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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성 Jun 30. 2023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 예보가 나오기 시작한 건 한 일주일 전쯤부터이다. 장마가 오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그만큼 막걸리가 당기는 날도 훌쩍 빨라졌다. 막걸리는 고등학교 때 참여한 '농활(농촌봉사활동)'에서 처음 입에 대봤다.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 막걸리였다. 미성년자였기에 주최 측에서 경험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막걸리 대접에 반 정도를 채운 양이었다. 근데 나는 아직도 그날보다 맛있는 막걸리는 마셔본 적이 없다. 땀 흘리고 먹는 참된 노동의 대가라던지 직접 농사지은 보람이 첨가된 맛이라는 가스라이팅과 같은 추상적인 조미료를 모두 제거하더라도 그 맛은 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장맛비 내리는 걸 확인하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 퇴근길에 막걸리 몇 병을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더니 이미 진열대가 텅 비어 있었다. 물어보니 이미 애저 녘에 다 나갔다고 했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비와 교감을 중요시하는 프로 알콜러들이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역시 행복은 남들도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     

진정한 ‘분위기충’들은 마시고자 하는 술이 없다고 해서 계획에도 없는 다른 이쁜 술, 멋진 술들을 사려고 기웃거리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인연이 아님을 핑계 삼아 발걸음을 돌리는 게 이 바닥의 룰이다.  

   

나는 장마가 ‘길장(長)‘을 쓰는 한자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 그 어원을 밝히지 못한 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순우리말인지 한자어인지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長’과 ‘물’의 고어인 ‘맣’의 합성어라는 설도 있고,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도 있다. 막걸리를 놓치고 집에가며 엘리베이터에서 무심코 찾아본 장마라는 단어였는데 어디 가서 말하기 좋은 소소한 지식하나를 습득하게 되었다. 모든 잃음은 얻음을 동반한다는 내 작은 믿음을 한 번 더 증명하는 퇴근길이었다.



     

막걸리는 걸치지 않았지만 자기 전에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상대적으로 밝은 방안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흐르는 빗방울에 겹쳐서 보였다 지워졌다를 반복한다. 

올해 장마는 부디 서로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고 떠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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