쓰고 있다. 아주 사적인 감정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슬픔을 이겨내고 있다. 이 글은 그를 소화 시키는 과정이다. 추억을 꼭꼭 씹어 삼키고 다시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소화 시키는 거다. 조금 더 오래도록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를 위해 했던 나의 모든 행동과 내가 사랑했던 그의 모습에 거짓은 없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