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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움 Aug 14. 2024

내 인생 최대의 난제

반주


 특히나 나의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피폐하게 만들었던 ‘반주’는 정말 내 인생 최대의 숙제였다.


 우스개소리로 목사 딸은 반주를 위해 길러진다고들 한다. 나도 역시나 피아노를 배웠고 다른 친구들이 바이엘과 소나티네를 칠 때 나는 ‘반주법’을 하나 더 배우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꽤나 잘 쳤고, 즐겁게 다녔다.


 어느 정도 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의 반주에 투입이 되었다. 작은 교회니 반주자가 잘 생기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때마다 특출난 능력자들이 있었지만 슬프게도 많지 않았고, 있어도 자리를 잘 지키지 못했다. 예배는 엄청 많지, 성가대도 있었지, 기도회, 부흥회라도 하면 기도하는 내내 쳐야 한다. 엄청 오~래. 남들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율동할 때 난 계속 피아노를 쳐야 했다.


 어렸을 때는 다른 친구들이 다같이 웃으며 율동하는데 나만 피아노에 앉아서 잘 치지도 못하는 것을 겨우겨우 쳐야 하는 게 싫었다. 난 손목도 약해서 통증이 상당했는데 그걸 견디며 쳐야 했고 생리통이 너무 심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을 때도, 손 등이 찢어져서 꿰맸을 때도, 교통사고가 나서 몸이 엄청 아플 때도 나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점점 나는 그냥 내가 반주 기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의 몸 상태나 감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이 반주가 중요하구나 하며 서러워서 울며 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실력에 대한 평가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어린 10살의 어느 주일이었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성가대 연습에 반주자가 없다며 날 불러다 놓고는 어려운 악보를 쥐어주고 치란다. 그래놓고는 띵땅거리는 나에게 못 친다고 면박을 준다. 또 어느 날은 예배 반주자가 없다며 갑자기 하라는 명이 떨어져 열심히 연습해서 겨우겨우 반주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평가질이다. 정말 도망치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난 도망도 못 쳤다. 목사 딸이라 거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니 이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교회 반주자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매 시간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반주자가 없으면 무조건 소환되었다. 좀 커서는 그냥 아예 반주자로 임명되었지만.

 피아노 반주는 내 평생의 숙제 거리였다. 나야말로 기쁘게 치고 싶었다. 이 자리를 제발 기쁘게 감당하게 해달라고, 즐겁게 연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하게 해달라고 그 누구보다 내가 기도를 제일 많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피아노 앞의 자리는 너무나 외로웠고 힘들었다. ‘나’는 죽고 그분이 살아서 움직이셔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 나의 모든 삶을 헌신하고 충성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에겐 너무 버겁고 어려웠다.


 예배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피아노 반주는 그냥 찬양 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 후에도 후반주를 해야 하고, 설교가 끝나면 말씀의 메시지와 어울리는 곡을 생각해 내어 기도 반주로 연주해야 한다. 축도가 끝난 후에도 연주를 해야 한다. 나는 대부분 조옮김과 변주 형식으로 반주를 많이 했어서 머릿 속에서 계속 멜로디와 코드들이 돌아다니고 계산하면서 반주를 했기 때문에 찬양을 부르면서 하기는 어려웠다. 찬양도 못하고, 남들 기도할 때 난 피아노를 치고, 설교조차도 메시지와 어울리는 찬양 생각하느라 예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가? 이렇게 예배해도 받으실까? 나의 예배가 제대로 하나님께 가고 있을까?' 고민되는 시간도 많았다.

 

 최근에 찬양 인도를 하는 교회 청년이 '예배다운 예배 좀 드려보고 싶다.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지.. 예배다운 예배.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오롯이 집중하는 그런 예배. 나도 그렇게 드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게 ‘성령’의 능력으로 피아노를 엄청 잘 치게 되었다. 청음이 되었고 절대음감이 생겨서 누가 치는 걸 곧잘 따라 치게 되고 몸에 익혀져서 어려운 반주도 곧잘 하게 되었다. 악보 없이도 칠 수 있고 눈을 감고 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조옮김도 어렵지 않아 목이 아프거나 고음이 불가한 인도자를 위하여 한 두 음 내려서 쳐주는 센스까지 탑재했다. 이러하니 더 이상 나에게 반주 실력을 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더욱 반주를 맡겼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쁘지 않았고 즐겁지 않았다. 늘 구석에 있는 피아노 앞에서 난 울며 피아노를 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필리핀 세부에서 7개월, 뉴질랜드에서 6개월 정도 살았던 때가 있었다. ‘외국이니 드디어 나도 교회를 골라 갈 수 있고 심지어 안 갈 수도 있어!’ 하며 호기롭게 나갔는데,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고 잘 교육이 된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교회를 찾아서 갔다.



 세상에나 하나님의 뜻인 건지, 그 큰 한인 교회에 마침 반주자들이 모조리 한국에 갈 일이 생겨서 내가 모든 반주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과정들이 엄청 길었지만(도망다니느라) 결론적으로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더 힘들게 반주를 하게 되었다. 아침 예배, 찬양 연습, 성가대, 무슨 행사는 또 왜 그리 많은지... 거짓말 않고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손목에 붕대를 감고 쳤다. 뉴질랜드에서도 열심히 반주를 했다.

 하 참.. 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렇게 싫어하는 자리였는데, 내 부모의 교회에서, 굳이 목사 딸이 아니더라도 난 결국 반주의 자리로 굴러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큰 교회에서 많은 세션들과 함께, 내 또래의 젊은 친구들과 웃고 즐기며 하니 많은 위로와 격려의 시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작은 교회 구석에서 외롭게 혼자 피아노를 치던 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하니 나름 즐기며 하게 되기도 하고 좋은 기억으로도 남았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나름의 해소와 충전과 회복의 시간들이 된 것 같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직장인이 되어서도, 결혼 후 임신해서 다리에 쥐가 날 때도, 심지어 갓난쟁이 아기를 맡기고서 변함없이 반주자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내가 조금은 더 즐겁고 조금은 더 기쁘고 조금은 더 반갑게 반주를 하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여전히, 아직도 교회 반주를 하고 있다. 아기를 낳고도, 내 아이들을 맡기고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가 아니라 내가 자처해서 하고 있다. 그리고 엄청 힘들지는 않다. 내가 나이가 좀 들어서 철이 들은 건지, 나를 무한 지지해 주고 수고했다 늘 말해주는 신랑이 있어서인지, 반겨주는 아이들 덕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교회 일에 있어서는 나는 무조건적인 신앙의 힘과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일해야 한다는 건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인간적이고 연약한지라 때로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가 매우 중요했고 또래들과의 연합이 외롭지 않게 했고, 수고했다 해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풀렸다. 비록 나는 그것밖에 안되는 신앙의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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