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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Oct 01. 2024

<크리스마스 파티>

20. 깃털처럼 가볍게 바람에 부유하며


미는 평소대로 선우를 만나러 갔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비친  오후 2시의 햇빛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선우는 오전에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다, 오전 9시가 되면 잠이 들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 패턴 때문에 밖으로 나가 햇빛을 본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선우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침실에서  늘어져서 누워있거나, 작업실로 가서 가벼운 선긋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미는 선우가 약을 잘 챙겨 먹고 있다고 전해 듣는 것에 비해 회복이 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약을 챙겨 억지로 먹이려고 하면, 선우가 자신까지 만나는 것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자매는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었다.


선미는  방에 있던 선우를 마루로 나와 소파에 앉게 했다. 선우를 부축하며 마루로 나올 때  선우의  깡마른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났다. 자주 씻지 않아서 나는 냄새였다.


"선우야, 재혁이 죽었어. 그리고 본인 회사 주식의 40%를 너에게 상속하고 싶어 해.

단 2년마다 너와 같이 작품전을 여는 조건이야. 어떻게 할까?"


선우는 의욕이 전혀 없어 보이는 눈으로 선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작품들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엄청나게 느끼고 있어.

 다 불태워 버리거나 아님 칼로 캔버스를 다 긋고 싶어.

근데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

 여기서 걸어 나갈 수가 없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전시회를 한다고?"


선미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반박했다.


"아니야, 너는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들여다봐.

지금 작품을 시작할 힘이 없어서, 그 전의 작품들을 증오하는 거야.

다시 작품들을 그릴 힘이 생기면, 네가 그린 작품들을 사랑할 거야.

너는 네 작품들을 사랑해. 네 작품들은 마땅한 장소에 놓여야 해."


선우는 입을 앙다물었다가 폈다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언니, 피곤해. 나 이제 약을 먹기 시작해야겠어."


선우는 이번에는 스스로 일어나 천천히 걸어서 침실로 갔다. 선미도 선우를 따라 방으로 갔다.

선우는 침대 옆 서랍장에 가득 담겨 있는 약봉지들을 꺼냈다.


"뭘 먹어야 할지 언니가 알려줘. 그동안 약을 잘 먹지 않았어. 여기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거든.

간병인이 지킬 때도 먹는 척하며 삼키지 않은 적이 많아. 지금은 간병인도 지쳐서 나한테 맡겨."


선미는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

                                                                               

선우는 재혁의 회고전을 보기 위해 오래간만에 정장을 입고 선미와 집 밖을 나왔다. 재혁의 유고전은 대규모로 기획되어 과천 H미술관에서 6개월간 진행되었다. 전시의 규모와 기간이  고 장재혁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했다.


 선우는 커다란 게 드리워진 포스터 속 재혁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날 청혼을 거절했을 때, 화를 내다 갑자기 코트를 들고나간 뒤 만나지 못했다. 재혁과의 추억들이 재혁의 작품을 볼 때 순간순간 떠올랐다.

 선우는 익숙했던 작품들이 전시된 방들을 지나서, 뉴욕방이라는 죽기 전에 촬영했던 마지막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을 들어섰다. 황량했다.


'그가 지쳐 나가떨어졌구나'


선우는 재혁의 마음이 텅 빈 거리들에서 보였다.

이제까지 재혁의 사진들을 채우고 있던 젊고 아름답고 힘찬 모델들이 없는 뉴욕 도시의 풍경들이 을씨년스럽게 여기저기 벽에 붙어 있었다.


하늘에서 촬영되었건 지상에서 촬영되었건 텅 빈 거리에는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재혁의 이제까지의 작품들과는 전혀 달랐다. 선우는 감흥이 없었다.


<뉴욕방>을 제외한 다른 방들의 작품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선우는 재혁의 작품에서 모델들의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길을 잃은 걸까? 무엇이 풍부하고 넘실거렸던 그의 감성을 메마르게 했을까?

 도덕적인 잣대로 그의 작품을 재단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무너져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선우는 재혁의 황폐함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왜 작업을 멈추었나?’


