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축가는 바로바로바로
일곱시 쯤이 되자, 손님들은 자리에 앉고 우리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로 다시 갈아입고 나왔다.
First Dance
미국사람들 결혼식 리셉션(피로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바로 "First Dance" 라고 해서 입장하자마자 신랑 신부가 로멘틱한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결혼식 후 부부로서 처음 추는 춤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많이 둔다. 소셜미디어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보면 눈물콧물을 쏙 빼놓는 감동적인 장면부터 신랑신부가 준비해서 웃기거나 멋진 무대를 준비하는 다양한 형식을 볼 수 있다.
그래, 의미는 다 좋다 이거야, 근데 나는 춤을 못 춘다. 남편도 춤을 못 춘다. 정말 세상에 춤이라고는 민망해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못춘다ㅋㅋㅋㅋㅋ.. 결혼식 전 부터 우리는 어떻게 수업이라도 들어야 하냐 고민도 하고 유투브를 보고 연습도 해 봤더랬다. 아잇, 그런데 이건 아니다. 나도 난데 남편은 걸을때도 손 발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몸치라 해답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뺐어도 괜찮았을 텐데. 마치 화촉점화처럼 거의 포함된 단계라 빼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최대한 짧게.. 뺐다. 음악을 틀어놓고 목각 인형처럼 서로 손을 맞잡은 다음 둥가 둥가 삐걱삐걱 둘레렐레 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머~이러면서 사진을 찍는데 당장 휴대폰 전부 압수하고 싶었다. 어휴, 어색해.
식사 시작-
춤에서 살아 남고 나서 드디어 우리 자리에 앉았다. 이런 저런 안내방송을 하고 7:20분 즈음 부터 샐러드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웨딩 슬라이드
그리고 나서 가장 먼저 본 것이 내가 만든 웨딩 슬라이드(동영상). 남편 아기 사진과 내 아기때 사진으로 등장하는데,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음악을 깔아놨더니 일단 시어머니가 울면서 시작하셨다. 2개국어로 만든 보람이 있었다. 영상편집하면서 저 노래를 하도 많이 들어서 한동안 도입부만 들어도 화가 나곤 했었지만.
샴페인 건배
다른 일반 와인은 하우스 와인을 썼지만 나가서 사와서 콜키지 피를 내고 이용한, J 와이너리의 스파클링 와인은 이를 위한 용도였다. (사실 이 때 쓰라고 시어머니가 바카랏에서 삐까뻔쩍한 노란 샴페인 글라스 2 개를 보내주셨는데, 그걸 하와이까지 왔다갔다 들고 올 자신이 없어 못 썼다) 모두의 새로운 잔에 스파클링을 따르고, 신랑신부를 위해 건배를 한다. 다 마셔버리면 안되고, 이후에 스피치를 할 때 건배를 제안하면 그 때도 써야한다.
웨딩스피치
이건 신랑신부 측에서 친지가 나와 한마디씩 하면서 신랑신부를 축복해주는 코너다. 사실 나는 미리 양쪽의 스피치를 다 미리 받아 영어는 한국어로, 한국어는 영어로 번역을 해가지고 띄울 슬라이드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은 다 알고 있었다. 손님들이 볼 수 있도록 영어/한국어를 둘 다 하는 친구에게 슬라이드를 맡겨서 적당한 때에 넘겨달라고 부탁해놨다.
나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도 뭉클했다. 참나, 결혼식 할 때도 안울었는데, 이번에는 말하는 사람도 울고 듣고 있는 나도 울고 손님들도 울고 그랬다. 조금 민망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예쁜 이야기들로 축복을 해 주니 너무나 고마웠다. 남편쪽에서 스피치를 하는 사람들은 꼭 마지막에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커플의 앞날을 축복해 주세요, 건배!" 하기 때문에 아까 받은 샴페인을 잘 들고 있어야 한다.
이러고 나서야 이제는 좀 먹는데 집중할 수 있다. 전혀 생판 알 길이 없는 손님들이 같이 앉아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신기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남편과 나의 또래 친구 손님들이 같이 앉았다.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게, 국적이 다르다고 해도 나이대가 비슷하다보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과 내가 정말 편안했다.
