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은 [청춘] 고문 변호사를 동반해서 실무진들과 회의를 열었다.
미국에서 재혁의 시신 수습과 이삿짐 이송, 장례식 등으로 차일피일 미뤄왔던 회의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정숙은 상속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고문 변호사인 K는 유언장 내용을 전했다. 재혁의 유언장에 특이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
“특이점이라니요? 저희가 자식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정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재혁 씨가 제삼자를 유산 상속인에 포함시키셨어요. 회사 주식의 40%를 그분에게 유증 하기로 유언장에 적시하셨습니다."
K변호사는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정숙이 알게 되면서 받을 충격을 예상했다. K변호사는 조심스럽고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정숙의 표정을 살폈다.
정숙은 얼어붙은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양손을 펴고 얼굴에서부터 머리로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들이 머리 위에 펼쳐진 손가락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정숙은 두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정숙은 산발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회사 실무진과 변호사는 모두 정숙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함께 침묵을 지키며 정숙의 반응을 기다렸다.
"혹시, 강선우 작가인가요?"
정숙은 고개를 들고 변호사 K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주식을 남겨 주시면서, 혹시 상속세를 낼 돈이 없는 경우에는 사모님께서 주식들을 일부 사주셔서 상속세를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세부적 사항들이 잘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사모님께서 혹시 오해하셔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 봐 동영상도 남기셨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모님께 USB를 드리겠습니다."
정숙은 재혁의 유언장 내용과 앞으로 회사에 대한 계획을 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후 집으로 향했다.
*
집안은 썰렁했다. 재혁과 정숙은 성수동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았다.
재혁이 없는 집에는 엔트와 로피가 정숙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갈색 푸들인 중형견 엔트는 소파에 앉아 랩탑 컴퓨터에 USB를 꼽는 정숙의 발 위로 몸을 올리며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엔트의 체온이 느껴서 정숙은 포근한 위로를 받았다. 소형견인 몰티즈 로피는 소파 위로 올라와 정숙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자주 촬영 여행을 떠나곤 했던 재혁이 집에 없을 때, 엔트와 로피의 자리였다.
재혁은 집에 있을 때 정숙의 옆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엔트와 로피는 정숙보다 재혁에게 더 붙어 있었다.
정숙은 USB 내용을 보기 위해 클릭했다.
재혁은 평소에 잘 입는 검은 티와 청바지 차림을 하고, 회사 사무실의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숙은 영상 속 재혁의 눈에 시선을 맞추어 바라보았다. 정숙이 익숙한 따듯하고 사랑이 넘치는 눈길이었다.
"정숙아, 이번에 난 내 예술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달 정도 촬영 여행을 떠나려고 해.
여행을 다녀와서 네게 나의 새로운 결심을 말할게.
네가 지금 이 동영상을 보고 있다면, 아마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겠지.
나도 내가 왜 이 동영상을 찍고 싶은지 모르겠어.
언젠가 들었던 기업가들을 위한 혁신 교육 프로그램에서 얼마 후 죽는다는 것을 상상하고 유언을 남겨 보라는 것을 과제로 한 적이 있어.
갑자기 여행짐을 싸면서 그 프로그램이 떠올랐어.
너한테 유언을 하다 보면, 내 삶이 잘 정리될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
최근에 희준과 지수 사건들이 법률적으로 잘 마무리되었어.
두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 둘 같이 고생 많이 했지.
네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잘 해결하지 못했을 거야. 항상 고맙고 사랑해.
정숙아, 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야. 그래서 네게 어려운 부탁 하나 할게.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사진들과 강선우 작가의 그림들을 격년에 한 번씩 같이 전시해 주길 바라.
선우를 직접 만날 필요는 없어. 그녀의 언니랑 의논하면, 언니가 알아서 할 거야.
잘 다녀올게. "
정숙은 동영상 속의 재혁을 보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눈을 감았다.
로피가 그녀의 손등을 계속 혓바닥으로 핥았다. 로피의 체온이 따듯한 재혁의 포옹을 떠오르게 했다.
이제 남은 삶 동안 그를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녀의 소스라치는 듯 움찔하는 몸동작에 놀랐는지 엔트와 로피가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짖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아빠가 죽었어. 이제 너네들, 아빠가 만져 주지도 , 안아주지도 않아.
어떻게 하니. 흑흑흑..........."
정숙은 엔트와 로피를 한쪽 팔에 하나씩 안고 흐느꼈다. 앤트와 로피는 쉼 없이 혓바닥으로 정숙의 얼굴과 손을 핥았다.
정숙은 재혁을 분명 사랑했는데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도 예측 못한 상황이었다.
재혁은 정숙과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에게 충실하고 최선을 다했었다. 강선우 작가와도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선우 작가가 작품 활동을 멈추고 칩거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재혁은 같은 예술가로서 안타까워했었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그래도 몇 년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아까워.
정숙아, 나는 선우 작품들이 내 사진들의 회화버전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
치료받으면, 다시 붓을 잡겠지. 그래도 언니가 정신과의사라 불행 중 다행이지. 헌신적이니까."
정숙은 재혁의 말을 듣기만 했었다. 재혁도 그녀의 동의를 원하지 않았다.
그냥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정숙은 공감할 수가 없어서 침묵했다.
맞장구치고 싶어도 처음에 동의하기에는 두 사람의 작품들이 너무 달라 보였다.
질투심도 그 당시에는 있었던 것 같다.
