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가 제로에게 보내는 축사
어느 주말 연희동.
골목 안 작은 공연장.
둘째가 좋아하는 힙합 뮤지션의 리스닝 파티.
연령도 다양, 국적도 다양한 청춘들이 줄을 선다.
나는 아내와 맞은편 카페 창가에 앉아,
“끝날 때까지 뭘 하며 기다릴까” 고민 중이다.
요즘 모든 풍경에 나를 투영한다.
누군가의 웃음이나 거리의 표정,
우연히 들린 대화조차 마음의 거울처럼 읽힌다.
이건 감정의 생존 본능이다.
지금의 현실을 버티려면 의미라도 붙여야 하니까.
있는 그대로 못 보고, 내 고통으로 세상을 덧칠한다.
자기 연민이 바늘처럼 꽂힌다.
그래서 이 낯선 동네만큼 낯선 그 들에게
나를 또 투영하게 된다.
‘나도 저 나이 때엔 저런 들뜬 표정이었을까?’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고 살고 있었었나?‘
이 청춘들은 아직 마이너스는 없어 보인다.
부채도, 공포도 없이, 제로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
그 제로가 지금의 내겐 가장 완벽한 상태처럼 보인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망설임보다 감정을 따랐을까?
부딪히고, 실패하고, 그렇게 매 순간 나를 던졌을까?
청춘은 몰라서 좌절하고, 노년은 할 수 없어 절망한다.
오늘이 내 인생 가장 젊은 날임을 자각한다.
평소 같은 자기 연민이 아닌 내 안의 뭔가가 꿈틀댄다.
'예순 즈음, 오늘을 문득 떠올린다면,
이 시간을 또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겠지.'
나도 저 빛나는 청춘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저 들처럼, 순간에 충만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들만큼 생기롭진 않아도 내 방식이 있지 않을까?
불안을 덜진 못해도, 그 불안마저 느긋하게 품어내면,
내 방식으로 빛나는 '상대적 청춘' 아닐까.
잃은 것이 아닌, 앞으로 만들어 갈 것에 집중하기.
그저 꿈꾸는 방식에서 일단 움직이는 방식으로.
둘째 아이가 방방 뛰고 있을 힙합 공연장 앞에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공허한 질문은 안 한다.
이 시간을 강하게 붙들고 내 방식대로 즐길 요양이니.
내가 나름 끙끙대며 글을 써 가듯이,
저 들도 맞닥친 현실과 두려움을 음악을 통해
잊고, 극복하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이너스 아저씨가 제로인 저 청춘들에게
보내고 싶은 부러움과 축사다.
'이러나저러나 정말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과잉이자 오지랖이다.
이 나이에도 걱정과 막연함은 형태만 달리할 뿐이고,
오히려, 부족한 시간에 더 조급해지기만 한다고.
단단해 보이는 삶도 어느 한순간에 바닥을 치고,
다시 추억하며 웃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내일은 모르니까,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자신과 오늘에 충실하면서 살아보자는 제안이다.
'오늘 공연을 온전히 즐기고, 뛰고, 소리 지르고.'
'연희동 어느 펍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가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고마워요.
오늘은 그 대들을 통해 힘을 얻고 갑니다.'
다음 이야기 :
미혼인 시절. 지금은 소원해진 선배의 푸념.
"애 키우는 건 도 닦는 것 같아"
좀 새겨들을걸.. 준비도 인격도 덜 된 나는 첫 애와
서로에게 ‘지옥 같던‘ 그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