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은 재혁의 사망소식을 듣고 재혁의 형과 뉴욕으로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서 정숙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재혁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재혁과 정숙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예중 동창이었다. 재혁과 정숙의 부모님은 잘 아는 사이였다.
특히 어머니들은 무척 친했다.
재혁은 삼 남매의 막내였다. 형과 누나에 비해 감수성이 예민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숙의 집에 놀러 갈 때면 화가인 정숙의 어머니가 작업실을 쓰게 해 주었다. 정숙과 재혁은 작업실에서 다양한 재료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정숙은 재혁과 오랜 세월을 같이 했다. 기억에 떠오르는 순간들이 해일같이 정숙을 덮쳤다.
정숙은 익사할 것 같은 위태로움 속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떼쟁이 재혁이”
정숙은 한숨을 쉬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입술 끝이 저절로 살짝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재혁은 마음이 여리고 잘 울었다. 동물도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재혁은 기르던 개가 늙어서 죽은 후 학교를 일주일 이상 결석했다.
재혁의 담임 선생님은 옆 반 친구인 정숙에게 재혁이 학교에 오게 하라고 시켰다.
재혁을 학교에 오게 하려고 노력하다 정숙의 도움까지 요청하셨다.
재혁은 정숙의 말도 듣지 않았다. 재혁은 죽은 개를 충분히 애도한 후 보름이 되어서야 학교에 나타났다.
정숙은 2남 3녀 중 막내로 미술을 전공했던 어머니를 유일하게 닮았다.
정숙과 재혁은 미술을 진로로 정해 예술중학교 시절 2년을 같이 보냈다.
예중 2학년 1학기 말 어느 날, 재혁은 사물을 반복해서 그리는 미술 수업이 지겨워졌다.
재혁은 판에 박히게 그림 그리는 법을 주입식으로 배우는 것이 답답했다.
재혁은 좀 더 자유로운 수업을 받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인터넷도 찾아보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물어도 보았다.
미국에 유학 간 형에게도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상담했다. 학교 수업이 지겨워서 교실에 앉아 있기 힘들다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형은 본인이 다녔던 고등학교 프로그램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주고, 검색할 사이트도 알려 주었다.
재혁은 형의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은 예술 중학교에 도저히 적응을 못하겠으니, 형이 다녔던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재혁의 부모님은 재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재혁은 중학교 3학년 때 진혁이 있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로 유학을 떠났다.
재혁은 유학 후 1년은 대학생이었던 형과 같이 생활하다가 기숙사가 있는 유명 사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재혁은 이과로 진로를 바꾸었다.
진로가 달라진 후, 재혁과 정숙은 자주 만날 일이 없었다.
미국에 유학 간 재혁은 운동을 좋아하게 되면서 어릴 때 야리야리했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재혁은 그림에도 관심이 전혀 없어졌다.
정숙도 예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입시에 성공해서 S대 미대 동양화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진학한 후에는 재혁이 방학이어서 한국에 올 때, 재혁과 정숙은 옆집이라 길에서 우연히 만나거나, 유치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어쩌다 만났다.
하지만, 재혁이 사진작가로 유명해진 뒤, 미술 잡지사에서 근무하던 정숙과 인터뷰를 하며, 둘은 다시 친해져서 자주 만나게 됐었다.
정숙은 재혁이 자신에게 청혼했던 순간이 기억에서 떠오르자, 눈물이 앞을 가리다 주르륵 흘러내렸다.
콧물까지 같이 흘러 휴지로 눈과 코를 닦았다.
가슴의 통증도 찌릿찌릿 전해지자 , 오른손으로 심장을 꾹 눌렀다. 벌써 8년도 넘었다.
크리스마스였다. 재혁은 정숙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강선우 작가와의 애증에 얽힌 사랑에 지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정숙은 재혁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정숙도 여성 편력이 심한 남편을 10년 이상 견디다가 헤어진 지 1년도 안된 때였다.
정숙은 더 이상의 모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두 아들의 양육권도 포기한 채 이혼한 뒤라 재혁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정숙은 어른인 재혁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봐서 적잖이 당황했다.
어린 시절 재혁은 울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떼장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길바닥에 누워서 뒹굴며 울었다. 그 덕에 재혁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예중 준비를 위해 정숙과 과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혁은 숙제도 , 공부도 하고 싶을 때만 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과외 선생님에게 화장실을 핑계 대고 공부방을 들락날락거렸다. 정숙은 재혁이 그래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아, 공부와 그림 수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숙은 재혁이 그러고도 예중에 합격한 걸 보면 재혁의 예술적 잠재성을 학교에서도 알아본 것 같았다.
어릴 때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재혁이 첫사랑인 강선우 작가와 애송이 남학생 모델 사이에서 방황하며 정숙에게 고통을 호소했을 때 정숙은 깊은 연민과 공감을 느꼈다. 그때, 재혁은 '선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숙에게 청혼했었다. 정숙은 재혁의 여리고 순수하고, 약한 모습에 끌렸다. 전 남편 은호와는 정반대 모습이었다.
