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뷔페에서 실제로는 얼마 못 먹는 것 처럼
대학생 때 기차패스를 이용한 여행이 큰 인기였다. 시작은 유레일패스가 유명해지면서 였던 것 같고, 추후에 한국에도 학생용 기차패스(내일로)가 생겼더랬다. 청년 할인을 받은 기차패스는 꽤나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도 유레일패스를 이용한 유럽여행은 물론 내일로로 국내 여행도 두번 다녀왔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당연히 나는 이번에도 기차패스를 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우리는 차를 운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동성 있게 기차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고 더 저렴할 것이라는 기대. 처음에는 유레일 패스를 사려고 했다. 유레일 패스 내에서도 특정국가 패스만 따로 팔기도 하지만, 스위스는 왜때문인지 (EU가 아니어서 그런가?) 스위스패스를 자기네 철도청(?)에서 따로 팔고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할인을 받을 수 있는 20대초반이 아니었으며(또르르..), 무료로 얹을(?) 수 있는 애나 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패스 모두 다 연속으로 사용하느냐 (consicutive), 중간에 기차를 안 타는 날이 있느냐 (Flexi)에 따라, 거기다가 날짜 길이에 따라 표를 고를 수 있게 되어있다.
우리 일정에 맞게 남편과 나 두 명의 패스를 구매한다고 할 때,
유레일 : 7일 플렉시패스 $827
스위스패스: 8 연속패스 $965.98
(나 이모티콘 넣는 거 싫어하는데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다)
한화로 치면 기차패스에만 130-150만원 가량을 내고 시작하는 셈인데, 며칠을 생각해봐도 뭔가 억울(?) 했다. 여기다가 융프라우 패스 (165프랑)까지 더하면... 큽.. 일주일 조금 넘는데 기차비용만 뭐가 이렇게 비싼 것인가.
남편과 구글문서를 공유해서 계획을 짜면서, 매일매일 마음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패스를 사면 뭐 여러가지 딸려오는 게 있긴 하다. 가끔 페리도 무료로 탈 수 있고 박물관이나 기타 어트랙션도 많이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 결심했어! 그냥 스위스패스를 사자!" 했다가도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아예 드는 교통비를 어떤 패스를 샀을 때 / 안 샀을 때 / 경우를 다 나눠서 비교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 써보고 나니 아예 다른 선택지가 제일 괜찮았고 그걸 선택하게 됐다. 그건 바로, 스위스 하프페어 (Half fare) 패스. 120 스위스프랑 (130불 가량) 스위스의 모든 대중교통이 한 달 동안 반값이다. 이 선택지가 가장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1. 가고 싶은 도시에 시티패스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
미국 호텔에 묵다보면 뭔 요금이 그렇게도 많이 붙는다. 그 도시 세금부터, 리조트 fee다 뭐다 해서 잔뜩 붙기는 하는데 그 요금이 딱이 나에게 뭘 해주지는 않는다. 있더라도 아주 쓸모없는 것들 - 도시 내 유선 전화 이용가능 (쓸 일 없음), 원하면 신문 받을 수 있음(원하지 않음), 컨시어지 활용(자기네들이 호텔 여행상품 팔고 싶어서 컨시어지 만들어 놔 놓고?) 등등 뿐이다.
신기하게도, 스위스는 관광객에게 이 시티택스를 걷으면서, 그 대신 그 도시를 이용할 수 있는 시티카드(City Card)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묵고자 한 도시는 크게 바젤, 인터라켄, 라우터부르넨, 취리히였는데, 그 중 대부분을 차지한 바젤과 인터라켄에서는 그 도시의 숙소에 숙박하면 시티카드를 주었다. 이 카드가 있으면 시티 내 대중교통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어트랙션의 할인도 해 줬다. 우린 루체른을 잠깐 들르기만 했지만 여기도 숙박을 하면 시티카드(패스)를 준다.
게다가 융프라우패스를 구매할 예정이라면, 이 패스에 융프라우 근처 어트랙션/페리 혜택이 또 포함되어있다.
때문에 스위스패스나 유레일패스의 기타 어트랙션/박물관 할인은 굳이 의미가 없어졌다. 궁금하신 분은 그 예로 바젤카드 홈페이지를 둘러보셔도 좋을 것 같다. https://www.basel.com/en/baselcard
2. 이동이 적거나 일정이 긴 경우
20대 때의 유레일 여행 때는 약간 미친 사람들 처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짧은 일정에 기차를 거의 매일 탔고, 야간열차도 3번인가 탔었다.
근데 이제는 그렇게는 매번 짐을 싸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고, 사실 그럴 체력도 못 되기 때문에 어디에 체크인 해서 짐을 두고 돌아다녔다. 취리히-바젤-인터라켄-루체른-취리히 루트로, 융프라우를 빼면 그냥 기차값 정상가격을 내는 게 스위스패스나 유레일패스보다 저렴했다. 통념상 '무제한 패스는 더 저렴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는데, 사실 그 가격 값을 하려면 엄청 정신없이 기차만 타야한다. 패스 만드는 사람들도 다 통계나 근거를 가지고 만들텐데, 손해보는 장사를 할 이유가 있나.
여행 일정이 길다면 더더욱 하프페어패스가 유리하다. 하프페어는 한 번 구매하면 1달동안 유효하지만, 유레일이나 스위스패스는 이용날짜에 따라 당연하게도 가격이 점점 높아진다.
