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
첫날 우리의 목적지는 바젤 이라는 도시.
바젤은 스위스 서쪽에 위치, 독일/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로, 네이버에 스위스여행을 치면 상위에 나오는 목적지는 아니다. 보아하니 유럽여행을 하다가 프랑스에서 스위스를 가는 길,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그냥 잠깐 내렸다가 가는 사람이 있는 정도 같았다. 어떤 블로그에서는 '그냥 시골도시인데 내려서 보기로 했어요^^', '보시다시피 시골이라 볼 건 별로 없어용ㅎㅎ' 이렇게 써 놓았던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그 사람이 왜 자꾸 (킹받게) "시골이에용"이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잘 모르고 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취리히, 제네바 다음으로 인구수가 많은 도시라고 나오고, 최초의 공공 박물관, 역사적 대학과 건물로 인해 문화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남들은 그냥 들렀다가만 가는 바젤에 우리는 총 일정의 절반에 가까운 3일을 묵기로 했다. 관광객이 많지 않다는 점과 문화/역사의 도시라는 것이 끌렸고, 프랑스/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사실 목적지를 정할 때 까지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나온 다음에는 내 휴대폰 심을 먼저 개통했다. 해외여행시마다 'Airalo'라는 온라인 심 앱을 이용하고 있는데 꽤나 편리하다. 어딜 가서 심을 받아서 갈아끼우고 할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데이터플랜을 미리 구매해 놓고 지시에 따라 개시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다. 7기가에 30불짜리인가를 샀는데 일주일 동안 반 정도 썼다. 데이터가 잘 되는 걸 확인하고 기차를 타러 갔다.
남편이 며칠간 철도앱 SBB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덕분에 기차이용은 참 쉬웠다. 이미 하프페어 패스를 사뒀기에 (스위스기차패스에 관한 내용은 2화 스위스패스 대신 이걸 사세요 참고) 결제정보가 이미 등록되어 있으니, 출발지와 도착지를 손가락으로 스윽 연결해서 나오는 스케쥴을 보고 그냥 구매를 하면 끝이었다.
기차를 타는 경험이 별로 없는 남편은 플랫폼으로 간다는 에스컬레이터를 냅다 타고 내려갔다. 행선지에 따라 플랫폼 번호가 있을텐데 싶었지만 일단 따라갔다. 역시, 일단 내려오면 플랫폼은 건널 수가 없다. 숫자를 보니 여기가 아니어서 캐리어를 끌고 다시 올라갔다가 옳은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스위스는 미국 서부가 아니란다, 기차 노선이 많다구 남편씨.
열차에 탑승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항에서 바젤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단다. 한국에서라면 지하철로 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유독 길게 느껴졌다. 도시에 가까운 기찻길 옆 벽에는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유럽도 그래피티는 막을 수 없나보군' 하고 생각했다. 유럽에 왔다는 긴장감과 기대감에 나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는데 어느샌가보니 남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요상하게도,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를 탈 일은 별로 없다. 일단 미국, 특히 서부 대중교통은 상상 밖으로 느리고, 몇몇을 빼곤 시설이 잘 유지되지도 않거니와, 기차 라인이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가지 않고 이스트베이에 있는 에머리빌로 통과한다. 옛날에는 가끔 칼트레인(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를 잇는 열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역시 나에게 대중교통을 타는 건 한국의 기억이 대부분인 셈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선로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주변을 따라 들어선 모던한 건물은 마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가는 장면을 연상케했다. 한국에서 머나먼 이 곳에서, 용산역이라니, 하고 혼자 웃었다.
바젤에 도착했다. 차가운 공기가 뒤통수를 때렸다. 천생 캘리포니아 인인 남편은 춥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고 구글지도로 숙소 갈 길을 찾았다. 숙소는 걸어서 16분, 버스를 타면 5분 거리였다. 다행히도 바젤에 묵으면 숙소에서 '바젤카드'를 주는데, 체크인 하기 전에는 카드 없이도 숙소까지 가는 대중교통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걸 여행준비하면서 봐 둔 덕에 편안하게 버스를 타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가 탄 쪽은 뒷역(?)인 듯 했다. 버스를 타고 3정거장 만에 내렸다.
아아아, 내렸는데 동네가 정말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우리동네 같았다. 자전거가 오종종 바쁘게 돌아다니고 문 닫은 작은 상점들, 어린이집이 보였다. 건물들은 요상하게 모던하면서도 유럽느낌이 났다(유럽이니까 당연한가?). 드르르르르르륵,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가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이름은 SET Hotel.Residence by Teufelhof Basel. 크고 무거운 문을 열면 일층 카페 및 로비다.
우드톤의 모던한 카페가 아늑하다. 모임장소로도 쓰이는 모양이고, 커피와 베이커리류도 파는 듯 했다. 뒤쪽으로 가면 귀여운 가든이 있고 Gym도 있는 것 같은데 가보진 않았다. 체크인을 하면 직원이 친절하게 바젤카드도 프린트 해 준다. 참,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짐을 끌어올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대학생 때 유럽여행 하면서 대부분의 호스텔에 리프트가 없어서 캐리어를 끌고 4-5층을 힘겹게 등반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기내용 캐리어이기라도 했지. 친구 둘은 한 단계 큰 붙이는 용 캐리어였다.
