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지 못할 인생필름 한 컷.
“야... 이 X 같은 자식아.”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자신도 놀랄 만큼 낯설고 위험한 말이었다.
그리고 곧, 손이 따라 올라갔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한 참이던 겨울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특별한 징후 없이 왔다.
엄마에 대한 여과 없는 막말이나, 동생에 대한 폭력적 모습이 반복되긴 했지만,
첫 아이의 사춘기가 좀 유난스러울 뿐이라며,
한 발 빠져 있는 게 낫다고 합리화하며 방관하던 시기.
퇴근길. 빨리 집에 와달라며 울먹이며 걸려온 전화.
거실은 어두웠다. 그는 현관 중문을 닫고 정지되었다.
산 지 석 달도 안 된 TV엔 금이 가 있었고,
바닥엔 리모컨과 부서진 공기청정기가 흩어져 있었다.
그의 삶도 부서진 것 같은 찰나였다.
안방에서 흐느끼는 아내의 절망과
자기 방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둘째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성을 잃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추궁을 당하던 첫 아이의 입꼬리가 조롱하듯
실룩거려 보였을 때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진 듯했다.
한 번도 집에서 하지 않았던 욕설과 함께
그는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이 빰의 퍼런 멍을 보게 된다.
그제야 자기 손등이 욱신거리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이를 때렸다는 사실만큼, 그 순간의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가 더 오래 괴롭혔다고 한다.
아이와의 지난 시간과 관계가 완전한 실패였고
다시는 아이의 마음에 접속할 수 없겠다는 절망.
그는 자주 그날을 되감는다. 그 손이 멈추기를 바라며.
한번만 한숨을 깊게 쉬기만 했더라면,
하지만 과거는 영원히 편집되지 않는다.
단 둘이 갔던 몇 번의 여행이었을까,
처형을 통해 입양한 반려견이었을까,
그냥 서로의 공간에 여백을 주던 시간의 힘이었을까?
3년이 지난 지금 그 들은 거의 다시 돌아왔다.
극적 화해나 회복의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멈춘 듯 한 시간이 어쩌다 보니 지나간 듯도 하다고.
이제는 먼저 다가와 시시콜콜 자기 얘기를 한다.
엄마에게도 따뜻한 눈 빛과 농담을 건네고,
주말이면 동생과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그도 아이의 감정에 다시 로그인해 보려고 애를 쓴다.
확실한 건 그 시간을 견내내고,
정면으로 극복해 온 건 그를 뺀 모두였다.
눈치챘겠지만 이 건 진우연의 이야기다.
절대 반복하지 않기 위한 사적 기록.
우리는 각자의 방 안에서 소리를 삼키며 지냈다.
침묵과 회피의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사춘기라는 작은 바람이 '준비 안된 아빠'라는 존재와
만나 허리케인이 되어 온 집안에 휘몰아쳤다.
칼날처럼 예리하던 시간이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지금은 제법 잘 지내고 있다. 정말 다행히.
첫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더 자주 꺼내 본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투명한 눈.
나도 같이 웃게 되는 세상 밝은 미소.
그 사진 속에 있는 행복에서 그날이 겹쳐진다.
영화의 스틸 컷처럼.
아마도 아이 안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내 것보다 더 선명하고 고통스럽게.
요즘도 그날을 의식적으로 꺼내본다.
그날을 스스로 박제하고 곱씹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이자 단련.
다음 이야기 :
무너짐과 회복,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티는 두 남자.
그들의 걸음에서
나도, 조금은 나를 덜 미워하는 법을 배워간다