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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Oct 04. 2023

상대적 효능감 - 변형 고무 목도리

뜨개질 하면 차분해진다고 누가 그랬어

참을성도 없고 끈기도 없는 내가 뜨개질에 손을 댄 건 어느 유튜버의 추천 때문이었다. 모처럼 월차를 썼는데, 하릴없이 누워있는 게 지겹기도 했다.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럴 듯’해 보이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고난도 작품을 시도하기엔 ssk, k2tog, 바늘비우기, M1L과 같은 기호를 보고 바로 따라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어려운 만큼 완성까지 갈 길이 구만리라 중간에 흥미가 식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예쁘지 않은 결과물은 원하지 않았다. 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대망의 첫 뜨개는 바로 변형 고무 목도리였다.


우선 고무뜨기는 보통 소매 끝과 목둘레 마감에 사용하는 기법이다. 겉뜨기와 안뜨기를 한 코씩 반복하면 신축성 좋은 고무단이 완성된다. 흔히 ‘시보리’라고 말하는 밴딩 부분이다. 여기서 ‘변형 고무’라고 하면, 겉뜨기와 안뜨기를 한 코씩 번갈아 뜨는 게 아니라 두 코 혹은 두 코와 한 코씩 번갈아 뜨는 걸 말한다. 변형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원하는 대로 콧수를 바꿔서 뜰 수 있다. 


나는 두 코 모아 겉뜨기, 한 코 안뜨기를 반복하며 목도리를 떴다. 난도가 0에 수렴하는 데 비해 정갈하고 예쁜 목도리를 정말 빨리 만들 수 있다. 영상을 보고 곧장 실을 사서는 반나절 만에 완성한 목도리. 



사용한 실은 엘리트 1008번. 파인 울 100%로, 권장 바늘은 5mm지만 더 촘촘하게 뜨고 싶어 4.5mm 바늘을 사용했다. 완성한 편물은 부드럽지만 탄탄했고, 무늬가 잘 보여 좋았다. 100g에 만원 내외로 살 수 있으니 초보가 도전하기에 적당한 실. 


빨갛고 예쁜 목도리. 하지만 손이 가지는 않았다. 너무 빨간 색이라 엄두가 안 났다. 직접 고른 실로 떠 놓고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막상 완성하고 나니 내가 하기엔 지나치게 예쁘다고나 할까. 내가 맨 것보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모습이 훨씬 잘 어울렸다. 불도저 급 실행력에 빈약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다. 


사실 월차도 등 떠밀려 쓴 거나 다름없었다. 팀원이 돌아가며 월차를 쓰고 있었는데 내 차례에 하필 상사가 부탁했다. 금요일에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본인 월차와 일정을 바꾸자고. 금요일 월차가 통과되는 게 얼마나 흔치 않은 기회인데! 그걸 이렇게 날로 먹으려고 하다니! 도둑놈 심보 아닌가! 라고 거절하기엔 소심한 나였다. 싫은 내색 없이 월차 교환을 수락했고, 수락하고 보니 상사의 월차는 당장 내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휴무는 전혀 기쁘지 않다. 하루쯤 내가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 급작스러운 휴무는 급작스러운 야근을 낳을 뿐이다. 응애.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해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오후 1시였고 휴무의 반이 날아간 셈이었다. 별안간 뜨기 시작한 목도리라도 없었다면 정말 하루가 의미 없었을 텐데 다행히 내 손에는 목도리라도 남았다. 부담스러워 손이 잘 가지 않는 게 흠이지만. 빠르게 완성한, 그럴듯한 결과물. 내 의도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목도리를 보니 성취감이 불타올랐다. 계기나 의지만 불타오르는 게 아니다. 불타오르는 성취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성취에서 계기로, 계기에서 성취로 꼬리를 무는 무한 굴레가 시작된 거다. 


그 주에만 5개의 목도리를 떴다. 색만 다른, 같은 디자인의 목도리를 굳이 5개나 뜬 건 하나를 끝낼 때마다 느끼는 짜릿함 덕분이다. 최근에 배운 말로 하자면 도파민 중독일지도.


내 목은 하나라서 이렇게 많은 목도리는 필요 없었다. 기린쯤 되는 목 길이였다면 다 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나니 또 빨간색 목도리만 남았다. 이상하다. 일부러 남기려고 한 건 아닌데 빨간색이 남았다. 


목도리 기계로 살았던 주가 지나고 지겨운 월요일이 돌아왔다. 주말 사이 추워진 날씨에 목도리를 둘러매고 출근했는데, 상사는 날 보자마자 하소연했다. 금요일에 –내게 뺏어간 월차- 애인과 강원도 어느 리조트를 갔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아무것도 못 하고 방 안에만 갇혀 있었다고. 야외 온수풀은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 금지였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해도 눈길 운전이 무서워 포기했다고 한다. 


나는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를 치다가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계속 그 얘기를 듣고 있다가는 진심을 다해 웃는 얼굴을 들킬 것 같았다. 혼자 킥킥대며 거울을 보는데 어쩐지 빨간 목도리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본인 바깥에서 효능감을 올리는 나쁜 습관은 언제쯤 고쳐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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