양쪽 부모님은 편안하시라고 각각 한국인테이블, 미국인 테이블에 배정해드렸는데, 내쪽 손님으로 와 주신 분들이 우리 엄마 아빠를 너무 살뜰히 잘 챙겨 주셔서 감사했다. 부탁을 드린 것도 아닌데, 필요한 건 없는지 다 가져다 드리고, 의자 옮겨드리고, 내내 엄마 아빠의 신난 자랑도 들어주셨다. 그 분들 덕분에 나도 영어가 어려운 엄마아빠를 걱정하지 않고 내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코스요리를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이 정갈했고, 버팔로치즈/토마토 카프레제 - 참치 타다키/포케/사시미 - 스테이크 & 랍스터 로 이어지는 코스 메뉴 선택이 탁월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결혼식 저녁식사. 남들은 자기 결혼식에 밥 먹을 겨를이 없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다 먹었다 흐흐..
케이크 커팅식
아까 꾸민 케이크를 자를 때가 왔다. 이게 사진이 참 잘 나오니 결혼식에 케이크 커팅식은 꼭 하시길 바란다. 이 케이크는 손님들의 디저트로 써야 하니 얼굴에 바르거나 할 수 없다.
디너 쇼 - 아티스트는 나야 나 바로 나
저녁 메인식사를 모두가 마쳐갈 무렵에 다른 미국 결혼식 파티에서는 디제이를 고용해 춤을 추고 노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춤에는 치가 떨리므로 뺐다. 디제이도 엄청 비싸고, 거기다 춤을 춰야하면 춤 출 바닥도 설치해야했으므로 디제이를 뺀 것 만으로도 몇 백~ 천만원은 절약이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손님들이 케이크를 즐기면서 함께 할 이 날의 엔터테인먼트는 바로 나.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준비해 온 노래 두 곡 정도를 부르기로 했다. 사실 합창을 오래하면서 합창연주회는 물론이고 다른 결혼식 축가도 종종 하러 다녔었으니, 내 결혼식에서 노래 못할 이유는 무엇이랴?ㅋㅋㅋ 하나는 phantom of the opera 중 'Think of me', 또 하나는 '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불렀는데, 어유, 웬걸. 마이크 세팅이 너무 호화로와서 정말 아름다웠다.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손님들 표정을 보는데 나 대신 꿈꾸는 표정을 해 주고 계셨다. 준비한 두 곡이 끝나고 앵콜이 쇄도(?)해서 무반주로 하나를 더 불렀다. 디즈니 Tangles 의 'I see the light'.
결혼식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을 뽑으라면 바로 이 때였다. 장장 몇 달에 걸쳐 준비한 결혼식이 잘 맞아 떨어졌고, 손님들도 무사히 즐겁게 식사하고 계시고. 하와이 해변의 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 휩싸여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드리는 것. 아아, 행복해.
9시쯤이 되서 피로연이 파할 시간이 왔다. 그 동안의 나와 남편의 고생도 잘 마무리가 됐다. 5시부터 시작한 결혼식에 피곤하셨을 법도 한데, 아무도 일찍 자리를 뜨지 않고 마지막까지 즐겨주셨다. 아직 하와이에서 며칠이 더 남긴 했지만 이제 더이상의 결혼식 이벤트는 없다. 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답례품인 하와이안 쿠키를 나눠드리며 하나 둘 씩 헤어졌다. 한국에서 온 지인 손님들은 모두 '세상에 덕분에 하와이 까지 와서 미국 결혼식을 즐겨본다'며, '이런 결혼식은 생전 처음 참석해본다'고 세상 신나는. 텐션으로 좋은 말씀들을 해 주셨다. 멀리까지 와 주셨는데,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저 식사가 맛있으셨는지, 술 맛있게 많이 즐기셨는지.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다.
와, 끝났다. 아직도 정산할 게 많이 남았지만, 일단은 끝이다. 멀리 안 가고 그냥 호텔 방으로 올라가면 되니 호텔로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고, 든든한 사랑에 감사했다. 내 생의 최초의, 최고의 파티.
다시 하고 싶으냐고?
아니, 별로 그러고 싶진 않다ㅋㅋㅋㅋㅋㅋ 한 번이면 족하다.
- 다음 화에서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