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초자아, 가스라이팅일까 내 신앙일까.
흔들리지만 나아간다
예배나 교회 일, 심지어 내가 공부하고 생활하는 많은 부분에서도 나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을 강력하게 조절해 가는 행동들이 개인적인 ‘신앙’의 범주인지, 나의 양심과 윤리적 기준이 되는 강력한 ‘초자아’인지, 그저 사람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심리적’ 범주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프로이트가 종교를 일종의 강박신경증과 비슷한 맥락으로 다루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나도 나의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 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다른 사람들이 수근댈까봐, 나의 부모를 나쁘게 평가할까봐, 나 자신을 안 좋게 볼까봐 등등 수많은 걱정과 근심으로 나의 행동들을 강박적으로 규율에 맞게 맞춰갔다.
예배를 빠짐없이 드리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감히 욕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도, 성인이 되어서도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던 것도, 연애를 함에 있어 혼전순결을 절대적으로 지켜나갔던 것도, 십일조와 많은 헌금을 드리고자 했던 것도, 매일 성경을 읽었던 것도, 교회 일에 헌신했던 것도, 그 모든 것이 ‘목사 딸’의 프레임으로 강력하게 나를 얽어매고 행동들을 다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이것이 나의 아빠가 목사라서, 집에서, 교회에서 매번 듣는 이야기니까, 그 안에서 나고 자라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세뇌당해서라고 생각되어서 벗어나려 했고 반항해 보려 했다. 심지어 기독교 자체가 괜찮은 것인가도 많은 고민을 했더랬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옳은가, 맞는가도 계속 의심해야 했다. 그냥 내 아빠라서 믿은 것은 아닌가, 내 아빠가 한 말들이 다 맞긴 한가 등등 비판에 비판을 계속 거듭해야 했고 성인의 시기에는 아빠에게 의심되는 모든 것들을 질문해 가며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호기롭게 수요예배도 빠져보고(겨우 이 정도) 나름의 반항 섞인 행동을 해보려 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속 깊은 곳의 찔림이, 양심인지 진짜 가스라이팅 된 나의 초자아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다시 나를 돌려놓고 돌려놨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고통스럽게 나의 시간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계속 의식화하고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따로 떼어서 보려 하는 여러 과정들을 거치며 20대를 치열하게 보냈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pk(pastor kids)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반항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힘들었던 것들을 풀어내는 시간들도 있었다. 내가 행하는 신앙의 모습들이 정말 무의식적인 습관인지, 가스라이팅 당한 강박인지 등을 열심히 따져가며 점차 진심이 들어있는 신앙의 모습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습관적인 의식과 나의 생활 반경에 의한 것들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신과 만나고 인격적인 체험을 하면서 그분의 진심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고 있고, 그렇게 나만의 방법과 신앙의 모습들을 찾아가고 있다.
나는 여전히 목사의 딸이고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다. 결혼을 한 후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결국은 신랑과 이제는 아이들까지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교회.
작은 교회, 목회자인 부모를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 규모가 작아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인간적으로 볼 때는 대기업에 밀려버린 동네의 구멍가게처럼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끝없이 소용돌이 치지만, 아직까지는 내 주어진 자리에서 함께하는 교회의 사람들과 ‘가족’이라 이름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우리 아이들을 예뻐라 해주고 퍼주시는 어른들, 목사의 딸이라서 경험하는 특혜들, 뭐 좋은 점도 분명 많았고 지금도 많다. 목회자의 딸이라서 경험하는 은혜들도 있고 신앙 가정만이 누리는 장점들도 분명 있다. 충분한 사랑과 많은 격려로 위로를 얻은 때도 수없이 많다. 그에 따르는 책임과 내가 지켜내야 할 자리들은 무거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감사히 잘 견뎌내고 있다.
글쎄, 이제는 나도 좀 늙고 나름 성숙해졌다고, 뭐 사실 지금 내 삶이 너무 바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신없어서 목사 딸로 겪어야 하는 것까지는 신경도 못 쓰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자리에서 일장일단의 삶을 잘 버텨오며 살아온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목사의 딸들이 나와 똑같지는 않다. 목회자의 자녀들이 다 비슷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천차만별의 상황이 있고 저마다의 다른 삶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엄청 힘들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해서 글을 쓰다가 몇 번을 멈췄는지 모르겠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지만, 목회자의 딸로서 느꼈던 아주 일부를 발췌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약간의 해소가 되기도 관찰이 되기도 했다. 나의 정체성은 절대 바뀌지 않겠지만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들과 그 자리에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 나갈지는 앞으로를 살아갈 나의 몫이다. ‘목사 딸’인 나만의 일부 내러티브는 여기서 끝이지만, 계속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나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목사인 아빠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사실은 꽤 남았지만 약간 그 날을 내가 더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빠가 안다면 속상해 하려나.. 무튼 '은퇴한 목사의 딸'의 삶은 또 어떤 모양새일지 모르겠지만 그저 나에게 주어진 곳에서 나의 신과 나의 주어진 사람들과 계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부단히 살아가야겠지. 그 모든 나의 삶을 응원하며, 혹시나 어딘가에서 아직도 고통 중에 있거나, 많은 혼란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목회자 자녀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