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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fewriter Jun 16. 2023

디카페인

성수동 티룸에서

 속이 미식거린다. 가슴은 타들어간다. 위도 욱신거리는 것 같다. 낌새를 보아하니 간만에 찾아온 역류성 식도염이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약국에 간다. 두툼한 약봉지를 내미는 약사. 딱 봐도 일주일은 복용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주의사항은 역시 커피와 술, 밀가루 3대 죄악을 금하는 것. 어째서 악마의 유혹은 항상 달콤하고 파괴적인지 이 3대 금지 음식을 통해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술은 나이 때문인지 어차피 약속도 거의 없어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밀가루는 조금 힘들지만 음식은 다양하니까. 문제는 커피다. 카페인.


 막상 아파보면 이 카페인 중독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소화기관이 아프면 식욕은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억제가 가능하지만 나에게 카페는 집처럼 매일 가야만 하는 곳이다. 커피를 마시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티를 찾는다. 하지만 티 또한 카페인 함유량이 높은 찻잎이 많아서 내가 고를 수 있는 메뉴는 몹시 줄어든다. 과일이나 탄산수,우유 등이 들어간 음료 역시 위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디카페인 티로 현저히 줄어든다. 이 기간에만 나는 티 마시는 사람이 된다. 


 티 마시는 사람은 마치 채식주의자와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왠지 섬세한 동시에 까다로울 것 같고 느리지만 우아한 동작으로 움직일 것만 같다. 그런 이미지는 아무래도 차를 천천히 우리고 기다리며 따르는 다도라는 행위에서 오는게 아닐까. 내가 카페인을 끊어야할 기간은 최소한 일주일일 것이다. 티백으로 대충 우려주는 차를 내는 카페 말고 제대로 된 티 카페, 차실에 가고 싶어진다. 검색해서 성수동에 위치한 근사한 카페를 찾아냈다. 


 이 티룸에는 바리스타처럼 내가 주문한 차를 정성스럽게 우려주고 어떻게 마셔야하는지 안내해주는 서버들이 계신다. 내가 주문한 차는 쑥차이다. 향긋한 쑥의 냄새 뒤엔 쌉싸름하면서도 풀 특유의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 느껴진다. 짙은 녹색의 쌀과 참기름 맛에 가까운 쑥떡이나 먹어봤지 내가 언제 이렇게 쑥의 향을 깊게 느껴본 적이 있던가. 갑자기 어느 숲속 절에 들어와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주변을 바라보면 사방의 통유리창이 빌딩뷰로 꽉찬 도심 속 그자체이다. 유독 차를 마시는 카페엔 혼자 온 손님들이 많아보인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뭔가를 적고 있다.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는 손님은 오히려 적다. 그때서야 가방 속에 들어있던 내 책도 꺼내본다. 도스도옙스키의 저서 중 두번째로 도전하는 책이다. 차의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집중을 도와준다. 커피를 마실 때의 쨍한 카페인은 일시적으로 정신이 번쩍들게 하지만 지속력은 약한 편인데 티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촛불처럼 멍하게 한 곳에 주의를 기울이게 해준달까. 오랜만에 여러 페이지를 한 번에 읽고 있는데 서버가 조용히 다가와 내가 얼마나 마셨는지 체크한 후 찻잎을 다시 우려주기 위해 티팟을 가져간다. 두번째 티는 더 선명한 맛이다. 그렇게 홀짝, 호로록, 티를 음미하다보면 불편했던 내 위장과 식도도 따뜻해지고 조금은 치유된 느낌이 든다.


 내 카페리스트에 티룸을 업뎃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몇 번의 티룸과 다도를 더 적극적으로 경험해본다. 집에서도 마실 다양한 종류의 허브티들을 넉넉히 주문해뒀다. 그러다 약을 다 먹을 때쯤 나는 티백을 넣어둔 바구니에서 예전에 먹다 남은 커피 드립백을 우연히 찾아내고 만다. 다도를 하던 차분한 손길로 드립백의 적정 온도와 시간을 맞춰가며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본다. 음... 그래, 역시 커피지. 


 나는 결국 더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일주일만에 부활한 커피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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