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학점이 중요하지 않을 때, 나를 꺼내어 썼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수업은 이미 자서전을 냈거나 출판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절반 정도 되는 워크샵이었다. 각자 주제를 잡고 챕터를 써 프린트해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다음 수업 시간에 피드백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사실 내가 뭘 기대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그냥 막연히 뭔가를 배운다는 것과 스탠포드라는 뜬구름에 들떴었던 것 같다. 막연히 어떤 가이드는 정해주겠지, 가르쳐 주겠지 했던 나는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써 둔 게 있거나 뭘 해야할 지 아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쓰라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한국에서 자란 나로서는 취업 취학용이 아닌 이상에야 또 막상 써 본 적도 없고 생각도 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순간은 중학생 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성악으로 예고 지원을 제안받았던 날이었다. 중학생 때 친구와 별 생각없이 가입해서 합창부 생활을 3년동안 했다. 그 안에서 호흡법도 배우고, 함께 무대도 준비하면서 굉장히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냈다. 노래를 하는 것은 즐거웠다. 호흡과 음과 곡이 딱 맞았을 때, 내 노래가 몸을 휘감아 팡 터져나가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선생님이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부모님과 예고지원을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해 주셨을 때, 아마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내 생각보다 더 나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 당시 부모님은 맞벌이중이셨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귀가해서 엄마에게 집에 돌아왔다고 전화를 했었다. 전화로 기쁨에 들떠 예고 이야기를 전했고, 물론 대답은 간단한 No 였다. 별로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내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부모님은 엄했고, 집안 살림이 가난하진 않았지만 음악을 시켜줄 정도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울었던 것 같다. 아니 멍 했던가.
이게 뭐라고 나는 이걸 쓰면서 또 눈물이 난다. 부모님은 아마 그 순간이 나에게 굉장한 상처로 남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실 것이다. 음악선생님의 그 제안이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나는 그 이후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수능을 좀 망쳤지만 대학교에도 진학했다. 대학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마음 한 구석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배워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는 좌절감과 아쉬움이 둥글게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과제를 쓰면서 깨달았다.
내 영문 글쓰기는 지금보다 더 형편없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아직도 기억 나는게 '용돈'이 영어로 뭔지 알 수 가 없어서 영단어 검색을 했더니 "Pocket money"라고 나와서 그렇게 썼는데, 워크샾 때 수강생들이 포켓머니가 뭐냐고 해서 당황했었다. 아마 "allowance" 라고 썼었어야지 싶다. 또 전화통화 중 상대방이 대답이 없는 대화에, "......." 라고 쓴 걸 강사가 이런 건 안 쓴다고 첨삭해 주었다. 한 수강생이 아 자기는 이해가 된다며 페이스북 메신저 문자 보낼 때 상대방이 쓰고 있으면 점 세 개 뜨는 걸 연상시킨다고 답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최종 학점은 D+ 였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학점이 나한테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최초의 순간이었다. 대학이나 대학원 때에는 매 순간이 A+이 아니면 학점평점을 깎아먹는 형편이어서, 나는 언제나 상대평가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 치며 살았다. 각자가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배우고 내면화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A+이 아닌 학점은 모두 실패였다. 나는 학점에 절망하지 않는다는 그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비유한다면 싱가폴에서 온 지 3개월 된 사람이 한국에서 서울대 자서전 출판 세미나를 들은 것과 같은 것 아닌가? 나는 도전했고, 이 경험이 나중에 쓸모가 있든 없든 내가 피하고 살았던 순간을 글로 써 내어 마주보았다는 것이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경험은 이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스탠포드에도 커뮤니티 합창단이 있어서 3학기 동안 세션에 참여했다. 나는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 후, 그리고 미국에서까지 계속 합창단을 해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전공으로서가 아닌 음악이 나의 성장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내러티브 형식의 졸업논문을 쓸때, 이것은 나의 논문 주제가 되었다. 엘리트 교육이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음악문화(Musical Culture)가 영유아의 사회정서적, 인지적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나의 성장과 교사로서의 커리큘럼을 분석하여 영유아 발달 전반에 긍정적이라는 결론을 썼다. 물론 저 Memoir 수업에 썼던 부분도 활용했다.
나는 지금도 샌프란에서 합창단을 하고 있고, 전공이 아니어도 언제나 노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말도 못하고 슬퍼하는 중학교 3학년의 나를 돌아보면 아직도 가슴 아프지만, 지금의 나는 글로써 치료받았다. 괜찮다고, 사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 참 많더라 하며 안하길 잘했다고, 오히려 엘리트 교육이 아닌 음악을 교육에 접목하기 때문에 더 많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너털웃음 지으며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다. 기왕이면 하겐다즈로.
오페어 관련 궁금하신 분들께서 질문을 주시곤 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채널을 개설해보았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 하이데어 멘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