강선우 작가의 나르시스 연작들이나 이카루스 연작들은 관람객을 휘어 감는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져서 정숙은 불편했었다.
"재혁의 작품들은......"
정숙은 재혁의 작품들도 어떤 면에서는 선우의 작품들과 닿아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무엇일까 며칠 동안 생각했었다.
허무? 찬란한 아름다움? 죽음? 분명한 것은 모두 젊은이들의 이야기였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죽은 신화 속 젊은이들처럼 재혁의 모델들은 삶을 멈추지 않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영원한 젊은이로 머물고 있었다.
*
몇 달 전 선미는 재혁의 슬픈 소식을 듣고, 그의 장례식을 참여했다.
<선우미 예술 기획사> 명의로 근조 화한도 보냈었다. 그리고 최근에 열린 재혁의 유고 전에도 다녀왔다.
재혁과 선우는 격년으로 열리는 비엔날레에 여러 번 같은 부스를 쓰며 참여했었다.
선미는 재혁이 선우와 헤어진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거의 전적으로 선우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선미는 재혁에게 어떤 변명조차 하기 미안했다.
날씨가 쨍했다 비가 왔다 하기를 반복하는 날이었다.
선미는 오전 10시쯤 출근하는 40분 동안의 시간에 비가 그쳤다 오는 게 2번이나 반복되는 걸 보고 참 이상한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면서 하늘을 보고 감탄했다.
층층이 뭉게뭉게 떠있는 구름들 사이로 빛의 커튼들이 아름답게 쳐져 있었다. 커튼이라기보다 빛의 폭포 같은 느낌이었다.
'와, 이렇게 아름다운 실버라이닝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잠깐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참, 인생 길어. 아니 이런 걸 뭐라 해야 적절한 표현인거지?'
아름다운 하늘 때문인지 선미는 기분이 확 밝아져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들을 대략 읽고 난 뒤 정리하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을 때 선미는 낯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거기 <선우미 예술 기획사> 대표 강선미 님 계신가요?"
"네. 접니다. 누구신가요? "
"안녕하세요? 저는 장재혁 작가의 아내 김정숙입니다."
"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벌써 3개월이 지났군요."
"남편의 유언이 있어서, 잠깐 뵙고 싶습니다."
"네? 유언을요? 만약 선우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선우는 아파서 외부인들을 만날 형편이 못 됩니다."
"아, 알고 있어요. 어차피, 저도 언니분과 협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내일 오후 2시쯤 어떨까요? 제가 갈까요? 아님, 오시겠어요?"
"내일 일정이 가능합니다. 일단 제가 <선우미 예술 기획사>로 가겠습니다. 잠실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사무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선미와 정숙은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기획사 창 밖으로 석촌호수의 잔물결들이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는 물결이 일렁였다.
호수에 사는 오리들이 뗏목 위에 지어놓은 통나무 집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바람이 뗏목을 앞뒤좌우로 움직여도 오리들은 부리로 날개를 가다듬으며 몸을 말리고 있었다.
"뜻 밖에도"
정숙은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재혁 씨가 선우 씨에게 자신의 회사 주식 40%를 상속했어요."
"네?........"
선미는 당황했다.
"[청춘]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100% 재혁 씨 회사였어요. 재혁 씨가 SS물산 막내아들이라 본인이 증여받은 재산이 꽤 있었어요. 자신이 회사를 만들고 운영하며 상장을 하지 않았죠."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선우의 그림이라던가, 선우의 재능들.... 저는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선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떼었다.
"그림 전시가 조건이에요. 재혁 씨 사진들과 함께. 선우 씨의 작품들과 격년에 한번 전시회를 하는 걸 조건으로, 상속을 제의했어요."
정숙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부드럽게 부탁하는 어조였다.
"일단 선우 그림들은 팔 수 없어요. 5년 전 싱가포르 센토사섬에 있는 호텔에 이카루스 시리즈 중 두 점을 판 후 저희는 어떤 그림도 팔지 않고 있습니다.
선우가 현재 작업을 못하고 있어요. 정신적인 고통이 심한 상태라, 그림을 파는 것에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작은 소품 판매도 멈추었습니다."
선미는 말을 하면서도, 정숙의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라 여러 가지 의심이 들었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선우의 그림들을 뺐거나 확보하기 위한 꼼수가 숨어있을 것 같은 염려도 들었다.
"물론 그림의 소유권은 <선우미 예술 기획사>에 있어요."
정숙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주시면, 선우랑 의논해서 말씀드릴게요.
아니 한 달 정도까지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유언의 내용과 선우의 상황에 따라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할 수도 있어서요.
계약 조항을 정리해서 제게 이메일로 보내 주시면 선우에게 더 명확하게 착오 없이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너무나 좋은 조건이라 무척 감사함을 표시해야 하는데, 깐깐하게 구는 것 같아 송구하네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예술의 영역이란 게, 작가들의 마음이 절대적이어서요."
선미는 매우 깍듯하게 정숙의 양해를 구했다. 사실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 같아서 얼른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 동아줄을 잡고 버텨야 하는 사람은 선우였다.
잡고 버티지 않으면 어차피 '꽝'이었다.
정숙은 선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표시로 고개를 위아래로 가볍게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뭔가 애매하고,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짓기도 했다.
"맞아요. 절대 자본주의적으로 움직이지 않죠.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거겠죠.
전 여자 친구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도 사실 이례적인 일이죠."
선미와 정숙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