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만 7천원짜리 사랑

짝없는 커플링

by 이계절

반지를 팔았다. 그와 맞춘 두 번째 반지였다. 안쪽에는 만나기 시작한 날짜가 각인되어있는, 1000일 기념 반지.


그날도 참 행복했다. 처음으로 그가 예약해둔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며 날 위해 음식점을 예약했을 그가 사랑스러웠다. 스테이크와 뇨끼, 샐러드를 먹고는 반지를 맞추러 백화점으로 걸어가는 길.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일부러 파스텔 톤으로 골랐다는 말과 함께 생긋 웃는 그의 미소가 참 예뻤다.


함께 반지를 맞추기로 했으니 다른 선물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그는 날 위해 그렇게 많은 걸 준비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기에 죄책감과 설렘, 기쁨과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인 상태였다. 어쨌든 확실한 건 아주 행복했다는 거다.


언젠가 친한 언니가 그런 말을 했다.


너는 남들보다 행복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좀 안쓰러울 때가 있어. 근데, 그 사람 만나고 나서는 행복해 보여.


쉽게 우울하지만 쉽게 행복하지 않은 날 이렇게 밝게 만들어준 것도 그다. 다소 오그라드는 별명과 애칭으로 날 부르며 내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입이 닳도록 설명하던 그. 처음 받아보는 무한한 애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반응을 내보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애정과 사랑에 익숙해졌고, 익숙해진 만큼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1000일에 맞춘 반지는 3개월 만에 짝 없는 반지가 되었다. 그가 반지를 잃어버린 탓이다. 첫 번째 커플링도 그가 잃어버려 다시 맞춘 거였는데, 두 번째 반지도 잃어버렸다. 나는 짝 없는 커플링이 두 개나 생겼다. 두 번 모두 그의 부주의로 잃어버렸으나 탓하지는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실수인데. 질책해서 나아질 건 없으니까.


그로부터 다시 반 년 후, 우리는 헤어졌고 반지도 나도 이제 짝이 없다. 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돌아올 일은 없고 각인이 된 반지를 평상시에 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헤어진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반지를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우습게도 반지를 팔기 전 금 시세를 검색했다. 사랑의 아픔이 어쩌고, 이별이 나에게 저쩌고 했던 사람도 결국 돈 앞에서는 우스워진다. 지금 팔면 손해는 아닌지, 어디서 팔아야 비싸게 팔 수 있는지 검색하다가 문득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나는 정말 그가 그리운 게 맞는가. 힘든 게 맞는가. 여전히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걸 보면 그리운 게 맞는 것 같은데. 반지 하나 팔겠다고 시세 검색하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창피했다. 왠지 내가 그와 함께했던 추억을 빛바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우울해졌다. 한 손에는 반지를 쥐고, 한참을 쭈그려 있는데 동생이 반지를 낚아챘다. 차라리 본인이 팔아주겠다며 가져갔고 다음 날 11만 7천원이 돌아왔다. 고작 11만 7천원.


그와 내 반지를 합해 100만원 넘는 돈을 주고 산 반지였다. 짝이 없더라도 50만원 짜리 반지라는 건데, 내게 돌아온 건 11만 7천원이다. 나는 이 별것 아닌 물건에 왜 그리도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이 돈으로 무얼할까 고민하다 책을 샀다. 전부터 사고 싶던 책이다. 박연준의 <소란>. 산문집은 몇 권 안 읽어봤지만 이 책의 어느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박연준/소란 – 하필, 이라는 말 中


내게 그는 아주 두껍고 종이 냄새가 짙은 책이었다. 다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펼쳐보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아마 이 종이 냄새는 영원히 내 속에 맴돌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오늘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남은 건 일기뿐이다. 한 달 하고도 이주가 넘는 시간 동안 천천히 그가 남긴 것들을 정리했고 이제 남은 건 일기뿐이다. 아직도 고민 중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손으로 꾹꾹 눌러쓴 감정들이 기특하고 소중해서 버리기 싫다. 버리지 않는다면 그를 잊는 게 더 늦어질 것만 같아서 걱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미성숙한 인간이 어디 또 있을까. 무엇 하나 결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저 서랍 깊숙하게 넣어둔 일기를 꺼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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