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채우며 시간의 함정에 빠진다

by 이호성

시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지만 소름 돋게도 사실인 것 같다. 자정~새벽 2시. 이 지점이 함정이다. 무리들과 함께 잔을 부딪히든 혼자 앉아 식탁에 잔을 부딪히든 정확히 저 시간이었다. 누군가 빠르게 시간을 훔쳐 달아나는 순간이.


시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로 잔을 채우고, 별차이 없는 패턴으로 안주를 집어 들어도 몇 번의 목 넘김과 몇 차례의 사색만으로 시간은 벌써 새벽 2시를 가리킨다. 사라진 2시간.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분명! 평소의 2시간과는 확연히 다르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온갖 음모론으로 머릿속으로 소설을 써가며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어리석고 정상적이지 않은 술투정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누구나 이성과는 다르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몇 가지 현상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는 저 자정부터 2시로 넘어가는 시간의 블랙홀이 그렇다. 왜 하필 저 시간은 나에게 순식간이라는 표현처럼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일까.


한심한 푸념을 뒤로하고 새벽의 사색들을 정리하다가 추억에 갇혔다.


그 추억은 나름의 향기와 분위기를 가지고 가끔 나를 찾아오지만, 그 순간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새벽시간에 나는 그야말로 추억에 갇힌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부러 그런 추억에 갇혀보라고도 말하고 싶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에게는 시간낭비, 비관론자들에게는 쓸데없는 부정적인 기억일 뿐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런 말에 자극받아 자신을 채찍질해도 결국 어쩔 수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추억에 한번 갇혀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달콤했던, 쓰거웠던 맛을 잠시 느끼고 현실로 복귀하는 그 시점을 온전히 다시 받아들인다면 언제든지 추억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안식처와 같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날이 그랬다.


지울 수 없다면, 차라리 닳도록 추억하다 익숙한 술안주로 그냥 남겨두길...

keyword
이전 07화잔을 채우며 -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