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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Oct 12. 2023

성공과 실패 사이 - 모로칸 블랭킷(이었던 것)

뜨개질 하면 차분해진다고 누가 그랬

한동안 대바늘 뜨개에 푹 빠졌다가, 오랜만에 코바늘을 들었다. 에어컨 바람에서 날 지켜줄 여름 담요를 뜨기 위해서다. 딱히 대바늘과 코바늘을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리 취미여도 하나만 잡고 있으면 질리는 법이다. 


손바닥만한 모티브를 이어붙여 반복 무늬가 있는 담요를 가지고 싶었는데, 또 흔한 디자인은 싫었다. 사각 모티브는 흔해서 싫고 배색이 많은 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싫고. 여전히 빠른 완성이 주는 즉각적 성취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다. 어쨌든, 아주 다양한 이유로 엄중히 고른 디자인은 모로칸 블랭킷이다.


처음에는 도안을 따로 찾아보려고 했는데 깔끔하게 정리한 도안을 찾지 못해 유튜브 영상을 참고했다. 영상 속 선생님이 아주 친절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어렵지 않게 뜨기 시작했다. 뜨개질이라는 게 자전거 타는 것과 같아서 한번 익혀놓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레 손이 움직인다. 신나게 페달을 밟는 어린아이처럼 내 손도 순조롭게 움직였다. 문제는 같은 모티브를 20개 만들어야 한다는 것. 각 모티브의 크기가 작아 20개라고 해도 만드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20개를 뜨기 전에 질릴 확률이 다분해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 


열 개쯤 떴을까. 예상대로 질리고 말았다. 그래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늦게 질린 편이다. 한 번 질리고 나면 뜨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든다. 지겹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해 몸에도 영향을 준다. 끊임없이 한길 긴뜨기와 짧은뜨기를 반복하는 손이 지칠대로 지쳐 혼자 움직일 때쯤이면 20개가 완성...되어야 하는데, 망했다. 실이 모자라다. 


오늘도 내 뜨개는 화를 내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나 보다. 한창 뜨고 있는데 실이 없다. 새로 사면 되지 않겠냐고 묻겠지만 그럴 수 없다. 실의 출처를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묻지마실’이라고 해서, 중고 마켓에서 일괄로 구매한 실이었다. 얼핏 램스울이라는 판매자의 설명이 적혀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라벨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영수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확하지 않다. 


램스울은 파는 곳마다 색상과 질감이 조금씩 달라서 섞어서 쓸 수가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구상한 디자인으로는 이미 완성이 물 건너갔는데. 잠시 고민하다 일단 그대로 이어보기로 했다. 


개수는 부족하지만 만들어둔 것끼리라도 흰 테두리를 둘러 이어줬다. 예상보다 반이나 작은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무릎담요로도 쓸 수 없는 크기, 방석으로 쓰기도 애매한 모양, 미니 러그 대용으로 화분 밑에 깔아두기엔 더러워지면 자주 세탁하기 부담스러운 뜨개 재질. 그야말로 쓸모없는 뜨개였다. 


색상번호 없는 램스울로, 튤립 코바늘 5호를 사용했다. 원형 뜨기, 짧은뜨기, 한길 긴뜨기 정도 할 줄 알면 시도할 수 있다. 테두리는 짧은뜨기로 한 줄 둘러주었고, 모티브끼리 돗바늘을 이용해 바느질로 이어주었다.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완성했으니 초벌 세탁은 해둬야지. 세면대에 물을 받아 샴푸를 풀고 조물조물 편물을 빨았다. 손때와 먼지로 뿌연 구정물이 나왔다. 깨끗해진 편물을 건조대에 널어놓고 계속 고민했다. 

노란색과 하늘색의 조합이 예쁘긴 한데, 쓸모가 없다니. 선풍기를 건조대 방향으로 놓고 빨리 마르길 기다리며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벽에 장식처럼 걸어둬 볼까. 아니야, 이상해. 그럼 그냥 애매해도 방석처럼 써볼까. 푹신한 것도 아니고, 크기가 맞는 것도 아니야. 이것도 이상해. 그럼 저걸 대체 어디에 쓸까. 


세탁기에서 한 번 탈수를 돌린 덕분에 편물은 아주 빨리 말랐다. - 원래 손세탁 후 자연건조가 기본이지만, 코바늘 편물은 튼튼한 편이라 세탁기에 돌리곤 한다. 강한 편물만이 내게서 살아남을 수 있다. - 편물이 빨리 말랐다는 건 이제 정말 자리를 찾아줘야 할 때라는 거다. 고민만 거듭하고 있는 내게 뒤에서 동생이 다가왔다. 


“뭐야? 새로 뜬 거야?”

“응. 근데 생각대로 떠진 게 아니라서 둘 곳이 없어. 괜히 만들었나 봐.”

“예쁜데 왜. 저기 소파 위에 올려놔 봐.”


동생 말대로 소파에 올려두고는 다음은 뭐냐는 눈빛으로 동생을 쳐다봤다. 그냥 올려두는 건,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잖아. 이 뜨개에 어떤 역할을 주고 싶은데. 동생은 반대로 날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언니. 꼭 저게 무언가에 쓰이지 않아도 되잖아. 굳이 말하자면 저건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소파랑 얼마나 잘 어울려. 귀엽기만 한데 뭘 자꾸 가치니 뭐니를 따져. 피곤하게.”


예쁜 물건은 예쁜 걸로 역할을 다 하는 거라며 방으로 휙 들어간 동생을 보면서 나도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가끔은 목적 없는 뜨개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뜨개는 성공과 실패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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