3. 스위스 철도앱 만세
내가 기차값을 불꽃검색하고 하프페어가 괜찮겠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 남편은 "스위스 철도 서비스 좋기로 소문났는데 한 번 보겠다"며 앱을 다운받았다. 최근에 새로운 SBB Mobile 앱을 내놓았는데, 굉장히 잘 만들었다. 남편이 두 명 치 하프페어 패스를 구매해 등록해 놓으면, 이후에 티켓을 검색해 구매할 때 자동으로 적용이 된다. 게다가 사용자 편의를 위한 모션 구현도 창의적이어서, 일일히 역 이름을 검색할 필요가 없이 최근에 검색했던 역들이 뜨면 그걸 그냥 손가락으로 슥 연결하면 된다. 철도는 물론이고 이걸로 버스나 트롤리등 모든 대중교통은 다 검색하고 예약할 수 있었다. 처음에 패스를 사고자 했던 이유가 매번 열차 검색하고 티켓 구매하고 하는게 번거로울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데, 이 앱이 워낙에 편리했던 지라 무마되었다. 남편이 오히려 앱 사용하는 걸 재미있어 해서 이득이었달까.
4. 융프라우를 가는데 꼭대기는 안 감
융프라우까지 따지면 더 복잡해진다. 융프라우에는 그 근처 산악철도를 다 이용할 수 있는 융프라우패스 (꼭대기 빼고) 가 따로 있고, 그 근방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한국에 동신항운이라는 데에서 "융프라우 VIP 패스"라는 걸 독점판매(?) 하고 있어서 헷갈린다. 정확히 말하면 이 VIP패스는 동신항운에서 융프라우와 뭘 맺고 자체로 만든 패키지이고, 융프라우 자체에서 판매하는 패스와는 다르다. 대학생때 갔을 때 꼭대기에서 신라면 먹은 기억이 있는 걸 보니 여기 패스를 샀었나 보다. 실제로 네이버에서 '융프라우패스'라고 치면 '융프라우 VIP패스' 가 더 많이 나온다.
사람들마다 하고 싶은 것과 일정이 다르기 때문에 잘 봐야 하는데, 동신항운의 '쿠폰'이나 'VIP 패스'가 더 저렴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융프라우 꼭대기는 가 봤고 4월에는 멀리 볼 수 있는 날이 희박하기 때문에 뺐다. 그 다음에 공식 홈페이지와 동신항운 홈페이지 가격을 비교해 봤다.
하프페어패스가 있고, 꼭대기를 가지 않는다고 할 때, 3일권을 고른다면 동신항운은 215프랑(꼭대기 포함), 융프라우 공식페이지는 165프랑 (꼭대기 미포함). 인당 50프랑 정도가 차이가 나니, 2인을 치면 융프라우 패스+하프페어가 한화로 15만원 정도 더 저렴했다.
4-2. 융프라우 패스 아예 없이 하프페어만
여기에서 사전 계획에 더 부지런한 분이시라면, 융프라우 패스를 아예 안사고 하프페어만을 이용해서 융프라우 기차들을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위의 표에서도 보다시피 융프라우 패스를 구매할 때 하프페어 (Adult reduced) 가격은 사실 하프(절반) 할인이 아니고, 45불 할인이다.
반면 산악열차 티켓을 매번 따로 구매한다면 그건 반값이다.
아래는 인터라켄 동역-융프라우요흐 꼭대기 왕복티켓 가격표다.
정상가는 223.80이지만 하프페어 카드가 있다면 111.90, 정확히 절반가격이다. 잘 보면 스위스패스나 유레일보다 할인율이 더 크다. 이건 꼭대기 가는 표라서 꼭대기에 얼마나 머물지는 시간을 정해야 하지만, 그 외에 가는길 오는길은 point-to-point티켓 인 경우가 많아서, 사실 그 중간에 내려서 얼마든 시간을 보내다 열차를 올라타도 상관이 없었다 (2024. 4 현재) 타야하는 열차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는 '무제한패스' 처럼 내려오면서 중간 중간에 내려서 구경해도 하루가 모자를 수 있다.
이게 정말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어르신들/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어차피 하루에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 힘들다. 게다가 여긴 어딜 가든 날씨가 따라줘야 갈 수 있는 거라서, 내가 많이 돌아다니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글에 쳐보면 티켓을 미리 사기보다는 그 날 그 날 날씨를 확인 한 후 어딜 갈 지 체크하고 구매하길 권장한다. 하프패스가 있는 상황에서 하더클룸 같은 건 19프랑이면 되는데, 융프라우 패스 값을 뽑으려면 매일 매일 모든 구석을 다 타고 돌아다녀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혹시 본인이 매번 가격 비교하고 새로 티켓 끊어서 돌아다니는게 아무 문제 없다 싶으시면 엄청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한 모든 것은 4월(비수기)위주이다. 여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티켓이 다 팔리거나 사람이 먼저 찰 수 있어서 돈을 더 주더라도 유동성이 있는 패스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
***패스 가격은 여름/겨울/기타 비수기 등등에 따라 매년 가격이 바뀌니 주의
결과를 보자.
스위스패스+융프라우패스였으면 (439+165)*2인=1208프랑이었을 것을,
하프페어+융프라우패스+절반 교통비로 해서 (120+165+130)*2인=830프랑에 막았다.
2/3로 막은 내 자신 칭찬해 ㅋㅋㅋ.. 사실 그 때 그 때 머리를 잘 쓰면 융프라우패스도 없이 더 아꼈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너무 계속 신경쓰기 싫어서 그만두었다. 덕분에 열심히 돌아다녀서 뽕을 뽑았으니 후회는 없다. 출발 전에 기차와 교통비 따지다가 너무 승질이 나길래 한 번 꼭 써보고 싶었다. 인당 7만원씩 28만원을 내고 뷔페 조식 먹으러 가서 생각보다 얼마 못 먹는 것 처럼, '무제한 패스'가 꼭 싸지만은 않다는 것.
그나저나 정작 여행 얘기는 언제부터 시작이 될는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