그렇게 재혁과 정숙은 오랜 친구 사이를 넘어 부부가 되었다.
“제수씨, 그만 울고 주무세요.. 이제 6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진혁은 울고 있는 정숙을 바라보았다. 진혁은 정숙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또 택시로 이동해야 해요,
사건 현장에 가려면 체력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부터 전혀 자지 않고 있네요.
이대로 가다간, 재혁이를 한국으로 데려 오지도 못하겠어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힘들고요."
진혁은 우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정숙도 자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공항에서 내리면 참혹한 현실을 맞닥뜨릴 것이다.
심장이 뛰며 머리카락들이 쭈뼛해졌다 온몸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재혁의 몸은 어떤 상태일까?'
정숙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자 와인을 한 잔 들이켜고 잠을 청했다.
*
정숙은 진혁과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기억이 뚜렷하지 않고 공중에 붕 떠서 멍하게 여기저기를 다녔던 게 떠오른다.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자다 깨서 비행기에서 공항으로 어떻게 내렸는지, 택시를 타고 헬기 사고 현장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경찰을 만나고, 재혁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을 했는지 모든 게 꿈같이 지나갔다. 차분한 악몽이었다.
사건 현장에 헬리콥터의 잔해들은 남아 있었고, 시신들은 수습되어 있었다.
재혁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착륙 후 화재가 있었다고 했는데 적잖은 폭발을 동반했던 것 같았다.
미국에서 화장을 해서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숙과 진혁은 경찰로부터 헬리콥터 잔해에서 발견된 재혁의 카메라 가방도 인수받았다. 방염 가공이 되어 있어서인지 재가 묻어 더러웠지만 상태는 멀쩡했다.
진혁은 일주일이 지난 뒤 회사일로 한국에 돌아가야 해서 뉴욕 지사에 있는 직원을 정숙에게 소개하고 미국을 떠났다. 정숙은 거의 2주 이상을 재혁이 머물었던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면서 재혁의 짐을 정리했다.
정숙은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뉴욕에서 재혁이 예술가로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했는지를 알았다.
책상 위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는 간략한 스케줄이 쓰여 있었다.
주 2회 드론 수업 with Karl
책상 위에는 크기가 다른 드론이 2개 놓여 있었다. 한 드론은 크기가 크고 꽤 기능이 디양해 보였다.
재혁은 조종기 스틱의 기본 사항을 간략하게 메모해 놓고 있었다.
드론으로 촬영을 해 현상한 사진들도 다양한 크기의 포트폴리오 북에 잘 정리되어 책상 옆 책장에 꽂혀 있었다.
* 헬리콥터나 경비행기에서의 촬영도 시도해 보기
* 전화해서 일정 잡기
메모를 날짜별로 맞춰보니 재혁은 세 번째 비행에서 사고를 당했다.
정숙은 재혁의 스케줄러에 적힌 사고 전날의 메모를 읽었다.
* 모델 쓰지 말 것
* 드론이나 항공기를 통해 뉴욕 거리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얻을 것
* 거리 작업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을 것
* 사람들은 픽셀로 이미지 처리할 것
# 나 자신이 설득이 안됨
# 어디로 갈까?
# 넌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어 있어. 계속 걷다 보면 어디든 닿게 되거든.
정숙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온 마지막 문장을 보자 재혁과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체셔 고양이한테 완전히 빠졌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 재혁이 체셔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몸은 사라지고 미소만 남았다.
정숙은 체셔 고양이를 생각하자 갑자기 깨달았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재혁은 사라졌지만 미소가 남았어. 예술가는 작품이 미소야. 체셔 고양이처럼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했지만, 재혁의 미소, 재혁의 정신이 작품들에 그대로 있어.'
정숙은 재혁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위안을 받으며 흐느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뉴욕에서 재혁의 일을 처리하며 정숙은 이국 땅에서 일처리 하는 것이 한국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봤던 만화 영화 <쥬토피아>에서 공무원들이 나무늘보로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화를 볼 때는 웃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공무원들의 일처리 속도를 비꼬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민원을 해결해 주는 한국의 행정에 익숙했던 정숙은 답답해서 더 우울해졌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재혁의 작품들을 돌보고 싶었다. 재혁이 그리웠고, 그의 부재가 아쉬웠다.
정숙은 적극적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 거의 3주 지나서 한국에서 장례식을 지낼 수 있었다.
헬기 추락 사고와 연관되어서 밟아야 할 절차가 자연사보다 많았다.
*
장재혁 작가가 웃고 있다. 사진 속의 재혁은 활짝 웃고 있었다. 현우는 재혁의 영정 사진을 참착하게 바라봤다.
‘정말 존경하고 좋아했던 작가였는데..... 강선우 작가와의 불미스러운 삼각관계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두 분을 다 좋아하고 존경했었는데.
