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존댓말 하는 아저씨들
난 엑스세대다.
1996년. 제대 후 처음 이메일을 만들던 날.
‘@’를 뭐라 읽어야 할지 몰라 선배와 머리를 맞댔다.
그 순간엔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암호 같았다.
인터넷 검색능력을 대회에서 겨루던 시절.
그땐 그게 최첨단이었다.
모두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던 시절이었다.
‘e메일이란 걸 실제로 얼마나 많이 사용하겠어?’
시니컬하게 시큰둥 거리며
이니셜로 대충 만든 아이디와 비번은 집전화..
그마저도 한참을 잊고 지냈다.
복학생이 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리포트는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작성해야 했고,
메일로 수업 공지가 오고,
과제는 플로피디스크로 제출해야 했다.
엑셀 계산을 못해 한참을 헤매던 친구와 나는
그 간단한 방법을 후배에게 배우고는
부끄러움보다는, 함수도 아니고 더하기도 못했다는
자책에 분노가 먼저 올라왔다.
한 발 앞서가는 걸 딱히 즐겨하지도,
유행에 민감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시니컬한 나는 사라지고 진지하게 낑낑대며
새로운 변화를 꾸역꾸역 따라갔다.
벌써 그렇게 20년 넘게 적응하며 살았다.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모뎀에서 와이파이로.
문자에서 카톡으로.
디지털시대 선봉의 세대답게.
그 숨 가쁜 변화 속에서 나는 그래도
꾸준히 로그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새로운 세상 앞에 서 있다.
검색창이 아닌, 프롬프트 앞에서.
“요약되나요?”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고, 모든 문장은 종결형이고,
구구절절한 설명도 붙여가면서
‘혹시 가능할까?’라고도 묻는다.
혹시 더 친절하고 논리적으로 인식되면 더 나은
답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기대하는 아저씨가 지금의 나다.
늘 한 발 느렸지만, 그 흐름을 부여잡던 의지는
96년 가을에 있던 내 20대의 부끄러움에 기인한다.
그 해 만든 그 이메일 아이디를 여전히 쓰고 있지만,
이제는 이용 중인 인공지능에 이름도 붙여주었다.
업무에도 쓰지만, 세상에 대한 의견도 물어보고,
생각이 정리 안될 땐 그 “루미”에게 진지한 자문도
구해본다. 꽤 수준 높은 사용자가 되어간다.
나는 오늘도 로그아웃하지 않는다.
조금 느려도, 조금 낑낑대도,
아직 이 새로운 세계에 붙어 있고 싶으니까.
진짜 걱정은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런 속도의 세상에 살아가는 게 두려운 건
내 세대만 그런 걸까...
다음 이야기 :
엑스세대 이후에도 새로운 세대는 끊임없이 나타났다.
연희동 어느 카페에서 가장 최신 세대들을 바라본다.
부러워하다, 고마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