방이 마음에 들었다. 남편은 다른 호텔을 원했었는데 내가 우겼다. 관광지 한중간을 벗어난 곳이라 그런지 남편이 고른 호텔과 같은 가격에 더 넓고 좋은 방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지던스 건물이기 때문에 취사가 가능한 키친, 건조가 가능한 세탁기도 있다. 거실 겸 키친에는 앉을 소파도 있고 둘이 앉기 넉넉한 식탁도 있다. 소파는 뽑으면 침대로 변환가능 하고 침실도 따로 있는 걸 보니 아이가 있는 집이 머물기도 좋아보였다. 냉장고에 든 음료나 구비된 간식은 돈을 내야하지만 커피와 티는 무료다. 저 키친 옆 공간으로 들어가면 침실이고, 여닫이 문으로 닫아 분리할 수 있다. 화장실도, 티브이도 무려 두 개(!)씩. 일박에 20만원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수기라 저렴했던 걸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저 창문 공간. 거실과 침실 모두 저 커다란 창문틀(?)이 있는데, 창문을 통쨰로 열면 초록초록한 나무와 자그마한 뒤뜰, 옆 건물에 잘 꾸며놓은 정원이 보였다. 주택은 아닌 것 같고, 박물관도 아닌 것 같은 잘 정리된 정원. 앉아서 차 한잔 하기도, 밖을 구경하기도 정말 좋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여지껏 비지니스석에서 맘껏 먹여 놓은 것들이(3화 명품은 없고요 비지니스는 탑니다) 어정찌게 남아있어 뭘 먹기가 뭐했으므로, 쿱(마트)에 가기로 했다. 가까운 쿱은 10분 정도 거리에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향해 걸었다.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가로질러갔다. 해가 어스름히 넘어가는데 좁다란 골목이 비탈져 내려갔다.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건물 1-2층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불빛이 나는 작은 식당은 더 이상은 빈 자리가 없을 만큼 풍요롭게 가득 찼다. 불빛에 와인잔이 빛났다. 아마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지막한 소리로 흘러나왔다.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관광객을 대상으로 번쩍거리는 곳이 아니다보니 너무 허름하게 나와 사진찍기를 포기했다. 골목을 돌아 나오니 텅 빈 광장에서 누군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중후한 음색이 울려퍼졌다. 나는 빠르게 사랑에 빠졌다.
(지금 다시 들어보니 음이 많이 떨어ㅈ...)
원래 가려고 하던 쿱이 문을 닫아서 다른 곳에 들렀다. 배가 고프지 않아 달랑 팝콘하나, 물 한 병, 작은 우유 한 팩 사들고 나온게 다다. 깨어 있은 지 20시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그저 지는 해가 아까워,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거리를 걸었다.
도시 중심부에는 1600년대인가 부터 시작된 바젤대학이 있고, 여기저기에 과와 건물들이 흩어져있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그 대학의 메인구역과도 가깝지만, 무엇보다 예술대학건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 늦어가는데도, 예술대학 앞을 지나가는데 연습실마다 밤에도 열심히 연주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청아한 플룻소리가 들렸다. 내가 음대를 갔으면 저렇게 열심히 했을까, 저들은 어떤 예술적 고뇌를 하고 있을까. 대학 때 공연 준비를 하며 독주곡 연습을 하던 기억도 났다.
방정맞게도, 예술에 열중한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커피를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방 창문으로 보이는 옆 건물의 정원은 바로 저 예술대학의 중정이었다. 나는 숙소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오면 한적한 길가도 좋고, 공기마저 아름다운 예술대학도 좋고, 바로 앞을 지나가는 초록색 트램도 좋았다.
남편과 들떠서 식탁에 앉아 팝콘을 까먹었다. 아까 비행기에서 치워두었던 감자칩도 먹었다. (전 화 참조) 남편이 자기는 팝콘이면 된다더니 자꾸 내 감자칩을 뺏어먹었다.
짭짤하고 바삭한 감자칩을 씹으며, 우리는 아기자기한 거리가 얼마나 멋졌는지, 여기 살려면 집세는 얼마나 할지, 아까 본 '아시아 음식 전문점'의 셰프는 대체 누구길래 한 곳에서 커리와 스시와 딤섬을 다 요리해 팔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며 낄낄거렸다. 거실에 앉아있는데 바로 옆에 침대가 보이는 게 아니라 호텔느낌이 안 났다. 식탁도 있고 주방도 있으니 이제 방금 왔는데도 여기 오래 눌러 앉아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왠지 다시 먼 옛날이 된 신혼집이 된 것만 같은 설렘. 여기 한 달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깨어있은 지 24시간 째. 이제는 억지로라도 좀 자야했다. 내일의 바젤이 우리를 기다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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