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닿지 않는 곳에 쌓아두었던 일기를 꺼내왔다. 한 장씩 읽어보며 결국 버리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그와 행복했던 추억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에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았다는 게 기특해서. 언제 또 이런 경험 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버리기는커녕, 이렇게 몇 편을 박제한다.
#19년 7월 26일
괜히 하루 일찍 만나자고 말했나, 후회했다. 원래라면 내일 만났어야 할 사람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약속을 앞당겼을까.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고 얼굴도 못 쳐다볼 것 같은데. 전화 너머 그 다정한 사람이 그대로 나와주는 것 맞는지.
회사에서도 괜히 거울만 쳐다보았다. 오죽하면 옆자리 동료가 약속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오늘따라 내 얼굴이 못나 보이는 건 또 뭔지.
머리끝까지 걱정이 차오른 상태로 서울역에서 그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보자마자 당황했다. 누가 일부러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사람인 줄만 알았으니까. 이렇게 완벽한 이상형을 만날 수가 있을까?
덥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와 맞잡은 손에서 열기가 올랐다. 술이 들어가도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심장이 귀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아마 막차 시간이 아니었다면 과호흡으로 쓰러졌을지도. 내일도 그와 만나기로 했다. 연인으로서.
#20년 5월 17일
꽃을 선물 받았다. 그는 몰래 준비한 것 같지만 사실 조금 눈치채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갔다가 다시 집 근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너무 티 나는 거짓말 아니냐고.
꽃을 들고 걸어오는 그가 보이는데, 예상을 했음에도 벅차올랐다. 내 생을 통틀어 연인에게 받는 첫 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 묘한 기분일 줄이야.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날 위해 고르고 골랐을 그의 모습, 날 향한 사랑. 온통 상상뿐이던 것들을 몸으로 받아내고 나니 어쩐지 부끄럽고 쑥스럽다.
집으로 오자마자 비어있던 꽃병을 씻고 꽃을 꽂아봤다. 산지 반년이 된 화병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행복한 하루였다. 뭐 하나 부족한 것도, 실망스러운 것도 없는 하루.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21년 1월 5일
하루가 한 시간처럼 지나가는 기적이 일어난다. 바쁘거나, 한없이 즐거울 때. 종종 그런 기적을 경험하곤 한다.
몇 번의 아침을 같이 보냈는데도 잠버릇이나 혼자가 아닌 새벽 온도는 영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서로 각자 살아온 수많은 밤을 단 몇 번의 경험으로 맞물리게 할 수는 없겠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엔 아직 이른 시기인가보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어떻게든 더 같이 있고 싶다는 게 신기하다.
이렇게 내 일기에 함께 한 내용을 적는 것도 ‘우리’라는 관계의 연장선이겠지. 함께할수록 적을 말이 많아 더 오래 행복하다.
#21년 1월 31일
미리 계획했던 일정을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관 앞에서 그를 기다린 지 50분. 영화 예매는 이미 취소했고 그는 버스를 놓쳤다며 사과했다. 시작부터 어그러진 우리의 계획.
그래도 재밌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하루도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니 행복하네. 지역을 옮겨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 구경했다. 평소에 관심 없던 액세서리나 휴대폰 케이스 매장 같은 곳. 걷다 지치면 노래방에 들어가 쉬면서 노래 부르기. 노래를 잘 부르는 남자친구를 둔 덕분에 쉬면서 귀호강 하기.
마지막에는 그가 좋아하는 맥주집에 들어가 생맥주에 염통꼬치 먹기. 달달하게 양념된 염통을 먹으며 바보처럼 웃는 그 모습이 좋아서 자주 가는 맥주집이다. 앞으로도 그가 내 앞에서 계속 웃어줬으면 좋겠다.
#21년 6월 22일
그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와 떨어지자마자 밀려오는 이 허탈함과 외로움은 뭘까. 일주일에 딱 하루, 고작 8시간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전부. 직장인들의 연애, 심지어 약 100km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과 만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쉽기만 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절대 믿지 않는 말인데도 괜히 서러워질 때가 있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냥 마음이 요동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누가 보면 나 혼자 절절한 멜로 영화 찍는 줄 알겠다.
내 우주가 온통 그로 가득 차버렸다. 그래서 무섭다. 언젠가,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내가 무너질까 봐. 이 일기가 날 무너트릴까 봐.
#22년 1월 9일
모처럼 새로운 곳으로 데이트를 가는 날이라 들떴는데, 우리에게는 너무 힘든 일정이었나 보다. 예민하고 날이 선 채로 하루 내내 만날 수가 없어서 그냥 일찍 헤어졌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이 그렇게 많았는데 집에서 늘 먹는 밥을 먹고 있다니.
씻고 누워 고심하다 나름대로 심각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요즘 자주 다투는 이유가 뭔지, 서로 상처주는 말을 자꾸 내뱉는 이유가 뭘지. 그는 마냥 귀엽다며 웃기만 했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된 건 맞는지 미심쩍은데, 알겠다는 그의 대답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22년 7월 22일
연인이 가장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기한은 최대 3년이라는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 즐겁고 행복하다. 오래된 사이라 가능한 배려와 인정, 농담 같은 것들이 점점 농익으면서 우리만의 즐거움이 되었다.
오늘은 엘모 모자를 쓰고 즉석 사진을 찍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찍은 탓에 둘 다 얼굴이 빨갛지만 그래도 귀엽다. 나이가 더 들어도 서로 언제까지고 귀엽게 남을 수 있을까ᆞ?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에게는 한없이 귀엽고만 싶은데. 어디서 본 내용인데, 예뻐 보이는 것보다 귀여워 보이는 게 정말 약도 없는 콩깍지랬다. 콩깍지야 벗겨지지 말거라.
#22년 10월 22일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머리도, 화장도, 옷도 마음에 드는 드문 날이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두 시간을 지하철과 기차를 타며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쏟을 줄이야. 역에 내려 택시를 탔고, 그가 말한 곳으로 갔는데. 나는 문제가 없이 갔는데.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건 그였는데. 왜 내게 화를 내는 걸까. 택시 기사에게 왜 내가 핀잔을 들어야 하는 걸까. 평소라면 같이 화내며 싸웠을 텐데 종일 기대했던 데이트라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 그냥 왈칵 눈물부터 나와버린 게 그 증거다.
처음에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 잘못도 없이 화 받이가 되느니 집에 돌아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잠시 진정을 위해 아무 카페나 들어가 숨을 고르는데 어떻게 찾았는지 그가 찾아왔다. 예쁘게 웃으며 만나고 싶었는데. 방금까지 분명 미웠던 그의 얼굴을 보니 또 밉지 않았다.
내 일기에는 끝까지 그가 등장했다. 그동안 내 인생의 주인공은 그와 나, 둘이었으니 당연하다. 이제 나는 솔로 주인공이 되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