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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안 Nov 02. 2024

나의 꿈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는 것이었다.


         


  

  작년 1월에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1년 4개월이 지났다. 늦둥이인 막내딸인 나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2년 6개월 정도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었다. 5년여간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셨던 아버지의 요양 등급을 받아서, 요양보호사 선생님에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외근이 잦으신 어머니와 바쁜 형제들을 대신해 아버지가 상한 음식을 드시지 않도록, 거동이 편리할 수 있도록, 좀 더 밝은 불빛 아래에서 생활하실 수 있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서 환경을 꾸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오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화장실에서 낙상사고를 당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에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코로나 때문에 수술실 문제로 골든타임이 한참이나 지난 5시간 후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이미 뇌의 기능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더는 회복이 어려운 상태였다.


  언제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대로 아버지의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평생 연락 안 하고 지내시던 외국에 계신 혼외 자녀분도 영사관을 통해 찾아서 상속절차 등을 알려드리고, 두 분이 그래도 살아생전 모습을 보면서 기도드리고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생전의 원을 풀어 드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에게 늘 부족한 자식이었다..."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구구단을 다 외운다거나,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도, 나는 가부장적인 집안의 장남이 낳은 딸 넷 중 막내에 불과했다. 평생 없었어야 할 ‘어떤 존재’로 여겨졌고 나는 슬프게도 그것에 익숙해졌다.  ‘지워져야 할 어떤 존재’로 평생을 살아오던 나는, 아버지 장례식 절차를 의논하던 자리에서, “너는 머리가 짧아서 조문객들한테 혐오감을 줄 수 있으니, 가발을 꼭 쓰도록 해라.”라는 말을 들었었다.  

  나에게는 사형선고 와도 같은 말이다. 나의 머리길이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줄 수도 있으니, 가발을 쓰라는 말은,  나의 존엄을 짓밟은 정도가 아니라 삶을 이어나갈 이유조차도 의문을 갖게 만드는 말이었다. 나는 바디디스포리아의 범주에 '머리카락'까지도 포함되는 사람이어서, 어머니를 이야기를 수긍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치의 선생님한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저에게도 연락을 주실 수 없겠냐고 간곡하게 부탁드려 봤지만, 병원에서는 가족들 간의 분쟁에는 개입할 수 없고, 원칙적으로 보호자 한 분에게만 연락을 드릴 수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부모의 장례식조차 갈 자격이 안 되는 나란 존재의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에 설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빠져, 이제 그만 삶을 포기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노력보다 더 큰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삶에 대한 용기가 시들었을 즈음, 자신의 춤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한 아티스트를 응원해 주고 싶어서 댄스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 나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찾아서 만들어 보고 싶다 ‘라는 강한 동기가 생겼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 그리고 카메라. ‘춤’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그곳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비록 트랜스젠더의 외형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나의 몸이 작품이 되어 멋지게 춤을 추고 영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또 그 영상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면, 어머니도 나를 아버지의 장례식에 불러주지 않을까 싶었다. 중증 우울증이 악화되어 매일매일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던 나는, 그렇게 새로운 꿈을 갖고, 마이너스 통장을 한도까지 써서라도 죽기 전에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로 ‘춤’을 배우는 시간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뚝딱 킹’인 나에게 춤을 배우는 과정이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춤 자체도 처음이었지만, 몸이 너무 뻣뻣했고, 유연성도 많이 부족했고, 수업을 따라갈 체력조차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제일 나이가 많고 춤도 제일 못추고 머리가 짧은 여성도 나밖에 없는것 같아서 수업 도중에 뛰쳐나가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목표가 있었기에 내일 죽을 각오를 하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을 배워왔다.



 나의 모든 자아를 다 내려놓고, 무조건 ‘해내야 한다’. ‘할 수 있다’라는 각오를 가지고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




여성의 신체, 남성의 신체 그 어딘가에 있는 나의 몸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했다. 비록 뚝딱이인 내 모습이 전신거울을 통해 가감없이 보여지는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이 문을 나가는 순간, 나는 바로 ’죽는다‘ 라는 심정으로 매번 수업을 들었다. 춤은 나를 살리기 위한 과정, 그 자체였다.