강선우 작가가 나를 안았을 때 나는 순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도덕이나 훗날의 인간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건 사랑이었을까?’
현우는 재혁의 해외에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죄책감과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사죄하고 싶었다.
현정과 현우는 싱가포르에서 6개월 전에 귀국했다. 현정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현정의 어머니는 위암 2기라는 사실을 국가 건강검진의 위내시경 검사를 해서 알았다.
현정은 11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살아왔다.
어머니는 약한 몸으로 강서구에 있는 재래시장 <남부 시장> 모퉁이에서 작은 분식가게를 하며 현정을 키웠다.
현정이 태권도를 시작한 계기도 약한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좋은 일자리 취업한 것도 어머니의 노후를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은 현정에게는 지옥과 같은 삶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현정은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현우가 6개월의 인턴 과정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구했었다. 현우는 현정 때문에 서울에 있는 디자인 회사들에 이직 신청을 했다. 다행히 강남역 주변에 있는 작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현우는 싱가포르에 와서 현정에게 청혼을 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입장 전 지구본 앞에서 현정에게 청혼반지를 끼워 주었다. 현정은 뜻밖의 청혼에 매우 기뻐했다. 현우와 현정은 앞으로 롤러코스터를 자주 타고 재미있게 살기로 약속했었다.
현정은 청혼반지를 끼고 현우의 손을 꼭 잡고 놀이동산에 입장했다. 두 사람은 제일 먼저 트랜스포머를 타러 갔다.
현우가 싱가포르에서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을 때, 현정과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이 서울 화곡동인 현정을 고려해서 마곡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현우 부부는 양가에 며칠씩 머무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왔었다.
현정은 임신한 상태였다. 현정은 재혁의 장례식장에 같이 오고 싶어 했지만, 현우는 그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를 들어 못 오게 했다. 현우는 아이의 태명을 '파이리'라고 지었다. 현우가 가장 좋아하는 포켓몬이었다.
현우는 '파이리'가 재혁의 장례식장에 오는 게 싫었다. 재혁과 선우와의 삼각관계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선우 작가를 이제 와 비난하는 것도 구차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너무 어렸고, 어린 자신을 연인으로 만든 선우 작가의 알 수 없는 심리상태에 모멸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우는 선우 작가가 이해하기 힘들었고, 재혁에겐 점점 더 미안함을 느꼈다.
현우는 국화꽃을 영정 앞에 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사진 속 재혁의 눈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작가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정말 죄송했어요.
작가님이 선우 작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 더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작가님을 기억하고 평생 사죄하겠습니다."
현우는 눈이 촉촉해지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양복 깃으로 눈물을 닦으며 인사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
정숙은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혁을 떠올렸다. 재혁은 정숙의 구세주였다.
재혁이 강선우작가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있을 때 정숙은 전 남편 은호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헤어진 후였다.
은호는 정숙보다 10살 연상이었다. 정숙의 전시회를 지인과 방문한 후 정숙에게 매우 다정하고 사려 깊게 다가왔었다. 새내기 작가인 정숙의 그림을 중견작가 가격으로 5점이나 사주기도 했다. 정숙은 처음에는 은호의 다정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랬던 은호는 결혼 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면서도, 정숙이 그의 곁을 지켜주기를 원했다. 교양 있고 집안 좋고 학벌이 좋은 정숙은 은호에게는 사랑하지 않지만, 놓치기 아까운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정숙에게 은호는 지옥이었다.
정숙은 은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 낳았다. 은호는 아들 둘을 책임지고 있다.
은호는 두 아이 다 미국 동부의 기숙학교에 보내 교육시키고 있다.
정숙은 아들들이 여름방학이나 겨울 방학 때 한국에 돌아오면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아들들은 엄마와 아빠를 골고루 닮았다. 정숙도 아들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척 행복했다. 그들은 정숙을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부자인 아버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정숙에게 많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한국에 오면 의례적으로 만나는 친구들과 엄마는 같은 비중을 차지했다.
어릴 때 보였는 엄마에 대한 강한 애착이 사라졌다.
아들들이 자라면서, 정숙은 아이들을 포기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은호는 이혼 후에도 한 번씩 습관처럼 정숙에게 전화를 걸어 재결합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때마다 정숙의 모성결핍을 공격했다. 은호는 정숙이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온 것에 대해서는 미안함을 불러일으켰다.
재혁이 죽고 나서, 은호는 비열하고 집착하는 성격을 드러내며 자주 연락을 해 오고 있었다.
은호가 처음 연애했을 때 보였던 달콤하고 세심한 관심으로 다시 정숙을 곁에 두려고 했다.
정숙은 더 이상 전 남편 은호에게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았다. 재혁의 사랑 덕분이었다.
정숙에게는 남은 생애동안 할 일이 생겼다.
정숙은 재혁의 사진작가로서의 생명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굳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