선우는 번 아웃으로 텅 빈 마음에서 표현하고 싶은 욕구와 세상에 저항하고 반격할 힘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비난하고 싶어 한다. 이제까지 감탄하고 추앙했다가, 뭔가 원하지 않는 조금의 틈이 보이면 공격을 시작한다. 틈이 흠이 되고 먹잇감이 된다. 꼬리가 머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선우는 작품 안내 벽에 쓰인 재혁의 메모에서 발췌된 글을 여러 번 조그맣게 소리 내어서 읽었다.


선우는 재혁의 회고전을 보고, 그가 표현하기를 포기한 말들과 느낌들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선우는 재혁의 공허함과 무력감을 작품을 보며 그대로 전달받았다. 의 고뇌가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선우는 갑자기 양손을 주먹 쥐고 작품 속 하늘을 노려 보았다.


선우는 선미에게 재혁의 유언을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선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미는 선우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계기로 작품활동의 물꼬를 튼 것 같아 눈물이 그렁그렁거렸다.


'선우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걸까? 달리다 보면 날 수 있겠지?'


선미는 어릴 때 놀러 갔던 공원의 꽃밭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세 남매에게 헬륨가스 풍선을 사주었다. 선준은 뛰어다니느라 풍선을 날려 버렸는지도 몰랐다. 선미도 풀 숲에서 뛰어 오른 여치가 다리에 붙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노란 풍선을 놓쳐버렸다.

 선미가 망연자실해서 선우를 보았을 때, 선우는 란 풍선을 꼭 잡고 나는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선우가  하늘을 나는 듯 꽃밭을  뛰어다녔던 해맑은 선우로 돌아와 계속 작업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선미는 선우가 작업을 시작하면 정신과 의사인 자신도 긍지를 가지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로서 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숙과 선미는 처음 만남이 있은 후 3주 뒤에 만나 구체적인 협의를 위한 회의를 가졌다. 선우는 치료 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실무 일체를 언니에게 위임해서, 선미가 정숙이 제안한 조건들을 다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상속받은 재혁의 주식 40% 중 10%를 정숙이 인수해서 선우의 상속세를 마련하기로 했다.

격년으로 여는 전시회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열기로 했고, 두 회사가 번갈아가며 기획하기로 하고 비용은 반반씩 지불하기로 했다.

전시회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수익 또한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각 회사들은 자신의 작가들의 작품 운송은 각자 책임을 지기로 했다.

작품들이 옮겨질 때 분실 사고나 파손 사고가 제일 많이 일어나 혹시 소송이라도 생겨 두 회사의 협력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                                                                                                                                


재혁의 유산을 받은 후, 선미는 선우와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다니고, 맛집들을 검색해서 찾아다녔다.

곧 추석이라 먹을 것은 풍성해지고 있었고, 햅쌀이 드물지만 출하되었다.

햇살이 따뜻하고 바람이 선선히 부는 어느 가을날, 선미는 강화도 햇섬쌀로 밥을 지어 집밥처럼 한정식을 제공하는 맛집으로 차를 몰았다. 선미는 선우에게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어떻게 서든 제대로

살게 하고 싶었다.

맛집으로 달리는 국도에서 선우는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선미는 국도변에 좀 넓은 공간이 있는 곳을 찾아 차를 세웠다.

코스모스와 국화 백일홍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고, 붉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 끌랑과 강아지풀이 풍성하게 자라 있는  구불구불한  띠 같은 공간이었다.


선우는 차에서 내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바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선미는 선우를 운전석에서 지켜보았다. 멀리  갯벌 너머 청회색으로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재혁은 선우에게 많은 돈과 자신을 수시로 점검하고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선우는 재기할 수 있을까? ’


선미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손가락들로 톡톡 쳤다.


“나빠, 선우를 믿어야지, 왜 의심하지?”

선미는 소리 내어 자신을 나무랐다.


말없이 길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선우가 대견했다.

 침잠했던 공간을 벗어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날리며, 두 팔을 벌리고 바깥세상과 교감하고 있는 선우에게서 선미는 '감각하는 영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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