     


  작품을 시작하기도 전에 춤을 배우기 시작한 후,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장례식에 여성복을 입고 벙거지 모자를 써서 짧은 머리를 가리는 모습으로 온다는 조건으로 나를 초대해 주었다. 너무나 나답지 않은 모습을 하라는 명령이었고, 나 스스로 죽을 만큼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힐댄스까지 하면서 그렇게나 열심히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여성복을 3일간 못 입을게 뭐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어머니가 가슴절제수술을 하고 살아가는 나를 긍정해 주지 않으셨던 건 통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남은 인생에서 딱 3일만 그렇게 참고, 그렇게라도 해서 아버지의 마지막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장례식에는 여러 손님들이 오셨고, 어머니와 친언니는 나의 외모를 비하하며 “쟤가 남자들하고 같이 일해서 머리가 저렇게 짧은 거예요”라고 말한다거나, 잠깐이라도 모자를 벗을라 치면 다시 모자를 쓰라고 화를 내곤 하셨고, 언니는 나의 사진을 몰래 찍어 회사동료에게 보내며 ’ 장례식에 벙거지 쓴 여동생‘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라고 회사 동료에게 보내며, 나를 서슴없이 조롱하기도 했다.               


  고역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춤을 배우기 시작하고 두 달 반동안 매일 거울 속에 나 자신과 수없이 마주하면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해서 얻게 된 ’ 자신감’ 덕분이었다. 어떠한 모욕에도 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인 자신감에서 뿜어져 나온다. ’ 내가 아름답다 ‘라고 믿기 위해, 나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노력한 덕분에 얻게 된 생명과도 같은 교훈이었다.


  ‘춤’ 은.. 나의 존재가 무엇이든 ”살아서 움직여도 괜찮다.”라는 힘을 주는 예술이다.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타인으로부터 항상 짓밟히고 평가된 채로 살아오던 나에게, 처음으로 ’ 어떤 아름다움을 입어도 괜찮다 ‘라고 말해 준 예술이다.  



  춤을 통해 나의 몸을 ‘작품화’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춤이 너무 즐겁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춤을 추고, 또 춤추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춤을 춘다. 닉네임인 ‘백안’이라는 뜻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나.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신의 존재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라고 내가 한 아티스트에게 응원해 주고 싶었던 바로 그 말들이, 더 큰 응원과 지지들로 다시 나에게 돌아와 주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하고, 또 살아갈 힘을 잔뜩 받았다.                         



  나는 ‘춤’을 통해 삶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춤을 추고, 춤을 추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기 때문에 춤추게 된다. 평생 나의 삶이 춤추듯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바라기에, 죽을 때까지 춤을 추고 싶고 춤추듯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물론 나의 삶이 순조롭게 모두와 함께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비성소수자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나의 글과 꿈들이, 모두에게 사랑을 전하는 언어들로 계속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장례식. 비록 꿈은 이루어 졌지만, 마음은 조금 슬프다.









고통에 대해 글을 쓰려면, 고통이 괜찮아져야 해.

아니면 글을 쓸 수가 없더라고..

70분씩 뛰면 좀 낫긴 하더라.

그리고 글을 쓰면, 다음날엔 너무 아파.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이야기들을 꺼내야 할까..

고통에게 때론 거짓말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충격적인 나의 비주얼이나 이야기들이

한 번쯤 너에게도 생각해 보게 되어서

너의 세상이 넓어지기를 바라고,


아픔이 더 큰 사랑이 되기를 바라니까
아픔을 예쁘게 만들어서

너는 안 아플 수 있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빛은 항상 어둠을 이기니까

나 고통보다 힘이 더 강한 사람이 될게.



                                 -백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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