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집중하는 것
일주일 만에 재활용쓰레기를 한가득 들고 집을 나섰다. 날은 흐릿하고 수분기가 많은 바람이 분다. 따사로운 봄바람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혼자만의 자유를 내 발걸음에 담아 팔을 휘저으며 걸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도서관이다. 천천히 걸으며 길가의 들판을 훑었다. 푸릇푸릇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여러 가지 색깔을 드러냈다. 작년 봄과는 다른 꽃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인간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꽃들을 유심히 살피며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이댔다. 벌소리가 앵앵 울려도, 사진작가인 것처럼 집중해서 찍었다.
꽃의 전체적인 모양, 색깔, 감싸고 있는 푸른 잎들을 관찰하고 생명을 품은 흙의 냄새를 콧속에 가득 넣고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자연의 곱디고운 빛깔의 향연에 풍덩 빠진 채. 처음에는 사진을 찍고 일상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행위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그 피사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움, 그것을 난 닮고 싶다.
무엇을 읽을지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도서관으로 향했다. 인간보다 작은 책 속에 무수하게 많은 군상들이 들어차있다. 내 손만 닿으면 만나게 될 사람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크게 위로가 될 때도 있다. 본성이 얼마나 겉으로 드러나느냐의 차이일 뿐, 가끔 악마에 빙의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도 않고 인간 外로 하고 싶다.
한강작가의 책이 보인다. 무표정한 첫인상,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고 천천히 나직하게 말하는 모습, 흰머리를 굳이 가리지 않고 화장기 없이 연설하는 모습, 어떤 글을 쓸까 머리를 굴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한강 작가, 나와 동갑이다. 아이처럼 수줍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의 글은 글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감히 흉내도 못 낼 문장들이 수두룩해서 읽다 보면 머릿속에서 형체 없는 문장들이 흐물거린다. 그럴 때 집중력을 발휘해서 글의 영감을 끄집어내야 한다. 책도 읽고 싶고 글도 쓰고 싶어 마음이 바빠지는 순간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을 이해하다 보면 결국은 나로 귀결된다. 내가 중심이 되는 순간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달과 6펜스의 서머싯 몸은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 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라고 말했다. 내가 나를 이해하려면 나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하는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 있음을 깨달아야 마음에 낀 먹구름이 사라진다.
나는 부정적인 환상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할 때가 있다. 지금 겉으로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지만 (도덕적 양심이 꾸역꾸역 나를 지배할 때) 마음으로는 다른 행동을 상상할 때가 있다. 이런 두 모습은 내가 싫어지고 못나 보인다. 그런 모습을 가려주는 것이 가식이라고 한다면 양심과 가식은 비슷한 성질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아무 탈없이 지나갔으니 말이다.
분명 낮이었는데 고개를 드니 어스름 저녁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 작가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그냥 글 쓰는 것이 내 취미생활로 굳혀졌다.
무언가에 미쳐서 소중한 시간을 몽땅 쏟아 넣는 일. 그렇다고 전문서적을 찾아 들여다보는 학구열도 없으면서 글을 쓰고 다듬으며 집중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
멍하니 앉아 머릿속에 글을 떠올리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하얀 모니터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다 보면 어느새 문법도 맞지 않는 글이 점점이 박혀있다.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글자들을 여러 번 읽으며 수정하고 다듬는 그 행위가 등이 굽고 거북목이 돼도 모를 정도로 몰입의 기쁨을 주고 있다. 다듬는 동안 떠오르는 반짝이는 문장들이 하얗던 도화지에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글을 완성하고 알지도 못하는 뭇사람들에게 오픈시킨 글이 영 부끄럽지만 숨기기보다 내놓는 것이 더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빌려온 한강 작가의 책을 읽으며 느끼는 마음의 설렘은 어떤 영감을 가져다줄지 기대된다. 오늘은 이 책에 집중해 볼 참이다.
성가실 때도 많지만, 긍정적인 몰입을 위해 마음의 중심을 꽉 잡고 잡다한 유혹은 떨쳐내야 온전한 나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